역사속 오늘

화가 박수근 사망

새벽에 일어나 이불을 개고 청소한다. 오전에 시작한 작업은 오후 서너시경 얼추 끝내고 아내 일을 돕는다. 하루 서너마디 뿐 말도 없다. 오후 늦게서야 발걸음을 시내로 돌려 전시회 등을 돌아보고 동료화가들과 대폿집에서 한잔하면 어느덧 늦은 밤이다. 비라도 내리는 날 과일을 사러 나가면 가족들은 답답하다. 하루벌어 하루먹고사는 사람들에 골고루 팔아주기 위해 이집저집을 드나들다보니 늦었단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아내로부터 핀잔을 들으며 돌려주긴 했지만, 아기를 업고 뜨거운 뙤약볕 속을 다니는 아내가 측은해 양산을 훔친 적도 있다. 평생을 궁핍 속에서 살면서도 정직하고 우직하게 그림 만을 그려온 박수근의 일상이다.

박수근이 살던 시대는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기였다. 박수근 역시 부친의 사업 실패로 가정이 풍비박산하면서 보통학교를 졸업하는 것으로 배움의 길을 접고는 가난과 싸우며 독학으로 자신의 길을 갔다. 12살 때 처음 책에서 밀레의 ‘만종’을 보고서는 “하나님 저도 이런 화가가 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는 박수근은 한 미술평론가의 말처럼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났을 뿐 천재들에게서 흔히 목격되는 정열과 광기, 드라마틱한 삶의 역정을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다. 소박한 소시민이었고 보통사람이었으며 더없이 자상한 아버지였다.

그림에서는 평범한 사람들의 질박한 삶이 묻어나오고 행상 등 가난한 서민들이나 일하는 여성이 주로 등장한다. 가난과 전란 속에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춘천, 평양 그리고 서울의 창신동을 떠돌며 때로는 도청 서기로, 때로는 미군부대 초상화가로 또 때로는 부두노동자로 전전하면서도 언제나 꿈을 잃지 않았고 화필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평생 그의 벗이 되고만 가난 탓에 아들을 잃었고, 화가에게 생명같은 눈이 실명되는 불운을 겪었다.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 1965년 5월 6일 그가 숨지면서 내뱉은 마지막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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