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세계 교육사상 전례 없는 전시연합대학 부산에 설치

전황이 차츰 호전돼 가던 1951년 5월 4일 정부가 ‘대학교육에 관한 전시 특별조치령’을 발표함으로써 세계교육사상 전례가 없는 ‘전시연합대학’의 법적인 근거가 마련됐다. 전시연합대학은 이미 1950년 11월부터 2개월 동안 500여 명을 대상으로 서울에서 실시된 적이 있지만 전쟁의 장기화로 수업을 계속 진행할 수 없었다.

1951년 2월 18일에 다시 부산에서 문을 연 전시연합대학의 법적인 근거를 마련한 것이 이날 발표된 특별조치령이었다. “전화(戰禍)로 인해 정상 수업이 불가능한 대학생은 타 대학에서 수업을 받을 수 있고, 정상 수업이 가능한 대학은 사정이 허락하는 한 그 학교 소재지로 옮겨온 타 대학 학생의 취학을 허락해야 한다”는 게 요지였다. 경비는 서울과 부산의 국립대 예산에서 충당했다. 천막·창고 등을 교사로 삼아 그런대로 대학을 꾸려갈 수 있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교수부족이었다.

대학은 부산 외에 광주·전주·대전에도 설치됐다. 4개 대학에 수용된 학생은 6455명이고, 동원된 교수는 444명이었다. 가교사를 짓고 점차 자리를 잡아갔으나 전쟁이 막바지로 접어들자 1952년 5월 31일자로 해체됐다. 전시연합대학이 해체되고 지방의 각 대학이 개별적으로 대학을 운영하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의 지방 국립대학의 모태가 됐다.

이처럼 전쟁 중에도 교육열은 식지 않았고, 피란지의 노천학교, 야외학교의 모습은 눈물겨웠다. 당시 미국의 뉴욕타임스지 보도의 한 대목이다. “남한에서는 정거장, 약탈당한 건물안, 천막, 묘지에서까지 수업을 하고 있다. 어느 시골에 가도 나무 밑에 학생들이 모여 앉아 나무에 흑판을 걸고 책을 돌려가며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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