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프랑스 ‘5월 혁명’… 이후 현대문명 탈근대 쪽으로 물꼬 틀어

발단은 부실한 학교 시설을 개선해달라는 학내 문제였다. 학생들이 교내에서 집회를 강행하자 경찰이 이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1968년 3월 22일 파리대 낭테르 분교에서 일어난 일이다. 5월 2일 학생들이 학교를 점거하며 반발하자 학교 측이 다음날 ‘학교 폐쇄’로 맞섰다. 이에 분노한 학생들이 5월 3일 파리대학의 본부 격인 소르본 대학(파리4대학)으로 몰려가자 경찰은 600여 명의 학생들을 체포하고 대학 측은 소르본 대학 역시 폐쇄했다.

파리에서 베트남평화회담이 시작된 5월 10일 밤에는 도로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해방구를 만들려는 급진파 학생들과 경찰 간의 난투극으로 아수라장이었다. 어느덧 구호도 기성의 질서 전복을 겨냥했다. 노동자들이 가세했고, 미테랑 등의 좌파 세력도 동참했다. 무정부주의자·마오주의자·트로츠키주의자 등 다양한 세력들도 정치·사회혁명을 요구하며 목청을 높였다. 시설개선 요구가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요구로, 다시 정권 타도로 발전한 것은 그동안 쌓여온 불만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프랑스”라는 드골 대통령의 가부장적 통치 스타일이 정치권을 짓누르고 있었고, 사회는 점점 보수화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5월 사태’는 단기간에 끝나버렸다.

공산당이 돌연 ‘5월 사태’를 프티 부르주아적 모험주의라고 비난하며 돌아선 데다 노동자들도 임금인상과 최저임금 상향조정에 만족했기 때문이다. 드골은 여세를 몰아 의회 해산과 총선 실시라는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6월 말 실시된 총선에서 드골은 485석 중 358석을 차지하는 유례없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5월 사태’가 이후 사회에 끼친 영향은 컸다. 여성운동·녹색운동·게이정치 등 모든 운동들이 이때를 기점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현대문명도 탈근대 쪽으로 물꼬를 틀어 포스트모던의 새 시대로 접어들었다. 덕분에 ‘5월 사태’는 ‘5월 혁명’으로 격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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