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한국화의 두 거장 이상범·변관식展]과 미술 문외한의 낯선 만남 (2-2), 그리고 박명자 관장

↑ 이상범 그림을 전시하고 있는 현대화랑 내부

 

by 김지지

 

■이상범의 작품과 삶

 

▲현대화랑에서 만난 이상범의 작품… 편안하고 푸근

이상범의 작품은 갤러리현대에서 지척에 있는 현대화랑에서 관람객을 맞는다. 두 거장의 작품 차이를 반영하듯 전시장의 규모와 구조에서도 차이가 드러난다. 갤러리현대가 대작 전시에 어울린다면 현대화랑은 그보다는 크기가 작은 작품을 전시하는데 적합해보인다. 동행한 여성은 개성이 강한 변관식의 그림을 보다가 정갈하게 그린 이상범의 그림을 보니 상대적으로 편안하다며 따듯하고 푸근하다고 한다. 내가 봐도 힘을 뺀 상태에서 기분 내키는 대로 붓으로 툭툭 터치했다는 느낌이 든다.

이상범의 그림에도 ‘내금강 진주담’이 있다. 같은 제목의 변관식 그림과 비교하면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그 차이를 금방 알 수 있다

 

▲이상범의 삶… 선전 10회 연속 특선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 세워

이상범(1897~1972)은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돌도 지나기 전에 아버지를 여의어 9살 때 어머니를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초등학교는 졸업했으나 가정 형편상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없게 되자 학비가 없는 서화미술회 강습소에 1914년 4기생으로 입학했다. 그때 함께 입학한 동기생이 장차 유명 한국화가가 될 노수현(1899~1978)이다.

화실에서 작업하다가 붓을 놓고 잠시 쉬는 이상범

 

이상범은 1918년 4월 졸업할 때까지 노수현과 함께 조선 말기의 최고 화가인 심전 안중식(1861~1919)과 소림 조석진(1853~1920)에게 그림을 배웠다. 졸업한 후에도 1919년 10월 스승 안중식이 작고할 때까지 안중식의 개인 화실인 경묵당에서 스승의 작품을 대필하며 그림을 배웠다. 안중식은 두 제자를 총애해 자신의 아호 ‘심전’에서 첫 글자를 떼어 노수현에게는 ‘심산’이란 호를 주고 뒷 글자인 ‘전’자는 이상범의 ‘창전’에 부여했다.

이상범과 노수현은 1921년 4월 제1회 서화협회전(협전)에 출품하고 1923년 3월 서화미술회 출신의 신진 작가들이 ‘동연사’를 결성할 때 함께 참여했다. 이상범은 1922년 6월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 동양화부에 출품, 노수현과 나란히 입선했다. 2회와 3회 때도 연속 입선하고 1925년의 제4회 선전에서는 특선에 해당하는 3등상을 차지했다. 당시 선전은 1등부터 4등까지를 특선으로 분류했다.

이후에도 1934년 제13회 선전까지 10년 연속 내리 특선에 입상, 선전 10회 연속 특선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1929년 제8회 선전에서는 최고상인 창덕궁상의 영예를 안았고, 1935년 제14회 선전에서는 이영일(동양화), 김종태(서양화)와 함께 그해 처음 도입된 무심사(無審査) 추천작가로 선정되었다. 1938년 제17회 선전 때는 심사위원 격인 참여작가로 선정되어 일약 근대 화단의 대표 스타로 부상했다.

 

신문의 소설 삽화와 네컷 만화도 그려

이상범은 초기에는 스승 안중식의 영향을 받아 세심한 필선을 중심으로 한 관념적인 산수를 그렸으나 점차 미점(米點)을 반복적으로 사용해 부드럽고 평온한 풍경의 화풍으로 바꿔나갔다. 미점은 수목이나 산수 따위를 그릴 때 가로로 찍는 작은 점이다. 중국의 남화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선을 구사하지 않고 토막진 작은 점을 반복 사용하면서 형상을 만들고 그러다 보면 전체 구성이 완성되는 방식이다.

신문소설 삽화는 노수현이 그랬듯 이상범이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도록 도와준 주요 수입원이었다. 첫 신문 삽화는 1925년 1월 시대일보에 연재된 나빈의 소설 ‘어머니’였다. 본격적으로 신문 삽화를 그린 것은 1926년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입사하고서였다. 삽화와 더불어 만화도 그렸는데 1924년 10월부터 조선일보에 한국 최초의 네 컷짜리 만화 ‘멍텅구리’를 그리던 노수현이 1926년 중외일보로 이직하자 그 뒤를 이어받아 1927년 3월 연재가 끝날 때까지 ‘멍텅구리’를 그렸다.

삽화 그리기는 1927년 10월 동아일보 학예부 미술기자로 입사해서도 계속되었다. 동아일보에 연재된 이광수의 소설 ‘단종애사’와 ‘흙’을 비롯해 김동인의 ‘젊은 그들’, 현진건의 ‘적도’, 심훈의 ‘상록수’ 등의 삽화가 그의 손을 거쳤다. 동아일보가 1932년 충무공 유적 보존운동을 벌여 아산 현충사를 중수할 때는 2점의 이충무공 영정을 그려 초상화에서도 일가를 이뤘다. 1936년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살 사건’도 그의 붓끝에서 이뤄졌다. 결국 이상범은 경찰서에서 40일 동안 고초를 당한 끝에 풀려나 1937년 5월 동아일보를 퇴사했다.

이상범의 신문 삽화. 동아일보에서 연재한 이광수의 ‘단종애사’ 삽화(1928년 11월 30일)

 

해방 후에는 향수 자극하는 향토색 짙은 산천 그려

이후 해방 때까지 사실상 칩거하면서 화풍의 변화를 시도했다. 금강산을 직접 유람하고 돌아와 화폭 위에 옮기는 과정을 통해 수묵의 다양한 방법들을 실험했다. 이를 통해 필묵의 다양한 표정과 생동감을 다루는 새로운 표현력을 터득했다.

하지만 일제 말기에는 ‘친일’로 기울어 친일 미술전인 ‘반도총후미술전’과 ‘결전미술전’ 등에 그림을 출품하고 일제를 위한 국방헌금 모금 전시에 참여했으며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나팔수’라는 제목으로 일장기 아래서 나팔 부는 병사 그림을 그렸다. 여기에 일제의 관전인 ‘조선미술전람회’에서 10회 연속 특선하고 심사위원 격인 참여작가로 선정된 것까지 더해져 친일 작가로 분류되었다.

결국 해방 후 전체 미술가를 대상으로 결성된 ‘조선미술건설본부’의 회원 입회를 거부당하고 1949년 창설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에서 탈락하는 등 좌절을 겪었다. 더구나 화가이던 큰아들이 6·25 때 월북하고 전쟁 직후 두 번째 부인마저 세상을 떠나 심적 고통이 컸다. 다행히 홍익대 미술과 교수로 부임한 것을 계기로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과 예술원 회원 등으로 추대되어 미술계의 지도급 중진으로 위상을 공고히 했다.

이렇게 제2의 황금기를 맞으면서 화풍은 더욱 분명해졌다. 우리나라 산천의 평범한 야산과 둔덕, 완만하게 경사진 언덕과 들판, 맑은 하천과 정감 어린 수목들을 무대로 순박하게 살아가는 촌부의 모습을 표현함으로써 향수를 자극하는 향토색 짙은 산천을 그려냈다. 이는 친일 논의에서 벗어나기 위한 의지의 산물이기도 했다.

이상범의 ‘추경산수’ (1960년대, 종이에 수묵담채, 68×181㎝)

 

그러다 보니 그림이 “천편일률적이다”, “변화가 없다”, “구성이 기계적이다”는 등의 부정적 평가를 들어야 했으나 바로 이런 점이 이상범 양식의 요체라는 반론도 있다. 이상범은 평생 전시회다운 개인전을 한 번도 열지 못하고 1972년 5월 세상을 떠났다. 1952년 대구 피란 시절에 조촐한 전시회만 한 번 열었을 뿐 제대로 된 전시장에서 개최하는 개인전은 열지 못했다.

 

■박명자, 한국 화랑계의 산 증인

 

한국 화랑(畫廊)의 역사를 말할 때 박명자(1943~ )를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삶 자체가 한국의 화랑사이기 때문이다. 박명자는 숙명여고를 졸업한 1962년 아버지 친구 소개로 반도화랑에 들어갔다. 반도화랑은 반도호텔(현재 롯데호텔 자리)의 한쪽 코너 공간에서 운영되던 사실상 화가들의 사랑방이었다. 당시 박명자는 미술에 대해 아는 게 없어 그곳을 드나드는 화가들의 담배와 커피 심부름을 하면서 화가들과 친해졌다.

박명자 전 관장

 

그중 그가 각별하게 생각하고 아버지처럼 여겼던 작가는 박수근이었다. 정규 미술교육도 받지 못하고 입상 경력도 변변치 않은 박수근에 대해 박명자가 관심을 갖게된 것은 화랑이나 전시장에 오는 외국인들이 유독 무명화가인 박수근의 그림에 관심을 표시하거나 사가는 것이 신기했기 때문이다. 당시 외국인들은 화강암처럼 질박한 독특한 마티에르 기법으로 시장의 아낙네들, 어린이, 시골 노인 등을 화폭에 담아내는 박수근의 그림에서 한국적 정서를 느꼈다.

나중에 박명자가 박수근의 미망인에게서 들은 얘기에 따르면 박수근이 반도화랑을 자주 찾아온 것은 세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작품이 팔렸으면 생활비를 가져가려는 것이고 둘째는 저녁에 술자리라도 있는가 궁금해서이고 셋째는 몸이 부어서 용변을 보기 힘든데 반도호텔에는 양변기가 있어서였다.

박명자는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나도 모르게 그림을 보는 눈이 길러졌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렇게 8년이 흐르니 누가 그림을 잘 그리는지 고객들은 어떤 그림을 좋아하는지를 판별하는 안목이 생겼다. 그림 매매 후 작가든 수집가·컬렉터든 양쪽 모두 불만스러워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박명자가 내린 결론은 작품을 정당한 가격으로 팔고 사게 하는 신뢰할 만한 화상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마침 운보 김기창이 “명자는 성격이 밝고 눈썰미가 있으니 화랑을 열어보라”고 권했다. 그 무렵 박명자의 가장 큰 자산은 반도화랑에 근무할 때 얼굴을 익힌 많은 화가들과 수집가들이었다.

 

박명자가 개관한 현대화랑은 진정한 의미의 한국 최초 화랑

박명자가 서울 인사동 네거리 한쪽 코너에 현대적이고 전문적인 화상 역할을 할 현대화랑의 문을 연 것은 1970년 4월 4일이었다. 그 무렵은 산업화가 막 기지개를 펴고 중산층이 형성될 때였다. 당시 박명자는 27세로 두 아이의 엄마였다. 규모는 석조건물 2층에 건평은 40평이었다. 전시실은 4개의 방으로 꾸몄다. 1실에는 유화와 조각, 2실에는 동양화와 서예, 3실에는 작고했거나 활동을 못하는 노화가 그림, 4실에는 동서양화의 소품을 전시했다. 개관 당시 200점의 작품을 전시했는데 2만원에서 100만원까자 다양했다.

현대화랑 개관 당시 전시장 내부 모습

 

현대화랑이 문을 열기 전까지 ‘화랑’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곳들은 대부분 작품 진열, 전시장 대여 등의 목적으로 운영되었지 그림을 팔고 사는 기능은 사실상 유명무실했다. 즉 전시를 열어 작가와 작품을 홍보하고 작가와 컬렉터 사이의 미술품 거래 중개를 통한 상업적 이윤 추구라는 오늘날의 일반적인 화랑의 목적과는 운영방식이 달랐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미술 전문가들은 현대화랑을 진정한 의미의 한국 최초 화랑으로 꼽는다.

현대화랑의 첫 초대전은 1970년 9월의 박수근 유작소품전이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저자 유홍준은 그 유작전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이렇게 전했다. 그는 “대학 4학년 때 신문에서 ‘그림을 팝니다’라는 신종 업종 소개 기사를 봤다. 이는 1980년대 ‘이태원에 피자가게가 생겼다’라는 기사가 나온 것만큼 재미있고 신기한 일이었다”며 “박수근 소품전에서 가정교사 월급 한 달치를 털어 스케치 한 점을 샀다.”고 했다. 박명자는 이후에도 1985년 20주기전, 1995년 30주기 기념전 등 모두 5차례에 걸쳐 박수근 전시회를 열었다. 그 덕분인지 가난한 무명화가는 곧 ‘국민 화가’로 부각되었다.

전농동 작업실에서 작업 중인 박수근(1963년)

 

이후에도 근현대 한국미술의 대표적 작가들이 현대화랑을 거쳐갔다. 1970년 김기창전, 1971년 장우성전에 이어 1972년 연 이중섭 유작전은 관객들이 장사진을 쳐 이중섭 신화의 모태가 되었다. 박명자는 전시회를 통해 1400부의 도록을 팔고 100원의 입장료를 받아 벌어들인 수입으로 이중섭의 작품 ‘부부’를 사서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다. 1973년 천경자전은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현대화랑은 이렇게 당대 최고의 문화사랑방으로 발돋움했다.

박명자의 작가 선정 탁월성과 전시 기획력이 현대화랑의 승승장구 비결

박명자는 이후에도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활발한 전시를 통해 미술문화의 지평을 열고 1973년 9월 최초의 미술전문잡지인 ‘화랑’을 창간함으로써 미술의 대중화를 선도했다. 현대화랑은 당시 인사동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시·유통되던 고서화 중심에서 벗어나 남관, 천경자와 같은 서양화가의 작품들을 선보이며, 현대적이고 최신의 미술계 흐름을 선보이는 화랑으로 자리매김했다.

현대화랑은 1975년 경복궁 옆 사간동의 새로운 공간(현재 서울시 종로구 삼청로 8)으로 이전했다. 1987년에는 현대화랑 명칭을 갤러리현대로 변경하고 1995년에는 인근에 있는 현재의 새로운 전시장 문을 열었다. 외국에서 열리는 아트페어에도 참가해 한국 작가를 알렸다.

백남준에 대한 그의 관심은 백남준이 세계적 작가로 성장할 수 있게 한 밑거름 역할을 했다. 박명자는 일본산 소니 전자제품을 비디오아트 소재로 사용하는 백남준에게 삼성전자 측이 TV모니터를 지원하도록 도움을 주었으며 1990년 백남준이 현대화랑 뒷마당에서 요셉 보이스 추모굿을 펼치도록 지원했다. 그 추모굿은 해외에서 활동하던 백남준이 처음 국내에서 행위예술을 선보인 자리였다.

1990년 현대화랑 뒷뜰에서 보이스 진혼굿판을 벌이고 있는 백남준

 

전문가들은 박명자와 현대화랑이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비결로 박명자의 작가 선정 탁월성과 전시 기획력을 꼽는다. 사실 전시 기획력은 대가들의 작품을 소장자에게서 얼마나 많이 적시에 빌려오느냐에 달렸다. 누가 어떤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지를 훤히 꿰고 있어야 하는데 박명자의 머릿속에는 ‘소장자 지도’가 입력되어 있었다. 박명자는 이번 전시회에도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인주문화재단 등 여러 기관과 개인 소장가에게서 작품을 빌려왔다. (끝)

 

[한국화의 두 거장 이상범·변관식展] 2-1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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