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한국화의 두 거장 이상범·변관식展]과 미술 문외한의 낯선 만남 (2-1)

↑ 전시회를 알리는 갤러리현대 건물

 

by 김지지

 

■<청전·소정 展>의 성공적 감상을 위한 워밍업

 

2019년 4월 <한국화의 두 거장 청전(靑田)·소정(小亭)>전이 서울의 갤러리현대와 현대화랑에서 열린다는 기사가 주요 신문의 문화면을 크게 장식했다.

제목을 살펴보면 이렇다. <깔깔한 소정·안온한 청전… 한국화 맞수 다시 불러내다>(연합뉴스 4월 6일), <은근한 청전 이상범, 박력있는 소정 변관식>(매일경제 4월 8일>, <두 거장이 피워낸 수묵의 ‘봄’>(조선일보 4월 12일>,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靑田 산수’… 선과 형태 극도로 강조 ‘小亭 양식’>(동아일보 4월 17일), <‘모범생’ 이상범과 ‘자유인’ 변관식의 작품을 비교하며 보는 재미>(경향신문 4월 18일).

이상범과 변관식 두 거장이 한국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를 대강은 알고 있던 터라 기사를 읽는 순간 불현듯 가보고 싶어졌다. 문제는 내가 그림 감상에는 완전히 문외한인 이른바 ‘미알못’(미술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관람료 5000원을 지불하면서까지 일부러 유료전시회를 찾아간 것은 내게는 흔치 않은 결정이었다.

전시회를 보도한 신문기사 제목들

 

전시장 방문에는 나와 같은 집에서 30년째 함께 살고 있는 미모의 중년 여성이 동행했다. 그는 청춘 시절 그림에 관심이 많아 이런저런 유화와 수채화를 취미 삼아 그린 바 있지만 생활이 바쁘다는 핑계로 붓을 놓은 지 오래다. 그와 함께 경복궁사거리에서 삼청동 방향 초입에 위치한 갤러리현대를 찾아간 것은 4월 19일 점심시간이었다.

 

신문기사를 미리 읽고 관람하니 정말 아는 만큼 보여

두 거장의 그림은 지척인 두 공간에서 전시되고 있었다. 기간은 4월 10일부터 6월 10일까지다. 소정(변관식)의 그림은 갤러리현대에서, 청전(이상범)의 그림은 현대화랑에서 관람객을 맞았다. 갤러리현대 건물 뒤쪽에 위치한 두가헌 레스토랑의 부속 공간에서도 두 거장의 소품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전시물은 각각 40점씩 모두 80점이다.

이번 전시회가 여러 신문 문화면에 비교적 비중있게 보도된 것은 두 거장의 전시라는 점이 주요 이유였겠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다. 그것은 49년 전인 1970년 갤러리현대를 개관하고 지금도 소유주로 있는 박명자 전 관장의 영향력이다. 박명자에 대해서는 이 글의 후반부에서 소개할 것이다.

나는 그림 감상에 사실상 까막눈이나 다름없어 신문기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나를 먼저 위로해 준 것은 경향신문 기사였다. “미술 문외한이 보기에 한국화는 다 ‘거기서 거기’ 같다. 수묵으로, 그러니까 흑백 위주로 그림을 그리고 ‘여백의 미’를 중요시해 공간을 풍족하게 남겨둔다는 정도만 알고 있다. 작가마다 제각각의 개성을 담아 그림을 그렸겠지만 문외한의 눈에는 다 똑같아 보인다.”고 쓰여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아무리 ‘미알못’이라도 미리 공부만 하면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격언을 새삼 확인했다는 점에서도 신문기사는 내게 맹인안내견 같은 역할을 했다.

 

이상범과 변관식은 근현대 한국화의 ‘영원한 맞수’

이상범과 변관식은 근현대 한국화의 ‘영원한 맞수’로 통한다. 두 살 터울의 두 사람은 192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면서 우리 민족의 정서를 화폭에 재현해냈다. 위 기사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 그림을 그리는 방식과 삶의 행로는 판이하게 달랐다. 붓을 잡는 법, 그림 그릴 때 팔을 놓는 방식, 화면구성 등 모든 면에서 대조적이다. 이상범은 담묵(淡墨·묽은 먹물)과 담채(淡彩)의 섬세한 변화를 즐긴 반면 소정은 먹을 강하고 짙게 썼다.

이상범(왼쪽)과 변관식

 

박명자 전 관장은 “그림은 사람을 닮게 마련”이라며 “이상범은 그림처럼 성품이 온화하고 기복이 없고. 변관식은 분을 참지 못하는 정의파였다”고 구분했다. 그 차이는 각기 개성적인 ‘청전 양식’과 ‘소정 양식’으로 한국 미술사에 기록되었다.

언론은 두 거장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구사한 기법은 확연히 달랐다. 이상범은 툭툭 치듯 먹물을 발라 산과 들, 혹은 하천의 계절 풍경을 온화하면서도 푸근하게 담아낸다. 반면에 변관식의 붓질은 깐깐하면서 에너지가 넘친다”(국민일보).

“이상범은 모범생처럼 그림에 몰두해 그에 걸맞는 정갈하고 편안한 그림을 내놓았다. 변관식은 제도권 밖에서 치열하게 그림을 그렸고 편안함보다는 강렬함이 먼저 보이는 작품들을 남겼다”(경향신문).

“이상범은 전통 산수화 기법에 원근법적 요소를 수용해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산수를 탄생시켰다. 기존 관념적 산수화의 방식을 답습하지 않은 독창적 화풍을 일궈냈다. 변관식은 선과 형태를 극도로 강조한 화풍을 통해 개성을 추구했다”(동아일보).

“이상범의 작품은 관람객을 안온하게 감싼다. 우리네 산촌 핵심적인 특징만 잡아내, 쌀알을 찍는 듯한 미점법(米點法)으로 표현했다. 번지듯 스민 담묵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속으로 파묻힐 것만 같다. 변관식은 같은 산야라도 그의 분방한 붓을 거치면 달리 태어남을 보여준다”(연합뉴스).

기사를 미리 읽고서 그림을 감상하니 신기하게도 정말 아는 만큼 보였다. 상반된 화풍의 그림을 비교해가며 감상하는 즐거움도 쏠쏠했다.

 

■변관식의 작품과 삶

 

▲갤러리현대에서 만난 변관식의 작품… 강렬하고 에너지 넘쳐

먼저 찾아간 곳은 변관식의 그림을 전시하고 있는 갤러리현대다. 현대화랑의 이상범 그림까지 감상하는데 5000원이란다. 거장의 그림을 감상하는 비용치고는 저렴하다. 비록 미알못이지만 전시회는 유료가 좋다는 게 내 어설픈 지론이다. 그림을 더 꼼꼼하게 살피고 세심하게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시 공간은 지하 1층, 지상 1층과 2층 등 3개층이다.

전시장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공간이 넓고 대작들이 많아 반가웠다. 내 눈에는 언제나 대작이 시원시원하고 그럴 듯 해보인다. 반면 동행한 여성은 그림이 크고 붓놀림이 거칠어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한다. 성격 차이는 이런 것에서도 나타난다.

변관식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갤러리현대 전시실. 우측이 대표작 ‘농촌의 만추’다.

 

전시장을 둘러보니 같은 제목의 그림들이 많았다. ‘내금강 진주담’ 그림이 4점, ‘내금강 단발령’이 2점, ‘외금강 삼선암’이 4점이나 된다. 전반적으로는 눈이 호사를 누렸지만 유독 ‘설촌기려(雪村騎驪, 1963년, 112.5×117.5㎝)’만 정이 가지 않았다. 어렸을 때 흔히 보던 크리스마스 카드와 이미지가 겹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술관 측이 관람객에게 배포하는 한 장짜리 작품해설서에서 ‘설춘기려’를 변관식의 주요 작품 중 하나로 꼽은 것을 보고 미알못의 한계를 실감했다.

미술관 직원이 “사진을 찍어도 된다”길래 마음놓고 사진을 찍는데 찰칵 찰칵 너무 커 주위를 살피며 찍어야 했다. 그렇게 눈치를 보며 찍은 사진인데도 조명빛과 반사빛이 들어가 사진 상태가 썩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계단을 통해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곳에 변관식의 대형 사진이 걸려있다. 반가운 마음에 일단 찍어놓기는 했는데 사진촬영이 활발했던 1960~1970년대에 두 거장이 작고했는데도 인터넷에서 도무지 선명한 사진을 찾을 수 없다는 게 의아했다.

변관식은 1930년대 후반부터 8년 간 금강산에 살다시피해 금강산 그림이 많다. 그때 몸으로 체험한 금강산 그림이 80여 점이나 된다. 전시장에도 금강산을 소재로 한 그림이 많았다. 그것을 보면서 그림에 등장하는 장소의 사진이나 금강산 옛 지도를 함께 전시하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해봤다.

변관식의 ‘내금강 진주담(內金剛眞珠潭)’ (1960년대, 종이에 수묵담채, 262×121㎝)
먹을 겹쳐 발라 아찔하게 깎아내리는 절벽과 바위 질감을 입체적으로 그렸다. 강한 힘이 느껴지는 산세와 폭포수의 조화가 압권이다.

 

금강산 내금강 진주담 실제 모습
▲변관식의 삶… 금강산 등 팔도강산 유람하며 자연 승경에 탐닉

변관식(1899~1976)은 겸재 정선의 맥을 잇는 ‘진경산수화’의 대가로 불린다. 정선은 동양화의 양대 기법인 ‘필법’과 ‘묵법’을 한 화면에 이상적으로 조화시켜 ‘진경산수화법’을 창안한 18세기의 대화가다.

변관식은 황해도 옹진에서 한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11살 때 조선 말 대화가이던 외조부 조석진의 서울 외가로 올라왔다. 보통학교의 일본인 교장과 담임이 그림 재주를 칭찬하며 일본 유학을 권할 정도로 그림에 재능이 있었으나 외조부는 손자가 화가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림만으로 먹고 사는 게 힘들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손자가 말을 듣지 않자 회초리로 때리기까지 하며 그림 그리는 것을 만류했다.

화업에 열중하고 있는 변관식

 

그러나 변관식은 화업을 포기할 수 없었다. 외조부를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조선총독부 공업접습소 도기과에 들어가 2년 과정을 마쳤다. 그 후 조석진과 안중식 등이 1916년부터 서화를 가르치고 있는 서화미술회 강습소에 연구생 자격으로 드나들면서 당시 그곳에서 그림을 배우던 김은호, 이상범, 노수현 등과 교유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조석진의 그림을 대신 그릴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변관식은 1921년 시작된 순수 우리 미술가들의 전람회인 ‘서화협회전(협전)’에 첫해부터 입선하면서 화단에 등단했다. 하지만 1921년은 개인적으로 매우 힘든 시기였다. 아버지(1915년)와 외할아버지 조석진(1920년)을 이미 여읜 상태에서 어머니와 아내가 3살 난 딸을 두고 그해 세상을 등졌기 때문이다. 변관식은 이후 술, 산천, 그림에 빠져들었다. 유랑벽이 생긴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런 중에도 일제 총독부가 1922년 6월 개회한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첫해부터 출품, 1회(1922년) 때 입선을 하고 4회(1925년) 때 4등상을 수상해 실력을 인정받았다. 1923년 3월에는 이상범, 노수현, 이용우와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한국화 동인회 ‘동연사’를 결성, 고루한 형식의 동양화에서 벗어나 새로운 기운을 모색할 것을 결의했다.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모습

 

겸재 정선의 맥을 잇는 ‘진경산수화’의 대가

변관식은 1925년 김은호와 함께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도쿄미술학교의 청강생으로 적을 두고 고무로 스이운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우며 5년여의 기간을 보냈다. 틈틈이 선전에도 출품, 6회(1927년)와 7회(1928년) 때 입선했다. 그러나 1929년 가을 귀국 후에는 선전 출품을 중단하고 협전에만 출품함으로써 선전을 중심으로 형성된 주류 화단과 거리를 두었다. 선전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이 이유로 추정되지만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주류 화단에 대한 실망과 염증도 영향을 미쳤다.

변관식은 1936년 일제의 압력으로 중단된 마지막 협전(15회)에 출품한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미술전시회에는 응모하지 않고 1937년부터 금강산 등 팔도강산을 유랑하며 자연 승경(勝景)에 탐닉했다. 그 시기에 그는 특히 금강산 산세, 바위 모양, 나무 형태 등을 관찰하고 밑그림을 그렸다. 그러다가 1939년 재혼을 계기로 첫 부인의 상처 후 지속된 유랑 생활에서 벗어나 경남 진주와 전북 전주 등에 정착, 작품 활동에 몰두했다. 그 결과 1939년과 1942년 개인전을 열고 1940년 선전 주최 ‘10 명가 산수·풍경화전’에 출품할 수 있었다.

1945년 해방 후에는 서울 화단의 중심으로 불려나왔다. 이는 해방 후 친일 청산 문제가 미술계에도 제기되면서 일제 문화정책의 산물인 선전 스타 작가들이 친일 혐의를 받아 활동이 축소된 것과 달리 선전 출품을 의도적으로 거부한 변관식에게 반일의 이미지가 입혀진 덕분이었다. 변관식은 서울에서 조선미술건설본부 동양화부 위원으로 선출되고 1949년 처음 개최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창립전에 동양화부 심사위원을 맡아 활동을 본격화했다.

1930년대 후반부터 해방 때까지 틈틈이 관찰한 금강산 그림은 1950년대 중반부터 집중적으로 화폭에 담겨졌다. ‘농촌의 만추’(1957년), ‘외금강 옥류전’(1958년), ‘외금강 삼선암 추색’(1959년), ‘내금강 진주담’(1960년) 등이 그 무렵의 그림들이다. 이후 변관식의 미술은 “금강산과 따로 떼놓고 생각하기 어렵다”는 평과 함께 “정선 이후 금강산을 가장 잘 소화한 화가”라는 찬사를 들었다.

변관식의 ‘외금강 삼선암 추색’ (1959년, 종이에 수묵담채, 150×117㎝)
변관식의 수많은 금강산 그림 중에서 손꼽히는 명작이자 대표 작품이다. 금강산의 삼선암 봉우리를 대담하게 수직으로 치켜세운 구도와 변관식의 대표적 기법인 적묵법과 파선법으로 만들어진 먹빛이 강한 인상을 준다.

 

금강산 외금강 삼선암 실제 모습

 

현실에 순응하지 않는 외곬수 성격, 그림으로 나타나

1950년대 중반에는 우리 농촌을 복숭아꽃 흐드러진 무릉도원이나 이상향으로 그려내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무릉도원은 현실과 단절된 모습이 아니라 한국의 실경을 토대로 삼았다는 점에서 여느 한국 화가와는 달랐다. 그렇기에 그의 그림은 금강산의 한 자락이나 우리 산천 어딘가에서 보았을 법한 평범한 들판이거나 시골 마을이다.

흔히 ‘변관식 양식’의 독자적인 기법으로 꼽는 것이 ‘적묵법(積默法)’과 ‘파선법(破線法)’이다. 이 기법은 먹의 농담을 살려 엷은 먹에서 점차 진한 먹을 덮어가는 ‘적묵’으로 선획을 완성하고 이 선획의 속(俗)됨을 제거하기 위해 선 위에다 진한 먹을 튀기듯 점을 찍어 스스로 선을 파괴(파선)하는 것이다.

변관식의 ‘농촌의 만추’(1957년, 종이에 수묵담채, 115×264㎝)
변관식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진한 먹빛과 짧은 선을 문지르듯이 겹쳐 그으면서 윤곽과 음영을 살려내 늦가을 시골의 흙내음을 진하게 표현했다.

 

변관식은 오늘날 이상범과 함께 근대 한국 산수화의 양대 산맥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주류 화단과 결연하고 유랑을 통해 화업을 지속한 특성 때문에 편안한 이상범의 그림에 가려 생전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현실에 순응하지 않는 외골수 성격도 이런 결과를 낳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성격은 1956년 당시 화단에서 유명했던 ‘놋대접 사건’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해방 후 동양화단은 ‘국전파’가 좌지우지하는 가운데 이상범과 김은호의 각 계파가 경쟁하는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누구도 그 아성에 도전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자칫 화가로서의 활동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하지만 ‘시대의 야인’ 변관식은 그런 현실을 참지 못했다. 1956년 국전 심사장에서 수상자 선정을 두고 변관식과 노수현 사이에 한바탕 싸움이 붙었고 논쟁은 점심 자리에까지 이어졌다. 그러다가 결국 분을 참지 못한 변관식이 냉면 놋대접을 집어던져 노수현의 눈두덩이가 찢어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이었다. 1957년 10월 연합신문에 파벌로 얼룩진 국전 심사 비리를 폭로하는 ‘공정 잃은 심사’를 투고해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이후 변관식은 두 번 다시 국전 심사위원을 맡지 않은 것은 물론 관변 단체와의 관계를 거부하면서 서라벌예술대와 수도여자사범대 등에서 후진을 지도하며 독자적으로 활동했다.

이른바 ‘변관식 양식’이 화단에서 본격적으로 조명을 받기 시작한 것은 생애 말년인 197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제3공화국이 한국학 진흥정책을 국가적으로 전개하면서 한국화 붐이 일고 미술사에서도 조선후기 진경산수의 재조명이 활발히 일어난 덕분이었다. 그때 변관식은 진경산수화의 전통을 계승해 당대적 형식으로 재창조해낸 대표적 작가로 주목받았다.(계속)

 

[한국화의 두 거장 이상범·변관식展] 2-2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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