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레오나르도 다빈치 사망

‘천재 중의 천재’ ‘몇 세기를 앞서간 과학자’ ‘르네상스를 이끈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둘러싼 수사는 실로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르네상스기의 뛰어난 화가’ ‘기계학·해부학·건축학 등에 비상한 능력을 보인 자연과학자’가 그의 실체에 가장 가까운 수식어다. 다만 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 외에는 화가로서 이름을 알릴 만한 작품은 그리 많치 않다. 열 다섯 남짓한 회화 가운데 몇 점은 미완성이고 또 몇 점은 공동작품이다. 조각은 단 한점도 남기지 않았다.

사생아로 태어나 일찍 부모와 떨어지고 정규 교육조차 받지 못한 그가 신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듯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천재로 손꼽히는 것은 어느 분야든지 그가 관심을 갖고 파고들면 여느 전문가 못지 않는 위대한 기록을 남기기 때문이다. 그는 미처 분화되지 않은 해부학·천문학·지질학·항공학·기계공학·지리학·광학 등의 다양한 분야를 섭렵해 ‘과학’이라는 용어가 아직 생소한 시대에도 사물을 과학적으로 바라보고 과학적으로 사색했다. 특히 사물에 대한 정교한 습작과 라이트 형제에 영감을 준 비행기 설계도 등의 각종 기록을 1만3000쪽 분량의 노트에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의 관심을 지적 유희에 가까운 것으로 평가하며 그가 어떤 과학법칙이나 기술혁신을 약간 언급하거나 접근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끝까지 밀고나간 예가 거의 없다는 점을 근거로 그가 지나치게 신화화됐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일종의 성형술을 창안하고 정교한 카메라의 반사장치를 발전시키고 콘텍트 렌즈와 증기의 힘 등을 기록한 것만으로도 그는 발명가의 반열에 오르는데 손색이 없었지만 특히 해부학에서 보인 노력과 성과는 단연 발군이다. 다빈치는 인체의 비밀을 풀기위해 30여 구의 시체를 해부하기까지 했다. 교회가 인체의 분해를 엄격히 금했음에도 송장까지 철저히 해부했으며 간과 심장 등까지 조각조각 저몄다. 평생을 이탈리아의 피렌체와 밀라노에서 생활했으나 말년을 프랑스에서 보내다 1519년 5월 2일 67세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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