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나치 선전상 요제프 괴벨스, 가족과 동반자살

히틀러를 만나기 전까지 요제프 괴벨스는 나치주의자도 반유대주의자도 아니었다. 오히려 민족주의적 열정에 휩싸인 사회주의자에 가까웠다. 1922년 6월 괴벨스는 히틀러를 처음 만나 곧 그에게 빠져들었다.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독일문헌학으로 막 박사학위를 받은 뒤였다. 괴벨스는 빠르게 히틀러의 사람으로 변신해 갔고, 그의 각오를 읽은 히틀러는 그를 요소요소에 중용했다. 괴벨스는 히틀러를 총통으로 만들기 위해 선전·선동과 조작된 여론으로 대중을 나치즘으로 끌어들였다.

1933년 1월 마침내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자 괴벨스는 내각선전상 겸 제3제국 문화원장에 임명되었다. 괴벨스는 “나에게 단 하나의 문장만 주면 누구든지 감옥에 보낼 수 있다”고 호언하며 시대의 총아 라디오를 이용, 선전 전문가로 동물적 후각을 발동했다. 영화에도 손을 뻗쳐 대중들을 속절없이 전체주의의 늪에 빠져들도록 했다.

초기에 괴벨스는 교조주의보다는 효용성을, 원칙보다는 편의를 우선했다. 그러나 극단적인 국가사회주의자들의 압력에 굴복, 결국 왜곡과 과장을 일삼았다. 승승장구하던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와 아프리카에서 패배, 전세가 역전되면서 괴벨스는 비로소 ‘선전의 대가’로서 진면목을 발휘했다. 신문과 라디오를 이용한 선전 활동을 강화하고, 나치 간부들이 지하벙커와 요새로 숨어든 뒤에도 대중 앞에 끊임없이 다가서는 용기를 보였다. 이때 보여준 의연한 모습은 부정적이었던 그의 이미지를 크게 개선시켰으나 바야흐로 전쟁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1945년 5월 1일 베를린이 소련군에 포위된 가운데 아내와 6명의 자녀를 먼저 권총으로 죽인 괴벨스는 자신마저 자살함으로써 히틀러의 영원한 심복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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