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대전에 참전해 유럽이나 서아시아 전선 등에 투입된 인도 병사는 150만 명이나 된다.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였던 탓도 있지만 영국이 전후 자치권을 인도인에게 약속한 것도 인도인이 적극적으로 참전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인도 최대의 정치결사인 인도국민회의파도 독립의 희망을 품고 전쟁에 협력했고, 간디도 영국을 위해 봉사했다. 따라서 영국이 승리하면 그것은 곧 식민지 인도의 승리였다.
종전 후 영국이 주의회에 입법권을 주는 새로운 ‘인도통치법’을 제정해 인도인들의 오랜 꿈이 실현되는 듯 했다. 그러나 곧 인도인들은 이 법이 현실과는 거리가 먼 법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영국은 이 법으로 인도인들이 지나치게 풀어질 것을 우려해 그들의 고삐를 죄는 새로운 법을 제정했다. ‘롤라트법’이었다. 영국을 비판하고 인도인의 권리를 주장하는 자는 체포·구금할 수 있고 영국이 의심스럽다고 생각되면 재판없이 투옥할 수 있도록 한 악법중의 악법이었다. 영국의 전쟁 승리를 위해 애써온 인도인들은 배신감을 느꼈다. 간디도 “우리는 빵을 구했으나 대신 돌을 받았다”며 분노를 표시했다.
1919년 4월 13일, 인도 북부 암리차르의 자리안와르 광장에 롤라트법 철폐를 요구하는 1만 여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광장이라고는 하지만 사방이 집들로 둘러싸여 출구가 하나밖에 없는 곳이었다. 현지 주둔 여단장 다이어가 발포를 명령하자 출구를 막아선 영국군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군중은 맥없이 쓰러졌고 광장은 피바다를 이뤘다. 379명이 죽고 1137명이 부상한 ‘대참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