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조치 1호 발동으로 학생들은 더욱 비밀스럽고 조직적으로 활동하며 전국적으로 대학간 연대를 꾀했으나 정보당국은 이들의 동향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학생들이 속속 검거되는 가운데 1974년 4월 3일 학생들은 예정대로 대학별 집회를 가졌다. 참여는 저조했다. 서울 문리대에서는 겨우 70~80명 정도가 데모에 참가하고 다른 대학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유신철폐!” 등의 구호를 외치던 학생들은 전원 연행됐다.
하지만 사건은 이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그날 밤 10시를 기해 박정희 대통령이 긴급조치 4호를 발표함으로써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불었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과 관계된 일체의 활동을 금지하고 관련자들을 영장 없이 체포·구속해 사형, 무기, 5년 이상의 유기징역으로 한다는 전대미문의 야만적 내용이었다.
난데없이 불쑥 튀어나온 ‘민청학련’의 등장에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당시 ‘민청학련’이란 명칭은 시위 유인물에만 존재할 뿐 구체적인 조직체가 아니었기 때문에 일부 학생을 제외하고는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에게도 낯선 이름이었다. 이를테면 ‘민주학우 일동’ 정도의 의미였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민청학련’을 내세워 시위학생들의 일괄 소탕을 노렸다. 민청학련 때문에 긴급조치가 선포된 게 아니라 긴급조치로 인해 민청학련이 생겨난 격이었다. 4월 25일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이 “민청학련의 배후에는 공산단체인 인혁당 조직과 조총련계 일본 공산당, 국내 좌파 혁신계가 복합적으로 관련돼 있다”며 “체포된 1024명 가운데 54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됐다”고 발표했다. 증거는 없었다.
곧 민청학련을 공산주의자의 사주에 의한 책동으로 몰기 위해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에 대해 무자비한 고문이 가해졌고, 재판은 발언 제지, 경고, 휴정, 퇴정 명령, 항의 소동이 이어지는 가운데 사상 유례없는 속도로 진행됐다. 민청학련 관련자 29명은 1심에서 사형 7명, 무기징역 7명, 징역 15년~20년을 선고받았다. 2심과 대법원을 거치며 감형돼 단계적으로 풀려났으나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8명은 1975년 4월 9일 새벽 갑작스럽게 모두 처형됐다. 재판 과정에서 강신옥 변호사가 변론도중 법정 구속되는 세계 사법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