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유길준 ‘서유견문’ 간행

↑ 유길준의 ‘서유견문(西遊見聞)’. 고려대박물관 소장

 

개화를 꿈꾸던 구한말 선각자 유길준이 최초의 대미 외교사절 ‘보빙사’의 일원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것은 그의 나이 27세였던 1883년 9월이었다. 아더 미 대통령에게 큰 절을 올리며 신임장을 제정한 보빙사 일행은 박람회를 참관하고 병원·소방서·우체국 등 선진문명을 둘러보았다.

일행이 2개월여의 공식 일정을 끝내고 귀국선에 몸을 실을 때 유길준은 현지에 남았다. 선진 문물에 대한 갈증이 그의 귀국을 가로막은 것이다. 다행히 에드워드 모스 피바디 박물관장이 최초의 국비 유학생인 그를 도왔고, 그 역시 7개월 만에 영어로 편지를 쓸만큼 노력한 덕에 동부최고의 명문학교 덤머 아카데미에 입학, 하버드대를 목표로 향학열을 불태울 수 있었다. 그러나 1884년 12월 조국에서 전해진 갑신정변 소식은 그를 번민에 빠뜨렸고 그의 꿈은 좌절되고 말았다.

유길준은 고국행 배에 몸을 실었다. 영국·이집트를 거쳐 홍해를 지나 싱가포르·홍콩·일본을 경유하는 6개월간의 여정 끝에 제물포항에 도착한 것은 1885년 12월이었다. 그러나 김옥균 등과 친하다는 이유로 체포와 7년간의 연금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기간 한국인 최초의 근대 서양 견문록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집필했으니 전화위복이었던 셈이다. 1895년 4월 1일, 최초의 국한문 혼용체인 ‘서유견문’이 1000부 한정본으로 일본 교순사에서 발간됐지만 이듬해 친러내각의 득세로 유길준이 일본으로 망명하는 바람에 곧 금서로 낙인 찍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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