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유길준 ‘서유견문’ 발간… 국내 최초의 국제인문지리서이자 국제 정세 보고서

↑ 유길준

 

한국인 최초로 일본과 미국을 경험한 유학생

19세기 말 조선에서 개화사상을 치밀한 논리와 풍부한 예증으로 설득력 있게 뒷받침한 인물은 유길준(1856~1914) 말고는 사실상 없다. 그는 전통과 근대를 조화시킨 조선적 근대화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여타 개화사상가들과는 달랐다. 일본과 미국에서 국내 최초로 공부한 유학생답게 외국의 풍물과 사정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이를 토대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문물 소개서인 ‘서유견문’을 펴냈다는 점에서도 그는 특별했다.

유길준은 서울의 북촌 계동에서 양반가의 자손으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촉망받는 인재로 주변의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1873년 박규수의 문하로 들어가 과거제도의 폐해를 깨닫고 나서는 과거 시험을 포기했다. 유길준은 ‘해국도지’를 통해 세계 사정에 눈을 뜨고 ‘영환지략’과 ‘이언’ 등을 탐독해 개화사상에 심취했다. ‘해국도지’와 ‘영환지략’은 중국 청나라 말기에 저술한 세계지리서이고 ‘이언’은 역시 청나라 말기에 저술한 개화 자강에 관한 서적이다.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훗날 급진 개화파로 변신하게 될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과 친분을 쌓았지만 유길준은 급진 개화파와는 노선을 달리했다.

조선 조정이 1881년 4월 박정양, 어윤중, 민종묵, 심상학, 홍영식 등 총 51명으로 구성된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할 때 유길준은 민씨 척족 세력의 기대주로 각광받는 민영익의 천거에 의해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발탁되었다. 시찰단의 임무는 ‘왜놈의 나라’였던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거치면서 조선을 넘볼 정도로 힘을 키울 수 있었던 배경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당시는 개화에 반대하는 위정척사 운동이 불붙던 터라 고종은 시찰단의 활동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시찰단의 정식 명칭도 없었다. ‘신사유람단’이라는 이름은 일본 관리들이 지어준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날 사학계는 신사유람단 이름 대신에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이라고 바꿔 부른다. 시찰단은 일본 정부 부처, 대학, 화약 제작소, 주식거래소 등은 물론 목욕탕까지 샅샅이 훑어봤다. 일본 정계의 거물로 떠오르던 이토 히로부미도 만났다. 시찰단은 같은 해 7월 부산에 도착해 10월 비밀리에 서울로 올라왔다.

유길준은 출발 때부터 유학 목적으로 일본에 갔기 때문에 매부 유정수와 함께 후쿠자와 유키치가 운영하는 게이오의숙에 입학했다. 함께 간 윤치호도 도진샤에 입학함으로써 이들은 한국인 최초로 일본 유학생이 되었다. 유길준은 후쿠자와의 저서인 ‘서양사정’, ‘문명론지개략’, ‘학문의 권장’ 등 개화와 관련된 서적을 두루 탐독하면서 개화의 밑그림을 그렸다. 후쿠자와가 1882년 3월 창간한 ‘지지신보’를 보면서는 신문 발간의 필요성을 깨달아 훗날 서재필의 독립신문 발간을 적극 지원했다. 유길준은 1882년 12월 귀국해 1883년 2월 외교통상사무의 총괄 부서인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약칭 통리아문)의 주사로 임명되었다.

1909년 유길준 모습

 

전통과 근대를 조화시킨 조선적 근대화 추구

그가 귀국하기 전인 1882년 5월 조선은 서양 국가 중에서 최초로 미국과 통상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조선에는 미국의 루시어스 푸트 공사가 부임하고 조선은 답례의 표시로 미국에 사절단을 보낼 준비를 했다. 우리 역사상 최초로 서양 문물을 체험하게 될 사절단은 민영익(정사), 홍영식(부사), 서광범(종사관)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모두 20대의 젊은이였다. 이밖에 유길준, 고영철, 변수, 현흥택, 최경석과 중국인 오례당, 미국인 퍼시벌 로웰, 일본인 미야오카 등이 수행해 보빙사 일행은 모두 11명이었다.

보빙사 일행은 1883년 7월 16일 제물포항을 떠나 9월 미국에 도착, 체스터 아서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했다. 이후 다른 보빙사 일행이 순차적으로 귀국한 것과 달리 유길준은 민영익의 뜻과 영어 통역을 담당한 로웰의 적극적인 주선에 따라 국비유학생 자격으로 미국에 체류했다. 로웰은 보스턴 부근의 세일럼시에 소재한 피바디 에섹스 박물관의 에드워드 모스 관장을 유길준에게 소개해주었다. 유길준은 머리를 짧게 하고 한복을 벗어던진 뒤 갓, 도포, 저고리, 바지, 내의, 부채, 명함 등 20여 종의 소지품을 피바디 박물관에 기증했다.

유길준은 모스 박사의 개인지도로 언어 소통이 어느 정도 가능해지자 1884년 9월 인근의 명문 고교인 덤머 아카데미 3학년으로 편입했다. 하버드대를 목표로 공부하던 1884년 12월 어느 날 조국에서 갑신정변이 터졌다는 기사를 보고 아연실색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강력한 후원자인 민영익이 개화당의 칼에 맞아 중상을 당했다는 소식은 그를 극도로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게다가 유길준이 김옥균 등 개화당과 가깝다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었고 자칫 자신의 일족에게도 화가 미칠 수 있는 긴급한 사안이었다. 그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개화당과 무관함을 적극 알림으로써 개화당과의 결별을 분명히 했다.

유길준은 미국에 온 지 1년 9개월 만인 1885년 6월 귀국길에 올랐다. 다만 조국으로 직행하지 않고 미국의 동부 지역에서 대서양을 가로질러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수에즈 운하, 싱가포르, 홍콩, 일본을 거쳐 귀국하는 노선을 선택했다. 그는 귀국길에서 보고 들은 것을 꼼꼼히 메모하고 낱낱이 분석했다. 그러나 메모들은 대서양에서 동남아를 거치는 멀고 긴 여행길에서 태반이 사라졌다. 유길준은 귀국의 마지막 여행지인 일본에서 갑신정변 후 망명 중인 김옥균을 만났다. 역당의 괴수로 낙인찍힌 김옥균을 만난 것은 오해를 살 소지가 있었다. 더구나 김옥균이 일본 낭인 수천 명을 이끌고 조선으로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무성할 때였다.

유길준은 1885년 12월 상투를 자르고 양복을 차려입은 모습으로 제물포에 도착했다. 서울로 올라오던 중 역도와 접선했다는 이유로 남대문 밖에서 체포되어 포도청에 감금되었다. 2개월 뒤에는 포도대장 한규설의 집으로 옮겨져 유폐 생활을 했다. 한규설은 당시 수도 경찰을 장악하고 왕실의 비밀외교 업무를 담당하는 실력자였기 때문에 곁에서 자문에 응해줄 유길준과 같은 국제통이 필요했다. 고종에게도 유길준은 영어, 국제법, 해외 사정 등에 밝은 귀중한 보배였다. 하지만 개화파 인사들을 탄압하는 모양새를 취해야 했기에 격리할 수밖에 없었다.

한규설의 묵인 하에 유길준은 가끔씩 아내를 만나거나 뜻이 맞는 친구들의 방문을 받고 개화에 대해 토론했다. 한규설의 집에서 1년 반 동안 연금 생활을 한 후에는 서울 자하동에 있는 민영익의 산장인 취운정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도 바깥출입이 제한되자 저술을 통해 개혁 구상을 차분히 정리했다. 그는 근대공법의 원리를 근거로 조선은 청국에 조공국은 될지언정 결코 속국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국내 최초의 국제인문지리서이자 국제 정세 보고서

연금 생활 중 가장 빛나는 업적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문물 소개서인 ‘서유견문’을 집필한 것이었다. 유길준은 후쿠자와의 저서 ‘서양사정’(1866)이 일본의 문명개화를 견인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에서 착안했다. 유길준은 일본 게이오의숙과 미국 고등학교에서 배운 지식과 정보, 일본 신사유람단과 미국 보빙사 체험과 견학 기록, 유럽 여행에서 담아 온 메모와 기억들을 종합하고 정리하는 과정을 거쳐 1889년 서유견문을 탈고했다. 한규설을 통해 원고를 고종에게 전달했으나 여전히 연금 상태였기 때문에 바로 출판하지는 못했다.

1892년 10월 7년 만에 연금에서 해제되자 원고를 직접 일본으로 들고 가 후쿠자와가 설립한 교순사에서 1895년 4월 1일 출간했다. 국내 최초 국한문 혼용체로 저술된 ‘서유견문’은 국내 최초의 국제인문지리서이자 국제 정세 보고서였다. 자비로 1,000권을 출간했으나 시판하지는 않아 친지와 지인들 사이에서만 주로 읽혔다. 그나마 1896년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유길준이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금서로 묶였다.

서유견문은 총 3부 20편으로 구성되었다. 제1부인 1편과 2편에서는 ‘지구 세계의 개론’, ‘6대주의 구역’, ‘나라의 구별’, ‘세계의 산·바다·강·호수·인종·물산’ 등이 설명되어 있다. 본론에 해당하는 제2부, 즉 3편 ‘국가의 권리’부터 14편 ‘개화의 등급’까지에는 조선이 생존하기 위해 알아야 할 국제적 권리, 정부 역할, 세계 학문의 경향 등을 기술했다. 15편에서 20편까지의 제3부는 서양 각국의 풍물을 소개한 여행 견문록으로 책의 보론에 해당한다.

유길준이 다시 관직에 등용되어 개화사상가요 실천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의 계기를 잡은 것은 1894년 6월 외아문(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주사로 임명되면서였다. 동학혁명(1894)을 빌미로 청·일 양국군이 조선에 진주한 당시의 혼미한 정세는 국제법에 밝은 유길준의 힘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했다.

왼쪽은 유길준의 ‘서유견문’(왼쪽)이고 오른쪽은 ‘유길준이 신태무(申泰茂)에게 1895년 5월 5일 증정했다’는 유길준 친필이다.

 

고난의 기간은 길고 영광의 날들은 짧았던 생애

 

일본은 1894년 7월 23일, 경복궁을 점령하고 조선의 내정 개혁을 단행했다. 이른바 갑오경장의 시작이었다. 갑오경장과 함께 유길준의 지위도 수직 상승했다. 1894년 12월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 때는 내각서기장에 오르고 1895년 5월 박정양이 총리대신이 되었을 때는 내부협판으로 승진했으며 을미사변(1895.10) 직후에 성립한 제4차 김홍집 내각에서는 내부대신으로 발탁되었다. 갑오개혁기는 유길준이 당대 최고의 국제적 안목과 개혁 의지를 갖고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한 황금기였다. 그는 조선을 근대로 변화시키는 개혁의 입안자였다.

유길준은 내부대신으로 임명된 후 김홍집 내각이 1896년 1월 1일을 기해 양력을 채용하고 전국에 단발령을 실시한다고 발표했을 때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고종이 먼저 서양식으로 머리를 깎자 유길준은 관리들로 하여금 가위를 들고 거리나 성문 등에서 강제로 백성들의 머리를 깎게 했다. 왕세자의 상투를 직접 자른 것도 유길준이었다. 그러나 단발령은 2개월 전 민비가 무참하게 시해된 을미사변에 더해져 의병 봉기를 촉발하는 계기로 작용했고 유길준은 의병들의 표적이 되었다. 그러던 중 고종이 1896년 2월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했다. 이를 계기로 김홍집 내각이 일거에 무너지고 김홍집이 백주에 거리에서 타살되자 유길준 역시 신변에 위협을 느껴 일본으로 망명했다.

유길준은 이후 12년의 망명 기간 중 조선이 이대로 가다가는 폴란드처럼 열강에 분할되어 멸망하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을 강조한 ‘파란국 쇠망사’를 펴냈다. 부국강병의 문명화를 이룬 사례를 널리 알리기 위해 ‘프러시아 전사’, ‘크리미아 전사’, ‘이태리 독립 전사’ 등도 번역·출간했다. 그러다가 일본 육사를 졸업했으나 귀국하지 못하고 있던 젊은 사관들과 ‘혁명일심회’를 결성해 정권을 장악하려 한 쿠데타 계획이 1902년 발각되어 일본의 오가사와라 제도에서 4년간 유배 생활을 했다.

유길준은 1907년 8월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이 물러나고 순종이 즉위하자 12년간의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다. 귀국 후에는 궁내부 특진관 벼슬 제의를 거절한 채 학교 설립과 교사 양성, 교과서 편찬 등에 몰두하면서 실력양성론에 입각한 계몽운동에 적극 발 벗고 나섰다. 이토 히로부미의 자치육성책은 적극 지지했으나 일진회처럼 일제의 조선 합방을 용인하지는 않았다. 일제가 1910년 조선을 합병한 후 친일 매국노와 전직 고관 76명에게 작위를 수여할 때는 한규설·민영달·윤용구·조경호·홍순형 등과 함께 작위를 거절했다. 일제 치하에서는 조선의 자치권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다가 끝내 개화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1914년 9월 30일 타계했다. 많은 선각자가 그랬던 것처럼 고난과 아픔의 기간은 길고 성취와 영광의 날들은 짧았던 생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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