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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인의 일본 산책] 나가사키 니시자카 공원(西坂公園)에서 일본인 26성인(聖人)과 조선인 ‘빈센트 권’의 순교를 생각하다

↑  26 성인(聖人) 처형장면 그림

 

by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나가사키 역에서 육교를 건너 비탈길을 오르면 역사의 아픔을 느낄 수 있는 조그마한 공원을 만날 수 있다. 다름 아닌 일본 26성인(聖人)의 순교지다. 이곳은 자신의 종교와 관련이 없더라도, 우매한 권력자의 폭거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들의 눈물겨운 발자취를 인지할 수 있어 한 번쯤은 가볼만한 곳이다.

니시자카 언덕 입구에 놓여있는 표지석

 

오사카·교토에서 1,000㎞나 끌려와 처형 당해

공원 입구에는 안내판과 함께 루이스 프로이스(Luis Prois, 1532~1597)의 기념비가 서있다. 프로이스는 1563년 일본에 들어간 포르투갈인 선교사이다. 그는 1597년 생을 마칠 때까지 나가사키에서 <일본사>를 집필했다. 그가 직접 조선에 오지는 않았지만 책에는 임진왜란에 대한 내용이 꽤나 많이 들어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558~1600)의 요청에 의해 조선에 파견된 신부로부터 받은 편지나 보고서도 서술돼 있기 때문이다(최관의 ‘일본과 임진왜란’).

루이스 프로이스 선교사를 기리는 기념비

 

일본에 기독교를 처음 전파한 사람은 나바라 왕국(지금의 스페인 바스크) 출신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o Xavier, 1506~1552)이다. 그는 1550년 8월 나가사키의 히라도(平戸)에 들어가서 선교활동을 했다. 그러나 일본의 기독교는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신부들의 추방령을 내리고, 1597년 2월 5일 대사건이 벌어지면서 고난의 길로 들어섰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고베시립미술관 소장

 

‘대사건’이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에 의해 이곳 나가사키의 ‘니시자카(西坂) 언덕’에서 가톨릭 신부·신도 등 26명을 무참하게 처형한 것을 말한다.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한 일 외에도, 신앙을 이유로 처형의 명을 내린 일본 최초의 권력자라는 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는 420여 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른 오늘날도 그 불명예를 씻지 못한 채 여전히 준엄한 역사의 심판을 받고 있다. 그래서 역사는 무서운 것이다.

26성인은 일본인 20명, 스페인인 4명, 포르투갈과 멕시코인 각 1명이다. 일본인 성인에는 12살, 13살, 14살의 어린이가 3명이나 들어 있다. 26명 중 24명은 이미 교토(京都)의 호리카와 거리(堀川 通)에서 왼쪽 귀불이 잘린 상태였다. 히데요시는 당초 이들의 코와 귀를 베라고 했으나 부하들의 배려로 귀불만 잘린 것이다. 이들이 처형당하기 위해 나가사키로 오는 과정도 험난했다. 오사카·교토를 출발해서 나가사키까지 도보로 1,000km를 끌려왔던 것이다. 그들을 돕기 위해 따라오던 베드로와 프란치스코가 체포돼 24명과 합류하는 불운을 당했다.  

26성인순교적(二十六聖人殉教跡). 니시자카 언덕에 있다.
4,000명 넘는 군중이 순교자들의 마지막 가는 길 배웅

추운 겨울. 처형자 행렬에는 12세 소년 루도비코 이바라키 등 아이들도 있었다. 인솔 책임자는 가엾은 모습에 마음이 아파 “기독교를 버리면 살려 보내주겠노라”고 아이들을 달랬다. 하지만 아이들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수도원에서 사환으로 일하던 소년들은 당초 처형자 명단에서 제외됐으나, 스스로 순교자의 길을 택했다. 어린 나이에 순교의 의미나 알고 있었을까.

처형장은 나가사키의 니시자카 언덕이었다. 그날따라 안개가 자욱했다. 사람들의 마음도 안개 속에서 앞을 가늠하지 못했다. 히데요시의 수하들은 나가사키 시민들의 동요가 두려워 외출금지 명령까지 내렸다. 그러나 힘의 논리는 한계가 있었다. 4,000명이 넘는 군중이 몰려들어 순교자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특히 전설처럼 들리는 12세 소년 루도비코 이바라키의 마지막 모습이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2명의 숙부와 함께 순교하기 전, 루도비코 이바라키는 “내 몸을 의탁할 십자가는 어디에 있나요?”라면서 자신의 십자가를 향해 뛰어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철부지 소년의 행동 그대로다. 이바라키는 십자가에 묶인 후에도 몸과 손가락을 움직이면서 “천국, 예수, 마리아”라고 말하면서 기뻐했다는 것이다.

최연소 순교자 루도비코 이바라키(가운데). 26성인 기념비에 조각되어 있다.

 

로마 교황, 1950년 공식 순례지로 지정

후일 이들의 유해는 많은 사람들의 손에 의해 수습돼 ‘일본 최초의 순교자’라는 이름 하에 세계 곳곳으로 보내졌고, 루이스 프로이스 신부 등이 로마 교황청에 보고해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Pius) 9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오르게 됐다. 교황 비오(Pius) 12세는 1950년 가톨릭교도의 공식 순례지로 지정했다.

수 백 년이 흐른 1981년 2월 26일 오후 3시 20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곳 순교지를 방문했다. 그날은 전 날부터 내린 눈으로 니시자카 공원은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인 은세계였다. 교황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깊은 기도를 했다. 기도를 마친 다음 교황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오늘 우리들은 나가사키의 니시자카 순교자 언덕에 섰습니다… 26성인은 죽은 것이 아니고, 하느님을 위한 최고의 찬미를 드린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의 요한복음 12장 24절의 말씀처럼, 26성인은 죽음을 통해 풍성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 언덕에서 성인들은 각계각층의 사람들에게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그렇다. 26성인은 결코 죽지 않았다. 420여 년 전의 어둡던 시절에 이미 세계인을 향해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드높이 외쳤다. 이들의 염원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높이 5.6m, 폭 17m의 조각품도 세워졌다.

26성인 기념비. 높이는 5.6m, 폭은 17m다.

 

이 조각품은 성인 추대 100년을 기념하는 날 26성인 기념관과 함께 세워진 기념비다. 기념관의 설계자는 와세다 대학 출신의 건축가 이마이 켄지(1895~1897)였고, 기념상은 도쿄예술대학교 출신의 세계적인 조각가 후나코시 야스다케(1912~2002)가 4년 반에 걸쳐서 완성했다. 조각품에 새겨진 다리를 들고 수직으로 서있는 성인들의 모습은 ‘다 같이 찬송가를 부르며 승천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했다.

조각품의 26성인들이 모두 정장을 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남루한 복장의 초라한 모습이었고, 왼쪽 귀불이 잘린 상태로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기념비의 성인 아래에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는 성경말씀(마르코 제8장 34절)이 오롯이 새겨져 있다.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신도 ‘빈센트 권’도 화형 당해

나와 전남대 역사탐방팀(단장: 황상석 박사)은 26성인 기념관에 들어가 빈센트 권(Vincent Caun)의 기록을 찾았으나, 한국인 순교자 명단 리스트만 받았을 뿐 아무런 소득도 올리지 못했다. 물론 시간이 짧았던 탓도 있었다. 기념관에서 한국인 수녀님들과 잠시 마주쳤으나 말을 걸 기회를 포착하지 못해 옷깃을 스치는 인연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기록에 의하면 빈센트 권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에게 붙잡혔다. 그를 일본으로 데려간 사람은 스페인 신부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 1551~1611)다. 그는 천주교도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요청으로 임진왜란 때 조선에 들어왔다. 기록상으로 조선을 최초로 방문한 서양인이다.

세스페데스 신부를 따라 일본에 간 빈센트 권은 신학교에 입학해 선교사 수업을 받았다. 당시 일본에서는 나가사키에서 1593년 300여 명, 1594년에는 2,000여 명의 조선인이 세례를 받았다. 놀라운 사실은 이들이 돈을 모아 나가사키에 ‘성 로렌조’라는 이름의 조선인 성당을 건립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조선포로라는 비참한 생활 속에서도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일본을 천하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1614년 기리스탄(크리스천) 금지령을 발표한 이후 지속적으로 천주교를 탄압했다. 중국에서 돌아온 이후 일본에서 포교에 매진하던 빈센트 권은 나가사키 시마바라(島原)에서 체포돼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니시자카 언덕에서 46세의 나이로 화형 당했다. 1626년 6월 20일의 일이다.(KBS의 역사 스페셜).

 

1594년, 규슈 지역에서만 조선인 2,000여 명 세례 받아

이러한 내용을 뒷받침하는 사실을 하나 찾았다. 26성인 기념관 홈페이지에 들어 있는 파시오(Pasio) 신부의 ‘규슈 지역 조선인에 관한 편지(1594년 10월 20일자)’이다. 편지 내용을 그대로 옮겨본다.

<규슈 지방에는 많은 조선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일본인과 치른 전쟁(임진왜란)에서 일본인에 의해 포로가 된 것입니다. 조선인은 사려가 깊고 우리의 성스러운 신앙을 받아들일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므로 관구장 페드로 고메스께서는 중국인이 사용하는 것과 동일하며, 일본에서도 사용되는 그들의 언어를 읽고 쓸 수 있는 사람들을 찾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들은 일본어를 습득한 후에 가톨릭 교리를 잘 배우고, 그들의 언어로 그것을 요약하며 기도문을 조선어로 번역했습니다. 그로 인해 조선인이 가톨릭 교리를 쉽게 습득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올해 2,000명 이상의 조선인이 세례를 받을 정도로 대단한 수확을 얻었습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이해력이 높고 하느님과 우리의 성스런 신앙에 대해 즐거이 들으며, 이해하기 어려운 점과 의문점을 제시합니다. 그 결과 조선인에게 가톨릭 교리를 가르칠 때 참가하는 일본인들이 “조선인이 우리의 성스런 신앙을 받아들일 때, 일본인에게 어떤 점에서도 뒤지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로 그들은 실로 대단한 이해력을 가지고 있으며, 의문점과 질문이 나오고 그들이 그 의문을 해결하는 것에 대해 칭찬하고 있습니다.>

 

금교(禁敎) 시대 신자들 ‘잠복 크리스천’으로 불려

일본의 기독교가 뿌리째 뽑힌 것은 1637년 12월 일어난 ‘시마바라·아마쿠사의 난(島原·天草の乱)’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규슈 서쪽의 시마바라(島原) 반도와 아마쿠사(天草) 제도에서 수만 명의 크리스천 농민이 천주교 탄압과 세금 착취에 항의하는 난을 일으켰다가 결국에는 4개월만에 진압되었다. 이후 크리스천에 대한 탄압이 더욱 가혹해지면서 1644년 이후에는 일본에 가톨릭 사제가 한 사람도 존재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신자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심지어 불교 신자로 위장하는 편법을 쓰기도 했다. 이들을 ‘잠복 크리스천’이라고 부른다. 잠복 크리스천은 지극히 소단위 집단으로 비밀리에 기도문을 만들어서 암송했다. 이 기도문을 ‘오라쇼(라틴어 Oratio)’라고 하는데 ‘기도’의 의미란다. 오라쇼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것으로, ‘뜻을 이해하는 것보다 함께 외우는 것에 의미를 부여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어쩌면, 그들만의 행동통일 강령이었던 듯싶다.

밀랍인형으로 재현해놓은 잠복 크리스천(아마쿠사 기념관)

 

잠복 크리스천들은 메달이나 로사리오, 성상·성화, 십자가 등을 비밀스럽게 간직하고, 아이가 태어나면 자체적으로 세례를 주면서 자신들의 종교를 지켰다. 막부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메이지 시대에 종교의 자유가 시행됐는데도 그들은 크리스천으로 복귀하지 않고 토속적 신앙의 형태로 전승하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금교(禁敎) 시대의 신자들을 ‘잠복 크리스천’이라고 하고, 메이지 이후 토속화된 신자들을 ‘숨은(隱れ) 크리스천’으로 구별하고 있다. ‘잠복 크리스천’은 이러한 역사와 믿음에 대한 가치를 인정받아 2018년 6월 30일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리스도나 성모 마리아의 성화를 밟게 하는 후미에(踏み絵)로 ‘잠복 크리스천’ 색출

후미에(踏み)는 에도 막부가 그리스도나 성모 마리아의 성화를 밟게 하여 신자를 색출하는 방법이었다. 잠복 크리스천으로 의심되는 사람 중 성화를 밟은 사람은 배교(背敎)를 인정받아 살아나고, 주춤거리거나 밟지 못하는 사람은 죽음을 맞았다. 후미에는 크리스천을 색출하는 잔인한 도구였다.

후미에를 밟는 그림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1923~1996))는 나가사키에서 이와 같은 후미에를 본 후 소설 <沈默(침묵)>을 구상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소설 <침묵>의 마지막 부분으로 들어가 본다.

 

“신부님! 기치지로입니다.”

“이제는 신부가 아니다. 빨리 돌아가는 게 좋다. 들키면 귀찮아진다.”

“저는 신부님을 팔아넘겼습니다. 성화 판에도 발을 올려놓았습니다.”

“그 성화 판에 나도 발을 얹었다. 그때 이 다리는 그분의 얼굴 위에 있었다. 내가 수백 번도 더 머리에 떠올린 얼굴 위에, 인간 중에 가장 착하고 아름다운 그 얼굴 위에… 그 얼굴은 지금 성화 판에서 마멸되고, 움푹 파여, 슬픈 눈으로 이쪽을 보고 계신다.”

“이 세상에는 약자가 있습니다. 강자는 그 어떤 고통에도 굽히지 않고 천당에 갈 수 있겠지만, 저 같은 약자는 성화 판을 밟으라고 관리들이 고문하면…”

“강한 자도 약한 자도 없다. ‘강한 자보다 약한 자가 괴로워하지 않았다’고 그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

 

주인공 기치지로와, 결국은 배교해 ‘오카다 산에몬’이라는 일본 이름까지 하사받은 로드리고 신부와의 대화 내용이다.

정답은 없다. 중요한 것은 약한 자들의 고통을 헤아릴 수 있는 강자들의 배려일 것이다. 얼마 전 나가사키의 소토메(外海)에 있는 엔도 슈사쿠의 문학관을 다녀온 후 다뤄본 테마이다.

<소설가는 자신 속에 있는 여러 인격을 각각 독립시켜서 그것을 작중인물로 그려나간다. ‘침묵’에 대해서 말한다면, 페레이라, 기치지로, 로드리고는 모두 나이며, 이노우에 치쿠고노카미(막부의 관리)도 역시 나 자신이다… 내가 나가사키를 걷기 시작했을 때 등장인물들은 아직 이름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항상 그들은 내 마음 속에서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작가 엔도 슈사쿠가 <침묵의 소리>(김승철 역)에서 밝힌 소설 속 주인공들에 대한 설명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내재된 갈등일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설혹 나를 배신했다고 할지라도, 오히려 당신이 옛날 믿고 있던 그 신앙은 자신감이나 재판하는 강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버림받은 자의 슬픔을 위해서 존재했었다고 생각해 봅니다.”

그가 1968년에 발표(新潮 1월호)한 단편 소설 <그림자>에 묘사된 ‘버림받은 자의 슬픔’도 강자가 아닌 약자이기 때문에 겪어만 하는 비애일 것이다.

“왜? 약한 우리가 고통스러울까?”

영화 ‘침묵(사일런스)’의 한 장면

 

원폭의 도시 나가사키는 참으로 많은 사연과 문화와 역사를 안고 있는 곳이다. 일행들과 함께 니시자카 26성인 기념상을 내려오려는 순간, 많은 일본 학생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몇몇 학생들은 “내 십자가는 어디에 있나요”를 되뇌며, 12세의 성인 루도비코 이바라키의 조각상에 카메라의 렌즈를 맞추고 있었다.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대우건설과 팬택에서 30여 년 동안 홍보업무를 했다. 2008년 홍보컨설팅회사 JSI 파트너스를 창업했다. 폭넓은 일본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으며 현지에서 직접 보고 느낀 것을 엮어 글쓰기를 하고 있다. 저서로 <현해탄 파고(波高) 저편에> <홍보는 위기관리다> <커피, 검은 악마의 유혹>(장편소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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