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으로

봉준호 감독이 칸영화제 현장에서 “위대한 감독”으로 치켜세운 김기영… 그는 “한국 컬트영화의 창시자”였다

↑ CGV가 2018년 10월 명동역 씨네라이브러리에 ‘김기영관’을 개관할 때 홍보물 (출처 CGV)

 

by 김지지

 

프랑스 칸 뤼미에르극장에서 열린 제72회 칸영화제 폐막식에서 한국 영화감독 봉준호가 영화 ‘기생충’으로 황금종려상을 거머쥐었다. 폐막식 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봉 감독은 “이번 수상을 통해 아시아에 일본의 구로사와 아키라, 중국의 장이머우 감독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 김기영 감독처럼 한국에도 외국 거장을 능가하는 마스터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길 바란다”고 했다. 김기영 감독에 대해 알아본다

 

“한국 컬트영화의 창시자”, “충무로의 기인”

김기영(1919~1998) 감독은 신상옥, 유현목 감독 등과 함께 1960년대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주도한 중심 축이었다. 독특하고 기이한 영화들을 워낙 많이 감독해 “한국 컬트영화의 창시자”, “충무로의 기인” 등으로 불렸다. 그런데도 “최고의 예술감독”이라는 평을 받은 유현목과 “최고의 흥행감독”으로 꼽힌 신상옥에 가려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것은 김기영의 외골수 성격과 불운한 시대에 기인한 바가 크다.

김기영 감독

 

김기영은 서울에서 태어나 평양고보를 졸업하고 1940년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대 의학부를 다니면서 좌익 경향의 연극에 매료되고 영화에도 빠져들었다. 1946년 입학한 서울대 치과대 시절에는 대학의 연극운동에 매진하고 1950년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잠시 대학병원의 레지던트로 근무했다. 해방 후 좌우익 대립 속에서는 여운형이 주도한 정치 단체에서 활동했으나 연극에 심취하면서 정치활동을 그만두었다. 연극을 하면서 만난 치과대 학생이면서 여배우는 머지 않아 그의 아내가 되어 영화계에 뛰어든 남편을 지원하다가 같은날 김기영과 함께 생을 달리했다.

김기영이 영화와 첫 인연을 맺은 것은 6·25 전쟁 중 피란지 부산에서 미국공보원(USIS)이 제작하는 ‘대한뉴스’ 제작에 참여하면서였다. 16㎜ 뉴스카메라로 찍어서 현상하고 편집하고 녹음에 해설까지 써야 하는 중노동이었지만 재미와 보람을 느껴 남는 필름으로 수 편의 극영화를 연습했다. 단편영화를 제작할 때는 영화의 설계도인 콘티에 철저하게 의존해 촬영했다.

김기영은 1955년 ‘주검의 상자’로 영화계에 데뷔했다. 초기에는 ‘초설’(1958년), ‘10대의 반항’(1959년) 등을 통해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분위기가 나는 사실주의 경향을 선보였다. 그러다가 1960년 11월 3일 서울 명보극장에서 개봉된 ‘하녀’를 계기로 영화 기법에 큰 변화를 드러냈다. 그동안의 스토리텔링에 집중하는 리얼리즘을 접고 인간 내면에 도사린 마성과 성적 억압의 심리를 드러내 보이는 표현주의 영상화법을 구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영화 ‘하녀’(1960년)의 한 장면

 

영화 ‘하녀’부터 인간 내면에 도사린 마성과 성적 억압의 심리 드러내

김기영은 ‘하녀’에서 제작·각본·감독·편집 등 1인 4역을 맡았다. ‘하녀’는 음악교사인 가장(김진규)과 가정부(이은심) 사이에 벌어진 불륜으로 인해 가정이 파탄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아내(주증녀)가 친정에 가고 없는 틈을 타 가정부가 남편을 유혹해 육체 관계를 맺고 임신을 하자 이 사실을 알게된 아내가 가정부를 낙태하도록 한다. 그러자 포악해진 가정부는 부부의 아들(안성기)을 계단에서 떨어뜨려 숨지게 한다. 결국 남편과 가정부는 함께 약을 먹고 동반자살한다는 내용이다. ‘하녀’를 본 일부 여성 관객이 영화를 보다가 “저년 죽여라”라고 소란을 피울 만큼 충격적이었다.

‘하녀’는 김기영 필모그래피의 대표작이자 중요한 변곡점이었다. 훗날 봉준호 감독이 “한국영화의 ’시민 케인‘(1941) 같은 작품”이라고까지 격찬했던 ’하녀‘는 김기영의 영화가 동시대 유현목의 전통적 리얼리즘이나, 신상옥의 유미주의와는 궤를 달리하는 표현주의의 영역을 개척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김기영은 ‘하녀’ 이후 ‘현해탄은 알고 있다’(1961년), ‘고려장’(1963년) 등의 영화를 연출하며 흥행영화, 멜로영화, 전쟁영화, 괴기영화를 넘나들었다. 1971년과 1972년 각각 ‘화녀’와 ‘충녀’를 제작·각본·감독해 이른바 하녀·화녀·충녀 시리즈를 완성했다. 김기영은 ‘화녀’로 청룡영화제 감독상을 차지했고, ‘화녀’를 통해 영화계에 데뷔한 윤여정은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과 대종상 신인상을 거머쥐었다. 윤여정은 ‘충녀’에도 출연하고 2010년 ‘하녀’(1960년)의 리메이크 영화인 ‘하녀’(감독 임상수)에도 출연해 김기영 감독과의 인연을 이어갔다. ‘화녀’는 관객 23만여 명을 끌어들여 1971년 최고의 흥행작으로 기록되었다. 김기영은 ‘화녀’의 제작진과 배역들을 그대로 동원한 ‘충녀’에서도 괴기한 묘사와 관능적인 정사 장면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충녀’ 역시 16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선전으로 김기영에게 백상예술대상 감독상을 안겨주었다.

‘충녀’ 개봉 후 김기영은 한국 영화 사상 가장 불행했던 유신시대를 맞았다. 영화법이 바뀌고 영화사가 20개로 통폐합되는 등 영화산업이 독과점구조로 재편되자 제작자 겸 감독이었던 그의 입지도 현저히 좁아졌다. 결국 김기영은 한정된 외화 수입을 따낼 수 있는 문예영화를 권장하는 당시의 영화사 분위기에 맞춰 문예영화 위주로 찍어야 했다.

영화 ‘충녀’(1972년)에 출연한 윤여정(왼쪽)

 

영화마다 왜곡된 성적 충동, 소유욕, 질투, 동반자살, 살인, 사도마조히즘 등장시켜

김기영의 영화에는 거의 예외 없이 왜곡된 성적 충동, 소유욕, 질투, 동반자살, 살인, 사도마조히즘 등이 등장한다. 또한 김기영의 영화를 설명할 때 가장 많이 동원되는 표현 가운데 하나가 “그로테스크하다”는 것이다. 괴이한 효과를 살리기 위해 쥐와 무당도 빠지지 않고 등장시켰다. 김기영의 영화 제목에는 유난히도 여자를 의미하는 단어들이 많이 등장한다. ‘하녀’, ‘화녀’, ‘충녀’는 물론 ‘여성전선’(1957년), ‘여여여’(1968년), ‘미녀 홍낭자’(1969년),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1978년), ‘수녀’(1979년) 등 온통 여자 일색이다.

철저한 신인 위주의 캐스팅으로 승부하는 것도 유별났다. 잘나가는 배우를 내세우면 흥행을 어느 정도 보장받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늘 신인을 등용해 썼다. 외모보다는 탄탄한 연기력을 더 중시하는 자기 스타일의 고집 때문에 그에게는 스케줄에 쫓기는 알려진 배우가 딱히 필요하지 않았다.

영화 담당 기자들 사이에서도 까다롭기로 유명했다. 기자들은 “눈만 봐도 오싹한 사람” “아무 말도 안 해서 인터뷰가 어려운 사람” 등 여러 가지 수식어를 붙이면서 기피했다. 180㎝가 넘는 큰키에 거대한 몸집, 부스스한 머리, 검은 테 안경 속에 부릅뜬 가재눈, 거칠한 피부, 무릎 나온 바지에 닳고 닳아 실밥이 흘러나오고 단추는 떨어진 윗도리, 검정 고무신을 질질 끌고 다녔으니 그럴만도 했다.

김기영 감독 (출처 KBS)

 

그는 영화 이외의 삶에는 돈을 거의 쓰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스스로 자신이 원하는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돈을 아끼려고 술도 담배도 하지 않았다.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구두쇠 기질이 몸에 배어 스태프는 촬영장까지 시내버스로 이동했고, 식사 때마다 값싼 음식점을 찾느라 혈안이 되기 일쑤였다. 이렇게 형식을 싫어하고 비타협적이어서 영화인 단체나 모임에 얼굴을 내밀지 않으며 철저하게 아웃사이더로 일관했다.

그는 자기 스타일을 고집한 작가주의적 감독이었던 까닭에 대부분의 영화를 스스로 제작했다. 조감독도 거의 두지 않았으며 미술, 조명, 편집에도 일일이 관여하고 포스터 제작, 주제곡, 소품까지 자급자족하는 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 자막에 나오는 한국문예영화사, 신한문예영화사, 유락영화사, 유성영화사는 모두 그가 만든 제작사였다. 그러다보니 유명 감독이 되면 한 해에 10편 이상의 영화를 찍는 경우도 적지 않던 다산의 시대에 평생 ‘겨우’ 32편의 영화만 남겼다.

김기영 감독의 대표작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김기영관’ 내부 전시물 (출처 CGV)

 

김기영은 1980년대 이후 별다른 후속작을 내지 못하고 마지막 영화 ‘죽어도 좋은 경험’(1990년)은 개봉되지 못하 창고에 박아두어야 했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영화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이후 망각 속으로 잊혀 가던 김기영이 “시대를 앞서간 감독”으로 재발견된 것은 1997년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가 기획한 ‘김기영 회고전’이 계기가 되었다.

이후 김기영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하게 일어났으나 1998년 2월 5일 서울 명륜동 집에 일어난 화재로 치과의사이자 평생 동지였던 아내와 함께 질식사하는 너무나도 영화적인 죽음을 맞았다. 사고 전날까지도 신작 ‘악녀’(가제)의 시나리오를 손질했다고 한다. 대표작 ‘하녀’는 2008년 마틴 스콜세이지 감독이 이끄는 세계영화재단(WCF)에서 디지털로 복원되어 그해 칸영화제에 출품되어 관객들로부터 호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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