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빅토리아 영국 여왕 즉위… 재위 64년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절정기

↑ 빅토리아 여왕

 

신세기가 막 시작된 1901년, 묵은 세기의 종말을 상징하는 한 죽음이 있었다. 장장 64년 동안 대영제국을 이끌어온 빅토리아 영국 여왕(1819~1901)이 1901년 1월 22일 82세로 눈을 감은 것이다. 그의 죽음은 영국으로 한정하면 ‘빅토리아 시대’의 종말이었지만 세계사적으로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 ‘팍스 브리태니커(영국에 의한 평화)’의 종언이기도 했다. 그때까지 영국 역사상 최장수 군주였던 빅토리아의 재위 64년(1837~1901)은 영국의 확장사 그 자체였다. 그가 눈을 감았을 때, 전 세계 모든 대륙에는 영국의 국기가 휘날렸다. 지표면적의 20%가 영국의 땅이었고, 세계인구의 25%가 여왕의 백성이었다.

여왕은 조지3세의 4번째 아들인 켄트 공작과 독일 삭스-코버그가(家)의 공주 사이에서 외동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이듬해에 죽고 어머니는 정부(情夫)인 존 콘로이와 깊은 관계에 빠져 빅토리아는 고독한 성장기를 보냈다. 어머니는 정적들로부터 딸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딸이 친구와 교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제왕 교육 대신 공주가 갖춰야 할 소양교육만 가르쳤다. 사실 그는 왕위 계승자 순위에서 한참 뒤에 있었기 때문에 제왕 교육을 받을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할아버지 조지3세의 장남 조지4세가 적당한 계승자 없이 죽고 차남 프레더릭 공작은 후사가 없었다. 형 조지4세의 죽음으로 즉위한 셋째 아들 윌리엄4세마저 두 딸이 요절해 빅토리아가 예정에도 없는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빅토리아는 18살이던 1837년 6월 20일 여왕으로 즉위했다. 그가 먼저 한 일은 어머니를 왕궁 밖으로 내보내고 존 콘로이를 내쫓는 일이었다. 왕실은 빅토리아 여왕과 독일 삭스-코버그-고타가(家)의 왕자이자 외사촌 동갑인 알버트(1819~1861)의 정략결혼을 추진했다. 두 사람은 21살이던 1840년 2월 10일 결혼했다. 알버트는 처음에는 여왕의 부군 위치만 누릴 뿐 정치에 개입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혼생활이 안정기에 접어든 후에는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의 역할은 여왕의 근면한 비서이자 성실한 각료였다. 여왕에게 군주의 도(道)와 궁중생활의 미덕을 가르쳤다. 1851년 런던에서 사상 최초의 세계박람회를 열 때도 주도적으로 활동했다. 그가 있어 여왕은 정직한 군주로 또 순종하는 아내로 만족한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빅토리아 여왕과 남편 알버트(1854년)

 

그가 눈을 감았을 때, 전 세계 모든 대륙에 영국 국기 휘날려

그러던중 1861년 12월 장티푸스로 인한 남편 알버트의 죽음은 여왕을 깊은 우울증에 빠뜨렸다. 여왕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3년간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녀에게는 남편의 옷을 생전처럼 챙겨두라 했고, 아침마다 남편이 쓰던 대야에 새 물을 받아두라 일렀다. 침대 머리맡에는 알버트의 상반신 초상화를 걸어놓았다. 한동안 정사를 뒤로하고 궁에 틀어박힌 생활을 했으나 빅토리아는 어쩔수 없는 대영제국의 왕이었다.

다시 마음을 추스리고 대영제국 건설에 매진했을 때 알버트의 빈 자리는 다행히 두 총리가 메워주었다. 휘그당(자유당)의 지도자로 국민교육법을 성립시키고 선거의 무기명 투표제를 확립하는 등 자유주의적 개혁을 줄기차게 밀고나간 글래드스턴과, 토리당(보수당)을 이끌며 휘그당과 함께 영국에 양당 의회정치를 정착시킨 디즈레일리는 ‘빅토리아 시대’를 이끈 쌍두마차였다. 여왕이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하며 권력을 휘두르지 않고도 황금시대를 구가할 수 있었던 것은 두 총리의 역할이 컸다.

빅토리아 시대는 경제적으로는 풍요했지만 빈부격차가 극심하고 그래서 혁명이 발아할 조건을 갖추고 있었지만 두 총리의 앞선 정책으로 여왕은 유럽 대륙에서 유일하게 혁명의 바람을 피할 수 있었다. 여왕의 시대는 잇따른 선거법 개정으로 선거자유가 크게 확대되고 초등교육법의 제정으로 보통교육이 실시되었으며 노동조합법의 제정으로 노조운동이 합법화된 시기였다.

1901년 여왕이 죽었을 때 그가 낳은 9남매는 유럽 7개국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고 있었고 37명의 증손자는 유럽 전역에 퍼져 왕실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 왕실 네트워크가 여왕이 갖고 있던 혈우병 인자를 유럽 전역에 퍼뜨리는 통로가 되었다는 점이다. 남자만 걸리고 여자는 유전인자만 갖는 이 혈우병 때문에 여왕은 사후에도 곤욕을 치러야 했다. 여왕의 모계 쪽으로 17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혈우병이 나타났다는 증거가 없다는 점을 근거로 여왕이 적통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머니의 정부인 존 콘로이가 여왕의 아버지라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여왕의 사후 그의 아들 에드워드7세가 여왕의 뒤를 이었으나 20세기로 접어들어 영국의 해는 이미 기울고 있었다. 게다가 에드워드7세는 왕실 이름을 독일 귀족이었던 아버지 알버트의 성(姓)인 ‘삭스-코버그’로 바꿔 하노버 왕조의 명줄을 끊어버리기까지 했다. 에드워드7세의 아들 조지5세는 1차대전 중이던 1917년 영국 내에 확산되는 반독일 정서를 피하기 위해 ‘삭스-코버그’였던 독일계 왕실 이름을 ‘윈저’로 바꿔 오늘날의 ‘윈저왕가’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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