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일제강점기 명칭 ‘경성부’, 해방 후 서울특별시로 개칭

서울이 공식적으로 ‘서울’ 이름을 가진 것은 미군정 시절

서울에 공식적으로 ‘서울’이라는 명패가 달린 것은 해방 후였다. 일제 때도 서울로 불리긴 했지만 정식 명칭이 아니어서 대중적으로 널리 통용되지는 않았다. 일제 때 발간된 조선일보 기사(1920~1940) 제목을 검색해 보면 ‘경성’으로 표기한 경우가 1만 4,581건인 데 비해 서울은 678건에 불과하다. 서울이 공식적으로 ‘서울’ 이름을 갖게 된 것은 미 군정장관 A. L. 러치 소장이 미국의 도시자치헌장을 본 떠 만든 7장 58조의 ‘서울시 헌장’을 1946년 8월 14일 공표하고부터였다. 일제 때 명칭 ‘경성부’를 ‘서울특별자유시’로 개칭하고 서울을 경기도 관할에서 독립시켜 도(道) 수준으로 승격한다는 게 골자였다.

서울특별자유시는 그해 9월 18일 미 군정 법령 제106호가 공표되고 9월 28일 발효되면서 공식 명칭으로 확정되었다. 일본식의 지명 정(町), 정목(丁目), 통(通)도 그해 10월 현재의 동(洞), 가(街), 로(路)로 바뀌었다. 다만 1943년 일제가 획정한 ‘구(區)’만은 사라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당시 서울 인구는 120만 명을 헤아렸다. 면적은 현재의 5분의 1수준이어서 수도로서는 초라했다. 서울특별자유시가 서울특별시로 정착된 것은 1949년 8월부터다.

‘서울’이란 말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그에 대해선 몇 개의 설(說)이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설이 처용가 앞머리의 ‘새벌(東京)’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서벌(徐伐)·서나벌(徐那伐)·서라벌(徐羅伐)·서야벌(徐耶伐) 등의 변천 과정을 거쳤다는 주장도 있다. 외국에 ‘Seoul’로 알려지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 조선에 온 서양인들을 통해서였다. 1896년 창간된 독립신문이 발행지를 ‘서울’로 표기하면서 영문판은 ‘Seoul’로 표기했다.

서울 역사는 멀리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시대 초기 백제의 수도 위례성이 자리를 잡은 이래 한산주(통일신라), 양주(고려)로 개칭되어 지방 군현으로 존속해오다가 고려 문종 때인 1067년 남경으로 승격하고 1104년 지금의 청와대 부근에 궁궐을 지어 1308년 한양부로 칭했다. 서울을 수도로 삼은 것은 조선조 태조 이성계였다.

 

이성계의 서울 천도 이유는 강력한 왕권 희구와 풍수도참설

이성계는 1392년 7월 17일 개경에서 조선왕조를 창건하고 즉위 한 달도 안되어 천도(遷都)를 지시했다. 천도를 서두른 이유는 몇 갈래로 추정된다. 첫째는 강력한 왕권의 희구다. 고려 왕조를 흠모하는 귀족세력의 정치적 기반이 개경인 데 반해 지방(함북 영흥)의 무인 출신인 그는 개경에 특별한 연고가 없었다. 따라서 그는 개경을 기반으로 한 구귀족들의 경제적·군사적 힘을 무력화할 필요가 있었다. ‘송도의 지기(地氣)가 쇠했다’, ‘송도는 신하가 임금을 폐출하는 곳’이라는 등의 풍수도참설도 영향을 미치고 건국과정에서 개경 사람들이 흘린 피도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태조의 천도 지시로부터 1394년 서울이 도읍지로 결정되기까지 2년간 후보지로 등장한 곳은 한양을 포함해 계룡산, 모악 등 모두 9군데였다. 그 중 제1후보지는 한양이었다. 그러나 기득권 포기를 싫어한 신하들이 “한양에는 마땅한 궁궐이 없고 성곽도 안전하지 않아 백성에게 피해를 준다”는 이유로 천도를 반대해 결국 태조는 한양 천도를 중단하고 새로운 후보지를 물색했다.

계룡산 신도읍을 첫 후보지로 선정했으나 “남쪽에 치우쳐 있고 풍수지리적으로도 쇠약한 땅”이라는 신하들의 주장이 잇따라 다른 후보지를 찾도록 했다. 그래서 모악(연희동·신촌 일대)이 대안으로 떠올랐으나 이곳 역시 도읍지로는 부적절한 것으로 결론이 났다. 결국 태조는 1394년 8월 24일(음력) 한양을 도읍지로 확정해 천도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태조는 1394년 10월 25일(양력 11월 26일) 개경을 출발해 10월 28일(양력 11월 29일) 한양에 도착, 지금의 청와대 부근에 위치한 궁궐을 이궁으로 삼고 이듬해 한양을 한성부로 개칭했다. 그러나 제1차 왕자의 난(1398)으로 이성계의 계비 아들인 세자 방석과 방번이 죽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이 계속되고 왕위를 물려받은 정종도 한양에 마음을 두지 못해 1399년 3월 개경으로 돌아갔다. 그러다가 1405년(태종 5년) 10월 다시 환도해 500여 년 동안 한성부 명칭으로 수도 역할을 했다.

 

‘서울 시민의 날’ 제정된 것은 1994년 10월 28일

한성부 명칭이 또다시 바뀐 것은 일제가 조선을 합병하고 2개월이 지난 1910년 10월이었다. 일제는 한성부를 경성부로 개칭하고 행정구역과 기능을 축소해 경기도 관할로 격하했다. 동명과 지명의 우리말 명칭도 일본식으로 한자화했다.

경성부는 해방 후에도 그대로 유지되다가 1946년 8월 미 군정이 제정한 군정법령에 따라 서울특별자유시로 공식 개칭되었다. 아래 표를 보면 알 수 있 듯이 서울시는 1946년 특별시가 될 때 일제가 1943년부터 시행한 ‘구제(區制)’를 적용, 8개 구(종로구·중구·동대문구·서대문구·용산구·성동구·영등포구·마포구)로 첫 살림을 시작했다.

1949년 8월에는 경기도 고양군의 숭인면, 뚝도면, 은평면과 시흥군 동면의 일부를 서울로 편입시키면서 면적은 광복 직후의 2배인 268㎢, 인구는 162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때 구(區)는 성북구가 추가되어 9개구로 늘어나고 은평·뚝도·숭인 등 3개 출장소가 신설되었다. 1963년 1월에는 5개군의 7개면 전부와 5개면 일부를 합친 90개리까지 흡수되면서 3개이던 출장소가 13개로 늘어나고, 인구도 325만 명으로 증가해 명실상부한 국제적 대도시로 탈바꿈했다.

서울시는 1962년 2월 내무부 직속에서 국무총리 직속으로 지위가 격상되고 1991년 5월 ‘수도로서의 특수한 지위를 갖는다’는 특별조치법이 제정되면서 대한민국의 대표성을 띄기 시작했다. 첫 ‘서울 시민의 날’이 제정된 것은 1994년 10월 28일이다. 태조가 한양에 입성한 음력 10월 28일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11월 29일이지만 날씨가 추워 행사를 치르는 데 부적합하다고 판단해 그냥 10월 28일을 ‘서울 시민의 날’로 삼은 것이다. ‘한성’ 명칭은 일제 통치와 더불어 우리나라에서는 사라졌으나 중국에서 계속 사용되다가 2005년 10월 중국이 한성을 공식적으로 ‘서우얼(首尔)’로 바꾸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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