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정비석 소설 ‘자유부인’ 논쟁

↑ 서울신문에 연재된 정비석 소설 ‘자유부인’

 

상류층의 타락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전환기적 사회상을 한발 앞서 묘사한 정비석의 신문연재소설 ‘자유부인’이 1954년 1월 1일부터 8월 6일까지 215회 동안 서울신문에 연재됐다. 이혼율이 0.27%(1955년)로 증가하고 사교댄스 붐이 일던 때였다. 70여 명의 여성을 농락한 박인수 사건이 터지는 등 봉건적 사회 분위기도 빠르게 변화의 몸살을 겪고 있었다. 소설에서 현직 교수와 그의 부인이 벌이는 일탈의 감정과 애정행각은 전통적인 부부상에 일대 충격을 던져주었고 ‘자유부인’은 바람난 여자의 대명사가 됐다.

파격적인 스토리 전개도 세인들의 관심을 끌었지만 소설을 더욱 유명하게 한 것은 당대 저명인사들 간의 논쟁이었다. 첫 포문은 황산덕 서울법대 교수가 열었다. 3월 1일자 대학신문에 “대학교수를 양공주에 굴복시키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용납될 수 없는 죄악이며 중공군 50만 명에 해당하는 국가의 적”이라며 성토하자 정비석은 3월 11일자 서울신문에 ‘탈선적 시비를 박함’이라는 제목으로 “문학자를 모욕한 글”이라며 반박, 논쟁으로 발전시켰다.

황교수가 3월 14일자 서울신문에 처음보다 더 격렬한 반박문을 발표하자 이번에는 변호사 홍순엽과 문학평론가 백철이 논쟁에 뛰어들었다. 홍변호사는 작가를 변호하는 글을 서울신문에 썼고 백씨는 문학작품의 대중성과 예술성을 따지는 글을 대학신문에 올렸다. 소설이 또 다시 화제에 오른 것은 “공무원을 비하하는 내용이 있어 죄송하다”는 작가의 석명서가 6월 24일자 광고란에 실리면서였다. 6월 21일자 소설에 실린 “국록을 먹는 공무원이 도장하나 찍어주고도 수천만금의 뇌물을 예사로 받아먹는 이 세상… ”이라는 구절이 권력으로부터 중단 압력을 받자 석명서를 발표한 것이다. 결국 소설이 단행본으로 출간될 때는 권력의 입김으로 이 부분이 빠진 채 출간됐지만 최초의 10만 부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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