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차 소련 공산당대회 마지막 날인 1956년 2월 25일 늦은 밤, 니키타 흐루쇼프가 비밀보고서 ‘개인숭배와 그 모든 결과에 대하여’를 들고 연단에 섰다. 1953년 스탈린 사후 어렵사리 당 제1서기에 올라 그동안 소련을 짓눌러온 악법들을 개폐(改廢)하고 독자노선을 걷던 유고의 티토와 화해까지 시도했던 흐루쇼프였던지라 당 간부들은 스탈린 노선 중 일부가 수정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흐루쇼프는 먼저 스탈린의 권력욕과 포악한 성격을 경계한 레닌의 ‘유서’를 읽어나갔다. 장내 곳곳에서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흐루쇼프는 아랑곳 하지않고 그때까지 신격화된 스탈린을 조목조목 예를 들어가며 4시간이나 신랄하게 비판했다. 1937년 제17차 당대회 때 선출된 당중앙위원 139명 중 98명이 총살됐다는 비밀도 공개됐다. 보수파는 경악했지만 이미 흐루쇼프 사람들이 당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을 인정해야 했다.
입소문으로만 전해지던 스탈린 격하 발언이 그해 6월에 미 국무성을 통해 발표되자 그동안 스탈린을 무오류의 지도자로 인식해왔던 각국의 공산당은 충격에 휩싸였다. 특히 동구권의 충격이 커 폴란드에서 정변(6월)이 일어났고 헝가리에서는 반소봉기(10월)가 폭발했다. 소련에서도 약 800만 명의 정치범이 풀려나고 스탈린의 사체도 레닌묘로부터 철거되었다. 훗날 고르바초프는 흐루쇼프를 “역사의 과오를 대면하고 이해했던 최초의 사람”이라며 이 사건을 “권위주의 체제에 첫 타격을 가한 역사적인 사건”으로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