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서울올림픽 개막… 단군 이래 최고·최대 행사

16년 만에 집단적 보이콧 없이 세계가 하나 된 올림픽

1981년 9월 30일 오후 3시 40분, 독일 라인강변의 작은 휴양도시 바덴바덴에 설치된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장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한국의 서울과 일본의 나고야를 대상으로 한 올림픽 개최지 투표 결과가 막 발표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나고야 유력설’이 나돌던 때라 우리 측 유치단의 얼굴에는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윽고 사마란치 IOC 의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쎄울 코리아!.” 그 순간,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 박영수 서울시장, 조상호 대한체육회장 겸 KOC(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 등 우리 측 유치단 일행은 일제히 일어나 서로 부둥켜안고 환호했다. 서울이 초반의 열세를 뒤집고 52표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27표를 얻은 나고야를 물리치고 제24회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된 것이다.

우리나라가 올림픽 개최를 준비하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올림픽 유치를 지시한 1979년이었다. 올림픽 유치는 문교부 장관이 8월 14일 “정부 차원에서 올림픽 유치를 적극 추진 중”이라고 발표하고, 9월 1일 서울시장이 “올림픽 유치를 위해 유치추진소위를 구성했다”고 발표하면서 공식화했으나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올림픽 유치는 동면에 들어갔다.

1980년 9월 취임한 전두환 대통령이 올림픽 유치를 계속 추진할 것을 지시하면서 유치 활동은 다시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접수 마감일인 그해 11월 30일, 멜버른(호주), 나고야(일본), 아테네(그리스) 3개 도시가 유치 신청을 했다는 IOC의 발표 때까지도 한국은 준비 부족으로 신청서를 내지 못했다. 한국은 접수 마감일을 4일이나 넘긴 12월 4일에야 유치를 신청했으나 사마란치 IOC 의장의 배려로 가까스로 경쟁 대열에 낄 수 있었다.

KOC가 유치 신청서를 정식으로 IOC 본부에 제출한 것은 1981년 2월 27일이었다. IOC는 3월 3일 서울, 나고야, 아테네가 최종 유치 신청 도시라고 발표했다. 다만 아테네는 올림픽 영구 개최를 위한 신청이기 때문에 실질적인 유치 희망도시는 아니었다.

그때까지 한국의 유치 신청 소식은 스포츠면 단신으로 처리될 정도로 언론도 국민도 “설마 되겠어”하는 마음이었다. 대부분 고작 서너 표를 예상했다. 무엇보다 1년 전 모스크바 올림픽이 서방국가들의 불참으로 반신불수가 된 상태에서 한반도의 남북 분단은 올림픽 유치를 방해하는 최대 장애물로 여겨졌다.

그러나 1981년 6월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서울올림픽 유치추진위원장을 맡으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9월 20일 정 회장을 비롯한 유치단이 바덴바덴에 도착했을 때 현지 분위기는 나고야 유치설이 유력했다. 그러나 승리의 여신은 이미 한반도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다만 마지막 날까지 그걸 몰랐을 뿐이다.

 

언론도 국민도 “설마 되겠어”하며 기대 안해

올림픽 유치에 성공하고 7년이 지난 1988년 9월 17일, 진한 코발트색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다. 날씨도 청명했다. 그날 세계 160개국 1만 3600여 명의 선수단이 서울 잠실종합운동장에 모여 ‘화합과 전진’을 다짐했다. 제24회 서울올림픽이 마침내 개막된 것이다. 그리스 선수가 먼저 입장하고 나머지 국가가 한글 가나다순으로 입장을 마친 낮 12시 20분쯤 노태우 대통령이 역사적인 개막 선언을 했다. 12시 35분쯤 ‘베를린 마라톤의 영웅’ 손기정이 들고 온 성화는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육상 3관왕에 빛나는 최종주자 임춘애의 손을 거쳐 점화자에게 건네졌다.

당초 최종주자는 손기정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예행 연습장면이 일본 언론에 노출되는 바람에 임춘애가 영예의 최종주자로 선정되는 행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정선만(초교 교사), 손미정(서울예고 학생), 김원탁(마라토너) 등 3명의 점화자가 성화대 위로 올라가 전 인류의 축제에 불을 당기고 뒤이어 허재(농구), 손미나(여자핸드볼) 선수가 160개국을 대표해 선수선언을 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어 2번째, 세계에서는 16번째로 올림픽을 치른 스포츠 선진국이 되었다.

IOC 산하 세계 167개국 NOC(각국올림픽위원회) 가운데 북한을 비롯해 쿠바, 알바니아, 에티오피아 등 7개국이 불참하는 아쉬움이 있었으나 서울올림픽은 1972년 뮌헨 올림픽 이래 16년 만에 집단적 보이콧 없이 세계가 하나가 된 온전한 대회였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때는 대회 직전 인종차별 국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친선 럭비경기를 펼친 뉴질랜드의 참가에 항의하는 아프리카 지역 26개국이 불참하고, 1980년 모스크바 대회에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하는 미국, 서독, 일본, 한국 등 67개국이 불참했다. 1984년 LA 대회는 서방 측의 모스크바 올림픽 보이콧에 대한 보복으로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과 북한, 쿠바 등 11개국이 불참했다.

 

전 세계 기자들 대거 한국에 몰려온 것은 한국 역사상 세 번째 

전 세계 기자들이 대거 한국에 몰려온 것은 한국 역사상 서울올림픽 때가 세 번째였다. 앞선 두 경우는 1904년의 러일전쟁과 1950년의 한국전쟁이었다. 이 때문에 오랫동안 한국의 이미지는 전쟁으로 인한 폐허와 가난의 모습으로 비쳤다. 1970~1980년대 대한민국의 모습은 화염병에 불타는 경찰버스, 다연발 최루탄 발사기의 위력적인 모습, 자욱한 최루탄 연기 속에서 돌과 화염병을 던지는 대학생들의 모습으로 세계에 각인되어 있었다. 이런 장면에 익숙해 있던 외국인에게 10월 2일 폐막할 때까지의 2주간은 충격 그 자체였다.

세계 언론사상 최대 규모였던 서울올림픽 취재단은 한국의 발전상과 한국인의 자신감 넘치는 표정들을 카메라에 담아 전 세계로 송신했다. 서울올림픽은 올림픽 주제곡처럼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너와 내가 하나가 된 단군 이래 최고․최대 행사였다.

세계최대 북을 만들어 기증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단 5분 동안의 식전행사를 위해 제대 날짜를 뒤로 미룬 장병도 있었다. 소매치기들은 올림픽 기간에 휴업을 결의하는 것으로 동참했고, 자전거에 태극기를 달고 지구를 돌며 한국을 알린 나라사랑도 있었다. 군인과 학생, 자원봉사자들의 참여가 올림픽의 성공에 직접적으로 기여하긴 했지만 적어도 올림픽 기간 동안만은 국민 모두가 영웅이었고 주역이었다.

그룹 코리아나가 부른 올림픽 주제곡 ‘손에 손잡고’는 LP 레코드, 카세트 테이프, 콤팩트디스크(CD)를 합쳐 그해에만 전 세계에서 600만 장, 이듬해까지는 800만 장이 팔렸다. 동양인이 부른 노래가 세계 정상에 오른 것은 처음이었다. 역대 올림픽 주제가 중에서도 최고의 히트곡이었다. 1989년 중국 천안문 사건 때는 시위대 사이에 이 노래가 유행했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까지 동독에서는 ‘벽을 넘어서’라는 가사 때문에 금지곡으로 묶였다.

 

“독일인의 정확성, 미국인의 기업가 정신, 일본인의 친절이 합쳐진 행사”

경기 진행도 깔끔했다. 1030개 종목 경기의 정시 진행률도 역대 최고인 97.2%를 기록, ‘코리안 타임’의 부정적 이미지도 씻어냈다. 서울올림픽이 아니었으면 늦어졌을 소련, 동독, 헝가리, 폴란드 등과의 공산권 교류도 올림픽 덕에 빨라졌다. 하늘도 도왔는지 태풍의 계절에 태풍이 없었고 북한의 테러가 없었으며 역대 올림픽 때마다 불거진 소송도 없었다.

한 외국 언론은 “독일인의 정확성과 미국인의 기업가 정신과 일본인의 친절이 합쳐진 행사”였다고 서울올림픽을 평가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아시아의 조그만 나라가 어떻게 올림픽과 같은 큰 행사를 치를 수 있는가를 보여준 능력시험장”이라고 치켜세웠다. 한 외국인은 “경제 기적에 이어 정치 기적 그리고 제3의 기적을 이뤄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경기 결과에서도 한국은 또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했다. 16일 동안 열전을 벌인 결과 금 12, 은 10, 동 11개로 세계 스포츠 강대국을 물리치고 4위를 기록했다. 홈그라운드의 텃세를 감안하더라도 세계 올림픽사를 새로 쓸 만한 놀라운 성적이었다. 소련, 동독, 미국은 각각 금메달 55개, 37개, 36개로 1~3위에 랭크되었다. 중국은 금 5개로 11위, 일본은 금 4개로 14위를 차지했다.

한국은 구기종목 사상 최초로 여자핸드볼이 금메달을 따고 양궁은 금메달 4개 중 3개를 휩쓸었다. 이밖에 복싱, 유도, 탁구, 레슬링에서도 각각 2개의 금메달을 획득했다. 기록면에서도 서울올림픽은 역대 어느 올림픽보다 풍성한 수확을 거뒀다. 세계신기록이 33개가 나오고 올림픽신기록이 227개나 되었다.

올림픽 기간 중 가장 주목을 끈 선수는 수영의 크리스틴 오토(동독)와 맷 비온디(미국)였다. 두 선수는 각각 수영 6관왕, 5관왕에 올랐다. 터키의 나임 술레이마놀루는 역도 60kg급 경기에서 무려 6차례의 세계신기록을 수립하며 금메달을 따냈다. 남자 육상 100m에서는 캐나다의 벤 존슨이 9초79의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했지만 금지약물을 복용한 사실이 사흘 만에 드러나 금메달을 박탈당하는 오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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