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박정희 제5대 대통령 당선

박정희 선거 전, “민정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발표해 기성 정치인들의 마음을 들뜨게 해

1963년 1월 1일을 기해 5․16 후 모든 정당·사회단체의 정치활동을 금했던 ‘군사혁명위 포고령 제4호’가 폐기됨으로써 동면에 들어갔던 정치가 1년 7개월 만에 기지개를 폈다. 기성 정치인들은 곧 군정이 끝나고 민정이 시작될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었으나 사실상 그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박정희 의장은 여전히 복심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1963년 2월 18일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나는 민정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며, 1962년 3월의 ‘정치활동정화법’에 의해 활동이 금지된 정치인들을 풀어주겠다”고 시국 수습방안을 발표함으로써 기성 정치인들의 마음을 더욱 들뜨게 했다.

정치인들이 ‘보복 금지’ ‘혁명정신 계승’ 등 9개 조건을 수락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지만 박정희 의장이 민정에 불참한다는 데 기성 정치인들로서는 조건을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2월 27일에 마련된 자리가 46명의 재야 정치 지도자 및 정당 대표, 군 지도자들이 참여한 ‘정국 수습 공동선언’이었다.

그들은 박 의장의 시국 수습방안을 수락하고 군의 정치적 중립을 다짐하는 선서식을 열었다. 같은 날 2322명의 정치인까지 해금되는 것을 본 야당은 “사실상 군사정권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라며 낙관적인 논평을 냈다. 그러나 야당은 박정희가 군복을 벗지 않는 한 여전히 모든 실권이 박정희의 손에 쥐어져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박정희의 2․18 민정 불참 선언이 전략적 선택이었음은 3월부터 하나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3월 7일 원주 1군사령부에서 “국민에게 해독을 끼치고 질서를 혼란케 한 기성 정치인은 일선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한 경고는 그 신호탄이었다.

3월 11일엔 중앙정보부가 “김동하 최고위원, 박임항 건설장관 및 박창암 전 혁명검찰부장 등 20명이 정권을 장악하려 했다”며 이른바 ‘군부 쿠데타 음모사건’을 발표해 정국을 다시 급속도로 냉각시켰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 사건은 박정희가 당시의 상황을 혼란 속으로 몰고 가 다시 정국의 주도권을 잡는 계기로 활용되었다. 3월 15일엔 80여 명의 수도경비사령부 장교와 하사관이 “군정을 연장하라”, “계엄령을 선포하라”며 건군 이래 최초의 군인 데모를 벌였다.

 

박정희가 복심 드러내며 변화무쌍한 모습 보여도 야당 정치인들은 분열에 빠져 

박정희가 마침내 비장의 무기를 꺼내든 것은 3월 16일이었다. “군정 4년 연장안을 국민투표에 붙이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뒤이어 최고회의가 비상사태 수습을 위한 비상조치법을 통과시켜 언론 검열과 정치활동 금지를 선언하고, 김성은 국방장관을 비롯 160여 명의 지휘관이 3월 22일의 전군지휘관회의에서 “군은 박정희 의장의 3․16 군정 연장안을 지지한다”는 요지의 결의문을 채택해 박정희의 속내를 대변해주었다.

4월 8일 박정희가 “군정 연장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9월 말까지 보류하고 정치활동의 재개를 허용한다”고 발표함으로써 군정 연장은 일단 뒤로 미뤄졌지만 박정희의 영향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2․18 민정 불참 선언’은 어느새 휴지가 되어버렸고 박정희의 민정 참여는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 되었다. 8월 14일 군사정부가 “대통령 선거는 10월 15일, 국회의원 선거는 11월 26일에 치르겠다”고 발표함으로써 전 국민의 관심은 3년 7개월 만에 치러지는 대통령 선거로 급속히 이동했다.

8월 30일 대장 전역식과 공화당 입당을 동시에 해치운 박정희는 8월 31일 공화당 총재 겸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이렇듯 박정희가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이는 동안 야당 정치인들은 잠시 하나로 결집하는가 싶더니 이내 분열하기 시작했다. 구 민주당의 구파는 무소속과 구 자유당계를 일부 참여시켜 민정당을 구성했고, 구 민주당의 신파는 허정과 연합하여 신정당을 창당했다. 야권 통합은 이렇게 무산되었고 9월 15일 마감 때까지 박정희(공화당), 윤보선(민정당), 허정(국민의당), 송요찬(자민당) 등 7명이 대통령 후보로 등록했다.

선거 양상은 박정희, 윤보선, 허정의 3파전이었다. 강력한 여당 후보에 야당 후보 2명이 맞서는 건 누가 보아도 야당에 불리한 싸움이었다. 게다가 박정희 측은 풍부한 선거자금과 공화당의 조직력 그리고 각종 친여적 사회단체들까지 갖추고 있었다. 결국 야권 통합을 바라는 정치권과 국민의 뜻을 거스를 수 없어 허정(10.2), 송요찬(10.7) 두 후보가 윤보선을 지지한다며 대통령 후보직을 사퇴함으로써 선거는 박정희와 윤보선의 각축전으로 전개되었다.

 

선거 정국을 뜨겁게 달군 건 유세 중 터져나온 사상 논쟁

새 권력자와 구 대통령과의 대결도 볼만했지만 무엇보다 대선 정국을 뜨겁게 달군 건 유세 중 터져나온 사상 논쟁이었다. 사상 논쟁 앞에서 다른 공약은 그저 곁다리 구호에 불과했다. 사상 논쟁의 발화점은 1963년 9월 23일 서울중앙방송을 통해 알려진 박정희의 정견 발표였다. 박정희가 “이번 선거는 민족적 이념을 망각한 가식의 자유민주주의 사상과 강력한 민족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사상과의 대결”이라며 기성의 정치인들을 사대주의적 근성을 지닌 ‘천박한 자유민주주의자’로 몰아붙인 게 논쟁의 시작이었다.

윤보선은 다음날 기자회견을 통해 “여순반란사건의 관계자가 지금 정부에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우리의 민족주의나 민주주의를 의심한다면 역사를 캐보자”며 은근히 박정희의 여순반란사건 연루 사실을 환기시켰다. 윤보선의 기자회견은 박정희 측은 물론 국민에게도 충격이었다. 9월 25일엔 서울 교동초등학교에서 열린 야당의 시국강연회에 “북한에서 밀파한 황태성 사건의 진상을 밝혀라”, “공화당 내에 6·25 당시 부역자 및 그의 가족이 월북한 자가 있다”는 구국청년동지회 명의의 전단까지 뿌려지면서 사상 논쟁은 더욱 가열되었다.

황태성은 박정희의 셋째형 박상희의 중매를 설 정도로 박상희와는 절친한 친구이자 공산운동을 같이한 동지로 박정희가 어릴 때 자신의 장래를 상의할 만큼 박정희와도 친분이 있었다. 1946년 10월의 대구폭동 후 월북했다가 박정희를 만나러 1961년 8월 남하했으나 중앙정보부에 체포되어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1주일 뒤 대법원의 상고기각으로 사형이 확정되어 1963년 12월 14일 총살형에 처해졌다

온 나라가 사상 논쟁에 휘말렸는데도 박정희 자신을 비롯 최고회의나 공화당으로부터 사실 무근이라는 주장이나 반론이 제기되지 않아 의혹이 확산되었다. 이 때문에 국민들의 관심이 사상 논쟁으로 쏟아졌고, 윤보선 측의 분위기는 “대통령 선거 해봤자…”라는 체념에서 “한번 해볼 만하다”라는 자신감으로 바뀌었다. 난립한 야당 후보 중 박정희와 상대할 수 있는 후보는 윤보선뿐이라는 여론을 확산시키는 데도 사상 논쟁의 역할이 컸다.

 

윤보선을 15만여 표 차로 따돌리고 박빙의 승자가 돼

국민들의 의혹이 이처럼 갈수록 커지자 박정희 측도 더 이상은 어쩔 수 없었는지 9월 28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나서 “황태성이 박정희 의장과 친분이 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소리”라며 일축했다. 그러나 허정과 송요찬의 후보직 사퇴로 판세가 요동을 치자 선거를 일주일 앞둔 10월 8일 박정희가 직접 나서 “여순반란사건은 나와 무관하다”며 연루 사실을 부정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10월 9일 박정희는 황태성 사건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밝혔다. 박정희로서는 차마 꺼내고 싶지 않았지만 더 이상 야당에 끌려갈 수 없다는 절박함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한 것이다.

선거를 이틀 앞둔 10월 13일 윤보선 측은 확실한 승기를 잡기 위해 1949년 2월 17일자 경향신문과 2월18일자 서울신문에 실렸던 ‘박정희 소령 무기징역 선고’ 관련기사를 공개했다. 박정희 소령이 72명의 다른 장교와 함께 여순반란사건 이후에 있었던 군부 내 남로당 조직 수사에 걸려 군법 재판에서 유죄선고를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비상이 걸린 박정희 측은 “박정희 후보가 여순반란사건에 관련해 재판을 받은 일이 없다”고 애써 부인하면서 “윤보선 가족 중에도 공산당원이 있다”며 물타기를 시도했다. 기사에 거명되었던 당시 재판장도 “나는 박정희 장군에 대해 재판을 한 사실이 없다”며 부인하고 나섰다. 운명의 선거일인 10월 15일. 투표를 마친 윤보선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미국 정보기관원의 집으로 피신했고, 박정희는 경주 불국사 근처에서 국민의 심판을 기다렸다.

10월 17일 오후 3시 중앙선관위 발표에 따르면 박정희는 470만2640표(46.65%)를 얻어 454만6614표(45.10%)를 획득한 윤보선을 15만6026표 차로 따돌리고 박빙의 승자가 되었다. 사상 논쟁 때문인지는 몰라도 윤보선은 휴전선과 가까운 경인 및 중부지역에서 많은 표를 얻었고 박정희는 주로 1956년의 대통령 선거 때 진보당의 조봉암이 다수를 차지한 지역에서 윤보선을 앞섰다. 표의 남북 분할 현상과 여촌 야도 현상도 중첩되어 나타났다. 어쨌든 박정희는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로써 5·16으로부터 꼭 30개월 동안 계속되어온 박정희와 윤보선의 숙명적인 대결도 일단락되었고 4년 후의 리턴매치를 기약했다. 선거는 전체적으로 큰 무리가 없었다는 게 당시 언론과 미국의 중평이었다.

 

☞ 황태성

황태성은 박정희의 셋째형 박상희와 절친한 친구이자 공산운동을 같이한 동지였지만 박정희와도 친분이 있었다. 박상희는 1946년 대구폭동 때 주도적인 역할을 하다가 1946년 10월 5일 진압 경찰관들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남로당 경북도당의 조직부장으로 역시 대구폭동을 주도한 황태성은 폭동 실패 후 월북했기 때문에 고향에서 그의 종적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북에서 차관급인 무역부부상으로 지내던 황태성이 서부전선 비무장지대를 넘어 남으로 잠입한 것은 1961년 8월 말이었다. 9월 1일 고향의 한 친지 아들을 만난 황태성은 “나는 간첩으로 넘어온 게 아니라 김일성의 특명을 받아 밀사로 넘어온 것”이라며 박정희와의 만남을 주선해주도록 요청했다. 친지의 아들은 나중에 중앙대 총장에까지 오른 당시 중앙대 강사 김민하였다.

10월 5일 황태성은 남한에 살고 있는 자신의 질부를 통해 박상희의 처 조귀분(김종필의 장모)에게 자신의 편지를 전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편지를 받은 조귀분이 이 사실을 자신의 사위인 김종필에게 신고하는 바람에 황태성은 10월 20일 중정 요원에게 체포되었다.

황태성은 계속 박정희 의장이나 김종필 당시 중정부장과의 만남을 요청했지만 혁명공약 제1조로 ‘반공’을 내걸 만큼 용공성 해소에 안간힘을 쓰고 있던 박정희가 자칫 함정에 빠질지도 모를 황태성을 만나줄 리가 없었다. 5·16 쿠데타 후 박정희는 과거 남로당에 가입했다가 군에서 혹독한 조사를 받은 자신의 과거를 불식하기 위해, 또 자신에게 의혹의 눈총을 거두지 않고 있는 미국을 안심시키기 위해 반공을 최우선 기치로 내세우고 있었다.

결국 황태성은 박정희는커녕 김종필도 만나지 못한 채 비밀리에 육군 중앙고등군법회의에 송치되어 1961년 12월 27일 간첩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고등법원을 거쳐 대법원 상고심을 기다리던 1963년 9월 25일 한 야당 집회장에 황태성에 대한 유인물이 뿌려지고 허정 국민의당 대통령후보가 진상을 밝힐 것을 요구하면서 황태성은 더 이상 익명의 존재가 아니었다.

“황태성은 북한 밀사‘ 주장도 있어

중앙정보부가 황태성의 존재를 세상에 공개한 것은 9월 28일이었다. 더 이상 숨겼다가는 오히려 20일 앞으로 다가온 대통령 선거에 악재가 될 것 같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박정희도 10월 9일 기자회견을 자청해 “중앙정보부가 나를 만나겠다는 황태성을 붙잡아 법에 의해 처리했다”며 “야당이 떠드는 이야기는 모두 허위 날조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황태성이 간첩이라는 박정희 측의 주장과 달리 지금도 “황태성은 밀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해석할 만한 이유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황태성의 잠입이 있기 1개월 전에 진행된 남북간 비밀회담 때문이었다. 1961년 8월 박정희 군사정권은 북한의 남침 기도를 막고 대북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북한에 비밀회담을 제의했다. 박정희의 남로당 전력에 기대를 걸었다가 혁명정부가 반공을 공약으로 내세운 데 당황한 북한도 박정희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 회담에 적극성을 보였다.

회담은 박정희, 김종필, 이철희 첩보부대장 등 고위간부 몇 명만이 알고 있었을 뿐 미국의 CIA도 모르게 진행되었다. 양측은 인천에서 뱃길로 2시간 거리에 있는 서해상의 무인도 용매도에서 서로의 배를 끈으로 묶고 배를 오가며 10여차 회담을 열었다. 태풍 등의 기상악화로 해상회담이 어려워질 때는 황해도 해주로 장소를 옮겨 5차례 더 회담을 진행했다. 북한은 남한과 달리 각료 이상의 고위급 회담을 요구했다. 황태성의 밀파도 고위급 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잠입한 것이라는 게 밀사론의 근거였다.

황태성은 1963년 10월 22일 대법원이 상고를 기각해 사형이 확정되어 1963년 12월 14일 인천의 한 군부대에서 총살형에 처해졌다. “남북통일 만세”를 외치며 죽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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