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민족일보 폐간과 조용수 사장 사형

창간호부터 과감한 논조와 신선한 편집으로 폭발적 인기 끌어 

4․19 혁명 후 언론의 자유가 만개했다. 누구든 신문을 만들 수 있었고 새롭게 선보인 신문만 380여 종이 되었다. 1961년 2월 13일에 창간된 민족일보도 그런 분위기 속에서 탄생했다. 그러나 민족일보는 4개월도 안 되어 간판을 내려야 하는 비운의 신문이 되었고, 발행인 겸 사장 조용수(1930~1961)는 31세의 젊은 나이에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연희전문을 다니던 조용수가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이었다. 메이지대를 졸업하고 우익 단체인 재일 거류민단의 기관지와 교포신문에서 활동했으나 1959년 2월에 있은 조봉암의 사형 선고를 계기로 삶에 중대 변화가 일어났다. 조용수는 이승만 정부와 코드가 맞는 민단 소속이면서도 조봉암 구명위원회에 참여했다. 그래도 조봉암은 1959년 7월 사형에 처해졌고 조용수는 일본 내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그 무렵 조용수는 운명을 바꿔놓을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조봉암의 비서를 지냈던 이영근이었다. 그는 조봉암의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난 틈을 타 일본으로 망명해 통일조선신문을 만들며 반이승만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이영근의 평화통일운동은 조용수에게 조국의 분단 문제를 되돌아보는 계기를 제공했다. 그래도 아직은 마음이 민단 쪽에 있어 당시 재일교포 사회의 최대 이슈였던 재일동포 북송 반대 투쟁에 참여했다. 1959년 12월 11일 조용수를 비롯한 민단계 청년 500여 명은 북송작업이 이뤄지고 있는 도쿄 신주쿠역 구내 철로에 누워 반대시위를 벌였다. 조용수의 시위 장면은 국내의 ‘대한뉴스’에 상영되기도 했다.

조용수는 4․19 혁명 후인 1960년 6월 귀국해 혁신 정당인 사회대중당 후보로 경북 청송에서 출마했다가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1960년 12월 다시 국내로 돌아와 1961년 2월 13일 조동필, 송지영, 이건호 등 당대의 쟁쟁한 혁신계 인사들로 필진을 꾸린 민족일보를 창간했다.

 

진보적 논조로 다른 신문과의 차별화에 성공

민족일보는 창간호부터 과감한 논조와 신선한 편집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소외계층에 대한 관심과 진보적 논조로 다른 신문과의 차별화에 성공했다. 창간 1개월 만에 기록한 발행부수 3만5000부는 당시 유력지들의 발행부수가 5만부이던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판매부수였다.

당시의 핫이슈는 한미 경제협정이었다. 혁신계 측은 “미국이 원조의 대가로 원조사업을 감시하고 감독할 수 있도록 한 한미경제협정은 주권국가로서 치욕이자 굴욕”이라며 반미 시위를 벌였다. 민족일보도 협정이 자주경제를 해치는 부당한 것이라며 장면 정권을 향해 연일 맹공을 가했다.

당시는 또 다양한 통일론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나올 때였다. 통일론은 2가지로 요약되었다. 북한의 실체를 인정하고 통일 협상의 상대로 인정하자는 것과 외세의 간섭을 받지 않고 우리 민족 스스로 자주적으로 통일하자는 것이었다.

1961년 4월 서울대 민족통일연맹(민통련)이 제안한, 통일문제 논의를 위한 남북한 학생회담은 각계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5월 13일 민족자주통일중앙협회(민자통)가 주관한 서울운동장 궐기대회에서는 그 유명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구호가 등장했다. 민족일보도 통일론에 적극 호응하며 맞장구를 쳤다. 민족일보는 이렇듯 평화통일론과 남북협상론을 기치로 내걸고 시대를 선도했으나 결국 너무 앞서가는 바람에 ‘반공’을 혁명공약 제1호로 내세운 쿠데타 세력으로부터 철퇴를 맞았다.

조용수는 5·16 쿠데타가 발발하고 이틀이 지난 1961년 5월 18일 12명의 관련자들과 함께 구속되었다. 민족일보는 5월 19일 지령 92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혁명 검찰부는 “조용수가 일본 거주 대남간첩 이영근으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4650만 환과 3810만 환을 공작금으로 받아 선거에 출마하는 한편 민족일보를 창간해 북한의 주장을 대변하는 언론활동을 벌였다”고 발표했다.

 

억울함과 미안함, 유언으로 남겨

재판은 7월 29일 시작되었다. 자금이 이영근으로부터 조용수에게 전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영근이 간첩이라는 사실과 이영근의 자금이 조총련계 자금이라는 어떤 증거도 없었는데도 재판은 이영근을 간첩으로 몰아갔다. 훗날 이영근이 일본에서 발행하던 신문의 국내 지사가 당시에도 버젓이 한국에 있었고 1990년 이영근이 사망했을 때 우리 정부가 이영근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한 사실이 밝혀진 데서 알 수 있듯 이영근의 간첩혐의는 앞뒤가 맞지 않았다.

검찰은 민족일보의 논지도 문제를 삼았다. 북한의 지령을 받아 평화통일론을 선전하는 데 앞장서고 남북한 교류와 학생회담 개최를 찬동함으로써 북한의 활동을 고무·동조했다는 것이다. 5․16 쿠데타 후 제정된 ‘특수범죄자 처벌에 관한 특례법’을 3년 6개월까지나 소급 적용한 것도 재판의 정당성을 의심받았다. 조용수는 송지영, 안신규 등과 함께 1심(8.28)과 상고심(10.31)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다른 민족일보 관련자들은 5~1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거나 무죄로 풀려났다.

조용수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형집행에 서명한 1961년 12월 21일오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송지영, 안신규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조용수는 경무대 앞 발포사건과 관련된 곽영주(경무대 경찰서장), 최인규(내무장관), 정치깡패 임화수, 사회당 조직부장 최백근 등과 함께 사형에 처해졌다. 31세의 짧은 생애를 접으면서 민족을 위해서 할 일을 못하고 가는 ‘억울함’과 신문사를 운영하느라 친구에게 빌린 돈을 갚지 못한 ‘미안함’을 유언으로 남겼다.

조용수에게 무죄가 선고된 것은 47년이 지나서였다. 2007년 4월 그의 동생 조용준이 재심을 요청하자 서울중앙지법이 2008년 1월 16일 조용수의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재판부는 “중립화 통일론, 남북 학생회담 지지 등 당시 민족일보가 보도한 기사들이 북한을 찬양했다고 볼 수 없다”며 “전체 기사 내용을 하나의 성격으로 규정해 신문사 대표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판결했다. 다만 특수범죄처벌법이 위헌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1962년 헌법 개정으로 특별법 위헌 여부를 판단할 수 없게 된 만큼 법 자체를 위헌으로 판단하지는 않는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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