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렬하고 현란한 색채로 꿈과 정한의 세계를 환상적으로 그려
천경자(1924~2015 )는 초기 작품에서 나타나는 뱀과 꽃과 여인, 1970년대 초부터 선보인 남국의 풍물들에 이르기까지 강렬하고 현란한 색채로 꿈과 정한의 세계를 사실적이고 환상적으로 그린 화가로 유명하다. 얼핏 화려해 보이지만 사실 그의 작품에는 여인의 고독과 슬픔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사람들 역시 그의 그림에서 삶의 고통, 원죄의 굴레, 여인의 한을 읽어낸다. 그는 그림과 삶이 일치하는 보기 드문 미술 장인이었다. 독특한 색채 이미지와 빈틈없는 구도로 ‘천경자풍’이라는 동양화의 새로운 화풍을 개척했다는 평가도 듣고 있다.
천경자는 전라남도 고흥에서 태어나 광주공립여고보를 졸업한 후 1940년 4월 16살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했다. 1942년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외할아버지를 그린 ‘조부’가 입선하고, 1943년 역시 ‘선전’에서 외할머니를 그린 졸업작품 ‘노부’가 입선하면서 화가 데뷔와 동시에 재능을 인정받았다. 졸업 후 미쓰코시백화점에서 날염하는 천에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하다가 1944년 귀국, 모교인 광주공립여고보의 미술교사로 부임했다.
해방 직후, 일본에서 만난 유학생과 결혼하고 1946년 학교 강당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으나 별 호응을 얻지 못하자 그해 6월 서울로 올라가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여류화가가 드물던 때라 전시회는 주목을 끌었다. 신문들도 앞다퉈 호평 기사를 실었다.
그러나 그 후 몇 년 동안 천경자의 개인사는 슬픔과 아픔으로 점철되었다. 1남1녀를 떠안은 채 이혼해야 했고, 사업 실패로 실의에 빠진 아버지의 죽음을 겪었으며, 폐결핵으로 투병 중이던 여동생마저 떠나보내야 했다. 초혼 실패 후 빠져든 한 유부남과의 사랑도 김씨 성을 가진 남매만 낳았을 뿐 결혼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오직 살기 위해 그린 뱀이 구원의 돌파구
이처럼 정신적으로 피폐해 있던 어느 날 세상 사람들이 징그럽다고 고개를 돌리는 뱀들이 눈에 들어왔다. 천경자는 뱀들을 보며 어머니, 동생들과 살던 셋집에 아침 저녁으로 수많은 뱀이 부엌과 방으로 기어들어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도 그 집을 떠나지 못하고 살아야 했던 가난, 자기에게 고통을 남기고 떠난 뱀띠 애인에 대한 적개심 등을 떠올렸다.
천경자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광주역 앞의 뱀집을 열심히 드나들며 끊임없이 뱀들을 스케치했다. 그 꿈틀거리는 뱀의 동작이 죽음밖에 생각할 수 없었던 자신의 몸부림처럼 느껴졌다. 미술교사 자리도 팽개치고 두 달을 사투한 끝에 청동색 뱀 35마리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똬리를 틀고 있는 ‘생태’(生態·84x60cm)를 완성했다.
1952년 피란지 부산에서 개최한 개인전에 ‘생태’가 걸렸을 때 뜻밖의 관심과 찬사가 쏟아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동안 ‘일본적 채색화’로 폄훼되던 다른 작품도 화단의 주목을 끌었다. 인생의 역경 속에서 오직 살기 위해 그린 뱀이 구원의 돌파구가 된 후, 뱀은 인생의 전환기나 고비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나타나 그녀를 지켜주는 수호신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는 자서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에 이렇게 썼다. “내가 뱀에 대해 오래도록 궁금했고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그 눈이었다. 예로부터 독한 여자나 음모술수를 일삼는 악인의 눈을 뱀눈에 비유했기에 말이다.” 천경자는 부산에서의 성공적인 개인전을 계기로 1955년 봄 홍익대 전임강사로 초빙되어 서울로 올라왔다. 그해 대한미협전에서는 ‘정’으로 대통령상을 수상, 화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천경자는 1969년 프랑스 파리 아카데미 고에쓰 연수를 계기로 해외로 눈을 돌렸다. 9개월 동안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을 거쳐 사모아, 타이티섬 등을 돌아다니며 강렬한 인상의 원시와 자연의 세계에 흠뻑 빠져 부지런히 화필을 움직였다. 그것은 천경자가 맞은 제2의 미술 인생이었다. 1974년 아프리카, 1979년 인도와 중남미, 1981년 하와이 등도 돌아다니며 원색적인 자연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천경자의 그림에 꽃과 여인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70년대였다. 그림 속 여인들은 한결같이 화사한 꽃무리 속에 둘러싸여 있거나 머리에 꽃이 꽂혀 있었다. 천경자는 그레타 가르보나 마릴린 먼로 등 전설적인 여배우들, 혹은 자신의 소학교 때 선배인 길례 언니를 통해 자신이 꿈꾸어오던 선망의 여인들을 화폭에 담았다. 노란 옷을 입고 꽃이 가득 달린 화려한 모자를 쓴 1973년작 ‘길례 언니’를 시작으로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1977), ‘황금의 비’(1982) 등 화려하면서도 서글퍼 보이는 여인 그림을 집중적으로 그렸다.
그림 속 여인들은 1980년대 들어 아름다운 이상향의 여인이 아니라 달콤한 맛이 다 빠지고 쓴맛이 풍기는 여자로 대체되었다. 여인의 눈매는 광기에 찬 매서운 눈초리로 바뀌고 차가운 금속성의 피부를 지닌 강렬하고 섬뜩한 마녀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1991년 엉뚱한 위작 시비에 휘말려
1991년 천경자는 엉뚱한 위작 시비에 휘말렸다. 1991년 3월 말, 국립현대미술관이 현대그룹 사옥에서 ‘움직이는 미술관’ 전시회를 열었을 때 천경자가 그린 적이 없는 5호짜리 ‘미인도'(29X26cm)’ 그림이 천경자가 그린 것으로 떡 하니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림은 4~5배로 확대된 아트포스터로 복사되어 1장당 5만 원에 팔려나갔다.
천경자는 “미인도는 내 작품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미인도’가 위작인 이유로 자신의 화풍과 달리 ▲머리가 검게 개칠되어 있고 ▲그려본 적이 없는 흰 꽃이 화관으로 모델 머리에 쓰여 있으며 ▲연도가 한자가 아닌 아라비아숫자로 쓰인 점 등을 들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그림에서 일반적으로 느껴지는 혼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논란이 불거지자 국립현대미술관이 해명에 나섰다. 미인도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수장해오던 것으로 1979년 10·26 사건 뒤 김재규의 재산이 국가에 환수될 때 재무부와 문공부를 거쳐 1980년 5월 국립현대미술관에 입고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환수 당시 한 유명 미술평론가가 작품을 진품으로 감정하고, 위작 시비가 불거지기 한 해 전인 1990년 금성출판사의 ‘한국근대회화선집’에 미인도가 실렸을 때 천경자가 이를 알고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현대미술관 측의 감정 의뢰를 받은 한국화랑협회 감정위원회도 만장일치로 진품 판정을 내렸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위작 시비는 일파만파로 확대되었다.
천경자는 4월 7일 “창작자의 증언을 무시하는 오늘의 화단 풍토에서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라며 절필을 선언, 격앙된 심정을 표출했다. 이처럼 천경자가 배수진을 치며 항변하자 한국화랑협회는 재감정을 의뢰해 감정위원들로부터 진품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래도 천경자가 계속 주장을 굽히지 않자 한국화랑협회는 4월 11일 3차 감정을 실시한 후 “문제의 미인도가 구도와 기법 등 화풍에서 천경자의 작품과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다”며 미인도가 진품이라는 공식감정 결과를 발표했다. 국립현대미술관도 ‘미인도’ 위작 시비와 관련, “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천씨의 작품은 진품”이라고 최종 발표했다.
천경자는 졸지에 “자식도 알아보지 못하는 어미“로 몰리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몸과 마음도 쇠약해졌다. 결국 작품 활동을 할 기력마저 남아 있지 않자 큰딸이 있는 미국으로 떠났다. 그것으로 한동안 미술계를 뜨겁게 달군 ‘미인도’ 위작 시비는 막을 내리는 듯했다. 그러나 잠잠하던 위작 시비는 사건 후 8년이 지난 1999년 7월 한 전문위조범이 “미인도는 1984년에 내가 그린 3종류의 미인도 가운데 하나”라고 자백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그러나 검찰은 공소시효 기간인 3년이 이미 지난 뒤라는 이유로 수사에 착수하지 않았다.
국립현대미술관은 “8년 전의 감정을 뒤집을 만한 근거가 현재로서는 없다”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로써 ‘미인도’ 사건은 천경자 개인뿐 아니라 한국 미술계에도 커다란 상처를 주고 다시 미궁에 빠졌다.
다시 귀국해 작품 활동을 하던 천경자는 1998년 11월 중대 결정을 했다. ‘생태’, ‘꽃무리 속의 여인’,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등 자신의 대표작 57점과 데생작품 36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무상으로 기증한 것이다. 한국의 화단 풍토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