뱅기타고 세계로

[스위스 유람기, 알프스 산행기 5-③] 고르너그라트, 벨린초나, 리기산, 취리히, 루체른

by 이희용

 

제3부 “스위스, 알프스, 좋았스!”

■넷째날(6월 4일) – “마터는 보고 호른은 못 봤어요”
테쉬-체르마트-고르너그라트-테쉬-보고냐(발그란데호텔)

 

오늘은 꿈에 그리던 알프스 최고의 미봉 마터호른(4,478m)을 보는 날입니다. 파라마운트 영화사 심벌로 잘 알려져 있지만 당초 만들어질 때는 마터호른을 본딴 것이 아니라고 하네요. 테쉬로 이동해 열차를 타고 마터호른의 관문 체르마트로 향합니다. 여기서 열차를 갈아타고 해발 3,100m 높이의 전망대가 있는 고르너그라트로 올라갑니다. 오르는 도중 제가 우리 팀 스위스 구호를 정해 알려줍니다. “스위스, 알프스, 좋았스”입니다. ‘뭉쳐야 뜬다~뱅’보다 낫지 않나요? 건배 구호로도 마침맞고 “스위스, 알프스, 끝났스”처럼 응용과 변주도 가능합니다.

역에서 내리자마자 꼭대기 전망대로 향합니다. 한쪽으로는 만년설을 이고 있는 4,000m급 준봉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데 정작 오늘의 주인공인 마터호른은 구름에 가려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구름이 이리저리 떠다녀 혹시나 하며 목을 빼고 지켜보는데 애만 태웁니다.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마터호른

 

전망대 카페테리아에서 식사를 합니다. 패키지여행 중 이날 점심만 유일하게 각자 알아서 해결하는 겁니다. 1인당 2만원 안팎에서 각자 채소 샐러드나 감자튀김이나 소시지 따위를 접시에 담아 옵니다. 정형이와 태성이는 뜨거운 물만 받아 컵라면을 먹으려다가 물 값만 5천 원을 넘게 받는다는 말을 듣고 포기합니다. 10년 전 융프라우에 갔을 때 온수 값을 받는 줄은 알았는데, 여기서도 그럴 줄은, 또 이렇게 비쌀 줄은 몰랐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보온병을 갖고 와 뜨거운 물을 담아올 걸 그랬습니다.

밥을 먹고 나도 마터호른은 몸을 가린 채 종아리만 살짝살짝 보여주고 맙니다. 여기서부터 로텐보덴역까지 걸어 내려가기로 했습니다. 가끔 눈밭이 나오고 미끄럽기도 합니다. 등산용 스틱을 한국에서 챙겨 오고도 정작 숙소에 놓고 와 아쉽습니다. 여전히 마터호른은 속살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살짝 어깨를 드러내는 듯했다가 다시 가리고 허벅지까지 보여주는 듯하다가 다시 감추고 애간장을 녹입니다. 차라리 시야가 뿌옇게 되면 기대나 하지 않을 텐데, 정말 야속합니다.

고도가 높을수록 전망이 좋은 건 사실이지만 요맘때 알프스를 걷기에는 2,000m 정도가 좋은 것 같습니다. 흙길도 밟고 야생화도 구경하며 가는 길이 재미납니다. 3,000m에 가까우면 3월에 근교 산을 걷는 것처럼 눈길과 흙길이 번갈아 나오고 눈 녹은 진창도 가끔 나타나 걷기가 힘듭니다. 아예 눈길이 더 낫지요.

체르마트에서 테쉬로 다시 내려와 버스를 타자 가이드가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일행들에게 배우는 게 참 많습니다. 오늘도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만한 명언을 들었습니다. 어떤 분께 ‘마터호른 잘 보셨느냐’고 여쭙자 ‘마터는 보고 호른은 못 봤다’고 하더군요. 호른은 소뿔이라는 뜻이어서 마터호른 말고도 쉴터호른이나 브라이트호른 등 호른이 붙은 산이 많습니다. 그런데 소뿔처럼 생긴 마터호른 봉우리를 못 봤다는 거죠. 정말 맞는 말씀입니다.”

 

몸을 가린 채 종아리만 살짝살짝 보여준 마터호른

이젠 남쪽으로 가며 이탈리아 국경을 넘습니다. 한니발이 코끼리 부대를 몰고 넘어 로마인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든 그 길일까요? 아니면 나폴레옹이 “이 산이 아닌가벼, 이 산도 아닌가벼, 아까 그 산인가벼” 하고 헤매며 부대원들을 뺑뺑이 돌렸던 그 길일까요? 꼬불꼬불 산길을 달려 고갯마루에 섰습니다. 독수리상이 보이는데 누가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모른다고 하네요. 전문 가이드가 아니어서 아쉬울 때가 가끔 있습니다.

이탈리아 국경으로 가기 전 지나는 협곡 위 다리

 

가이드는 “제가 이탈리아 가이드를 했으면 고생할 뻔했어요. 오랜 역사를 알아야 하니까요. 그런데 스위스는 역사가 길지 않고 자연 경관이 관광 포인트여서 편해요”라고 노골적으로 말합니다. 스위스 역사도 좀 더 알면 좋을 텐데….

국경을 넘으니 분위기가 다릅니다. 도로 정비를 제대로 안 한 탓인지 길바닥도 울퉁불퉁하고 파스타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 이탈리아로 숙소를 정했을 텐데, 유럽에 처음 오거나 이탈리아를 한 번도 안 왔던 친구들은 방문국 수가 늘어난다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음식으로 유명한 이탈리아답지 않게 저녁식사는 영 꽝입니다. 토마토 소스를 버무린 스파게티를 주는데 남긴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아예 컵라면을 가져와 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일 아침에도 스파게티를 준다고 하니까 걱정스럽습니다.

 

■다섯째날(6월 5일) – 구름 위에 오른 뒤 들어간 알몸 혼탕
보고냐-벨린초나-루체른(뤼틀리)-리기산-취리히(호텔콘티)

 

이른 아침 길을 나서니 길은 한산합니다. 다시 국경을 넘어 성곽도시 벨린초나에 들렀습니다. 이곳은 이탈리아어 사용 지역입니다. 15세기에 건립된 3개의 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고 합니다. 고풍스럽고 한적한 분위기가 마음에 듭니다. 성 망루에 올라 내려다보는 풍경이 그림 같습니다. 망루 계단 벽에 뚫어놓은 십자 모양 틈새로 보이는 경치도 재미납니다.

아침 일찍 서둘러 시간이 남아서인지 루체른 근처 뤼틀리라는 작은 마을에 내려줍니다. 예정에 없던 곳이지만 스위스 3개의 칸톤이 처음 연방을 맺기로 맹약한 역사적인 장소라네요.

비츠나우역으로 이동해 리기산에 오르는 산악열차를 탑니다. 빗방울이 간간이 내리고 주변이 안개로 휩싸여 일행들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합니다. 1,800m 리기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13개의 호수 풍경이 일품이어서 ‘산들의 여왕’이라고 불린다는데 호수는커녕 100m 앞도 안 보일 지경입니다.

리기산은 산악열차를 타고 위 리기쿨름역에서 내려 10-15분 정도 걸어올라가야 한다.

 

정상 바로 못 미쳐 역에 내려 식당으로 들어갔습니다. 식당 분위기가 꽤 고급스럽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잘못 들어왔다고 합니다. 기차로 한 정거장 다시 내려가 다른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한국 관광객 팀이 “여기까지 왔는데 제대로 경치도 못 보고…”라며 혀를 끌끌 찹니다. 우리 팀 구호가 “스위스, 알프스, 망했스”로 바뀌는 순간이었죠.

식사를 마치고 다시 기차로 한 정거장을 올라갑니다. 거짓말처럼 구름이 걷혀가고 있습니다. 호수까지 내려다보이는 건 아니지만 발아래 구름이 깔리고 멀리 설산 봉우리들이 물결치고 있습니다. 구호가 ‘좋았스’로 다시 바뀌는 대목입니다.

정상으로 서둘러 올라갔습니다. 한국 젊은이로 보이는 남자 한 명과 여자 두 명이 ‘점프샷’을 찍고 있네요. 사진을 찍은 뒤 와인을 꺼내 병째로 돌려가며 정상주를 마십니다. 갑자기 후회가 밀려오며 자책했습니다. “지난 1월 가족여행을 할 때 스페인 바르셀로나 벙커에서 야경을 보며, 포르투갈 땅끝마을 호카곶에서 대서양의 파도를 응시하며 캔맥주를 들이켰는데, 이번에는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융프라우 갈 때는 맥주나 소주를 꼭 가져가서 정상주를 마셔야겠습니다.

우리도 점프샷을 찍으려고 한국에서 온 젊은 친구들한테 부탁합니다. 동작을 맞추기 어려울 줄 알았는데 한국 친구는 연속촬영을 한 뒤 고르라고 합니다. “아하! 그러면 되는구나.” 젊은 친구들에게 새롭게 배우는 게 많습니다. 사실 찍을 때는 힘들고 남 보기 창피하지만 막상 찍어놓고 보면 그럴 듯하고 재미납니다.

리기산 정상에서 중년 남성들의 점프

 

리기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호수 풍경 일품… ‘산들의 여왕’으로 불려

내려오다가 온천 스파에 들릅니다. 온천 풀도 있고 우리 식 대중탕 욕조도 있고 사우나도 있는데 사우나가 알몸으로 들어가는 혼탕입니다. 온천 풀에서 수영도 하고 ‘뭉쳐야 뜬다’ 멤버들처럼 수중 닭싸움도 펼칩니다. 제가 3연승으로 수중 닭싸움 지존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제 누드존에 갈 차례입니다. 우리 일행 세 명이 테라피존과 크리스털탕을 지나 누드존 문 앞에 이르렀습니다. 친구 A(본명 대신 A, B, C로 별칭)가 “별 볼 일 없네”하고 나가자고 합니다. 젊은 여성이 없는 탓이죠. 사우나 안에 있던 사람들이 우리더러 “별 볼 일 없는 것들이 별꼴이네”라고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가다 보니 비교적 젊어 보이는 커플이 들어옵니다. 친구 B와 저는 뒤로 돌아 따라 들어갔습니다. 안경을 나무걸이에 걸어놓고 수건을 든 채 들어갔습니다. 중요 부위를 수건으로 가리니 청소하는 여자 관리인이 수건을 치우라고 손짓합니다. 수건을 바닥에 깔고 발을 얹으니 또 뭐라고 합니다. 수건을 깔고 그 위에 누우니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때 여성 관리인이 옆에 앉은 친구 B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굿”이라고 했다는데, B는 나중에 “나는 처음부터 시키는 대로 잘했다는 뜻인지, 아니면 내 물건을 보고 ‘엄지 척’한 것인지 모르겠더라”라고 너스레를 떱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 여자가 B의 물건을 보고 엄지와 크기가 비슷하다고 놀린 것 같기도 합니다. 사우나에서는 몸에 흐르는 땀이 나무로 만든 의자나 바닥 등에 묻으면 다른 사람이 불결하게 느낄 수 있으니 수건을 깔고 그 위에 앉거나 누우라는 뜻인 듯합니다. 젊은 여자 한 명이 또 들어옵니다. 아무 거리낌 없이 수건을 깔고 길게 눕습니다. 안경을 바깥에 두고 온 것이 후회스럽네요.

혼탕의 나라 독일에서 두 차례나 1주일씩 머물렀을 때도 못해본 문화 체험을 이번에 제대로 했습니다. 우리 말고는 팔선녀나 다른 부부들도 모두 누드존에는 안 들어오더군요. 저도 아내와 왔다면 당연히 그랬을 것이고 아내도 다른 여성 일행과 왔다면 그랬겠지요. 크리스털탕에 잠시 몸을 눕힌 뒤 샤워를 하고 몸을 말립니다. 이곳에선 물론 수영복을 입고 있는데 남녀가 함께 쓰니 기분이 묘합니다. 알몸으로 들어가는 샤워실의 칸막이는 간유리로 돼 있어 옆에 있는 사람의 실루엣이 그대로 보입니다. 탈의실만 폐쇄형 구조입니다.

 

누드존 여성 관리인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굿”이라고 한 것을 두고 친구들 해석 제각각

이제는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갑니다. 케이블카 창 밖 풍경도 온통 뿌연 빛깔이다가 다 내려올 때쯤 겨우 호수가 보입니다. 우리나라에 가장 긴 케이블카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1.75㎞의 밀양 얼음골 케이블카라고 합니다. 통영 미륵도의 삭도 길이가 1.97㎞로 가장 긴 것으로 알려지긴 했지요. 얼음골 케이블카 사업자의 주장에 따르면 케이블카는 한 대, 혹은 두 대의 운반기구가 두 지점을 왕복하는 것을 말하므로 통영 것은 곤돌라이고 케이블카로는 자기네가 가장 길다고 합니다.

나중에 궤도운송법 시행규칙을 찾아봤습니다. 왕복식 삭도, 자동운항식 삭도, 고정운항식 삭도, 견인식 삭도, 케이블철도(푸니쿨라), 노면전차(트램), 모노레일, 자기부상열차, 철제차륜형 경전철, 고무차륜형 경전철, 선형유도전동기형 경전철 등 모두 11가지로 구분하고 있더군요. 아마도 왕복식 삭도와 운항식 삭도를 구분해 최장 랭킹을 따진 것 같은데, 그게 일반인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네요.

그런대로 만족스러운 하루였습니다. 마터호른은 날씨로 보아 온전한 모습을 볼 줄 알았는데 그러지 못해 아쉬웠고, 리기산은 못 볼 줄 알았다가 구름 낀 풍경이라도 보니 다행스럽습니다. 역시 만족도는 기대감과 반비례하고 행복이란 마음에 달려 있다는 걸 또 한 번 깨닫습니다. 금세 까먹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숙소는 취리히입니다. 다시 루체른으로 올 텐데 이 근처에는 숙소와 식당이 비싼 모양입니다. 여행 동선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래도 창 밖 풍경이 볼 만하고 버스로 두 시간 넘게 달린 적이 없으니 참을 만합니다. 터키에서는 7~8시간씩 황량한 들판을 달려 무척 지루했거든요.

오늘은 갑표와 함께하는 마지막 날이어서 호텔방을 벗어나 바에서 한잔 하려고 하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갈 데가 없습니다. 호텔 바도 오늘이 성령강림대축일이어서 쉰다고 합니다. 호텔방에 둘러 앉아 양주 병뚜껑을 따고 소주팩을 기울입니다. 주고받는 노래 가락 속에 취리히의 밤은 깊어가고 양주병은 바닥을 드러냅니다.

 

■여섯째날(6월 6일) – 갑표는 서울로 날아가고 상호는 튀니지에서 날아오고
취리히-샤프하우젠-루체른-인터라켄(시티호텔 오버랜드)

 

벌써 패키지여행 마지막 날입니다. 오늘 저녁이면 갑표와 헤어져야 합니다. 패키지 일행은 취리히에서 루체른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취리히공항으로 와야 합니다. 저희는 인터라켄으로 가야 하는데 취리히까지 다시 가면 거리가 더 멀어집니다. 퇴근 시간이어서 취리히 중앙역까지 버스로 데려다 주기도 힘들다고 합니다. 그래서 루체른역에서 헤어지기로 했습니다. 원래 패키지는 일정을 단축해 다른 곳으로 가면 안 된답니다. 일정 안에 문제가 생기면 여행사가 곤란해질 수 있기 때문이죠.

여행 일정에 포함된 방문지 가운데 관광객이 원해서 빼자고 해도 각서를 받아야 합니다. 나중에 항의할 수 있기 때문이죠. 전날 스파에서도 온천욕을 하지 않겠다는 사람은 가이드에게 “내가 원한 것이니 문제 삼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썼습니다.

취리히 시내 관광에 나섰습니다. 리마트강이 가로지르는 가운데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짜임새 있게 들어서 있습니다. 종교개혁가 츠빙글리가 설교하던 장크트페터 교회 앞에 츠빙글리 동상이 서 있습니다. 맞은편에는 가장 큰 시계가 있다는 성모교회(프라우뮌스터)의 초록색 첨탑이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UBS와 크레디트 스위스 등 유명 은행의 본사가 있고 명품 상점들이 늘어선 반호프 거리를 지나 장터로 향합니다. 과일과 채소, 꽃 등을 주로 팝니다.

독일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샤프하우젠으로 가 유럽에서 가장 크다는 라인폭포를 구경합니다. 유람선을 타고 가까이 다가가니 물보라가 얼굴을 때립니다. 규모가 엄청난 것은 아니지만 바로 눈앞에서 보니 거대한 수량의 움직임이 박진감 넘칩니다.

유럽에서 가장 크다는 라인폭포

 

점심은 독일 국경을 지나 중국음식점에서 먹습니다. 가이드 얘기에 따르면 스위스 사람들이 자동차를 타고 물가가 싼 독일로 넘어와 생필품을 많이 사간다고 합니다. 무관세로 가져갈 수 있는 수량과 품목에 제한이 있어 가끔 단속에 걸린다고도 합니다. 자유투어는 밥값을 아끼려고 국경을 넘습니다. 점심 식사는 한국의 중국음식만큼은 아니지만 그런 대로 먹을 만합니다.

 

루체른에서 ‘빈사의 사자상’과 카펠교 구경

마지막 관광지는 루체른입니다. ‘빈사의 사자상’과 한때 가장 긴 목조다리였다는 카펠교를 구경합니다. 빈사의 사자상은 생각보다 크더군요. 프랑스혁명 당시 스위스 용벙 786명은 성난 혁명군에 맞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를 지키려다가 전멸하고 맙니다. 스위스 용병을 상징하는 사자가 창에 찔린 채 부르봉 왕가를 상징하는 백합 문장이 새겨진 방패를 부둥켜안고 죽어가는 모습이죠.

빈사의 사자상

 

가이드 설명으로는 약속한 돈을 제대로 받지 못해 화가난 독일 조각가가 루체른 시민을 조롱하려고 사자 모습을 양각하기 위해 바위를 파서 만든 테두리 형상을 돼지 모양으로 만들었다는 겁니다. 듣고 보니 그렇게 생겼네요.

이 일 이후 스위스는 젊은이들을 용병으로 보내는 일을 중단했고 용병의 전통은 현재 바티칸 교황청의 근위병에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것보다는 18세기 이전까지는 먹고살기 힘들어 용병으로 내보내다가 그 뒤 살 만해지니까 중단한 게 진짜 이유 아닐까요?

카펠교는 강 양안을 연결하는 최단거리로 세운 게 아니라 사선으로 만들어놓았습니다. 최대 다리 기록을 세우기 위해서였을까요? 누구는 물살 때문에 만들다보니 사선으로 된 게 아닐까 하던데,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보통 사선으로 다리를 놓는 이유는 기존 도로들과의 연결을 고려하기 때문인데, 지금 길로 보면 그것도 아닙니다. 옛날 길과 달라진 걸까요?

목조다리 카펠교

 

이제 루체른 호수 주변 풍경을 감상하는 유람선에 오릅니다. 왼쪽으로는 우리가 올랐던 리기산이 솟아 있고 오른쪽으로는 필라투스산이 펼쳐져 있습니다. 스위스는 산속이든 호숫가든 어디엘 가나 잘 정돈돼 있고 깨끗합니다. 사람들도 야무지고 치밀해 정밀공업이 발달한 것 같습니다. 루체른 호수 유람을 마치고 버스로 루체른역을 향합니다. 버스는 우리를 역 앞에 내려주고 취리히공항으로 갈 겁니다.

 

스위스는 산속이든 호숫가든 어딜 가나 잘 정돈돼 있고 깨끗해

내리기 전에 버스 일행들에게 하직 인사를 했습니다. 혼자만 보내는 갑표도 잘 챙겨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여행 중 이미 알게 된 사람도 일부 있었지만, 우리끼리 남아서 융프라우를 간다고 하니까 다들 “와!”하고 탄성을 지릅니다. 남자들끼리만 가는 것을 두고 “아마 간뎅이가 부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듯합니다. 정형이가 특별 인사를 건네며 “저희는 고산지대에 가야 하니 비아그라를 가지고 갑니다”라고 말하니 버스 안이 웃음바다를 이룹니다. 오후 5시 30분께 루체른역에서 상호를 만났습니다. 상호는 외국생활을 오래하고 지금은 튀니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걱정이 물밀 듯이 밀려옵니다. 지금까지 패키지여행에서는 말이 좋아 대장이고 리더지 사실은 ‘이희용 외 6명’의 조장이었을 뿐입니다. 제가 결정할 일이라고는 ‘몇 시까지 어느 방에서 모여 술을 마시자’거나 ‘오늘은 무슨 양주룰 마실까’ 등에 불과했고, 우리끼리 의견이 충돌할 일도 별로 없었지요.

이제부터는 알프스 원정대원의 대장이어서 여행(원정)의 성패를 좌우할지도 모르는 중요한 결정을 제가 내려야 합니다. 친구들의 얼굴에도 긴장감과 비장함이 흐르는 듯합니다. 각자 역할을 점검하며 대원들의 임무 완수를 다짐합니다. 다행히 상호가 있어 마음이 든든합니다.

두 시간을 달려 인터라켄 동역에 도착했습니다. 호텔까지 도보로 15분가량 걸리는데 캐리어를 끌고 가려니 멀어 보입니다. 맨 앞에 걸어가며 혼자 인터라켄 서역까지 간다는 젊은이와 동행했습니다. 40일 예정으로 유럽을 혼자 여행하던 중 물가가 비싼 스위스에서는 2박3일 잡고 융프라우와 쉬니케플라테를 갔는데 이틀 내내 날씨가 흐려 아무것도 못 보고 열차만 타고 다녔다고 투덜댑니다. 얼마나 아쉬웠을까요. 내일부터는 날씨가 좋다고 하니 우리는 행운아들입니다. <계속>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