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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유람기, 알프스 산행기 5-①] 모의, 계획, 준비, 출국

 by 이희용

 

제1부 중년 사내들의 작당 모의

■ 모의 : 쭉쭉빵빵 금발이 가이드로 나온다는 말에 홀려

먼저 멤버 소개부터 하겠습니다. 대학 동기들끼리 매달 산에 가는 모임이 있는데, 굳이 따지면 성균관대 민주동문회 80학번 산악회입니다. 이번에 스위스 유람을 하고 돌아온 친구들의 구성원은 8명으로 김정형 김태성 김현근 박동규 오영수 이희용 정상호 홍갑표(가나다순)입니다. 전공도 다르고 하는 일도 다릅니다. 친소 관계는 있지만 이런저런 끈으로 다 연결돼 친분이 있고 잘 알고 지내던 사이입니다. 이념적으로도 공통점이 많았는데 이젠 세월이 흘러 약간의 차이가 생기기도 했지요.

이야기를 처음 꺼낸 건 태성이었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매달 가까운 산에 가고 1년에 한두 차례 서울에서 먼 곳으로 원정 산행을 다니다 보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도 해외 원장 한번 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말이 나왔지요.

그런데 태성이는 콕 짚어 “EBS의 알프스 몽블랑 트레킹 방송을 보니 프랑스에서 이탈리아 거쳐 스위스로 가는데 경치가 끝내주더라. 그리고 현지 가이드가 금발에 쭉쭉빵빵 여인인데 정말 매력적이야. 우리 함께 가지 않겠니?”라고 제안했습니다.

다들 금발에 쭉쭉빵빵이란 말에 홀려 동의하고 말았지요. 뒤늦게 “방송이니까 그런 미인이 나온 것 아니겠느냐. 우리가 간다고 그 가이드가 나온다는 보장이 있느냐”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제기하는 친구도 있었지만 이미 알프스에 꽂힌 우리의 마음을 되돌리긴 역부족이었습니다.

태성의 계획은 치밀했습니다. “우리가 5년 동안 매달 5만 원씩 적금을 붓는 거야. 지금 제로 금리 시대여서 대출을 내서 가나 적금 부어 가나 돈에는 큰 차이는 없겠지만 마음가짐이 다르지. 한꺼번에 목돈 마련하는 건 아무래도 부담스럽기도 하고. 또 혹시 아내가 반대하더라도 ‘내가 안 가면 그동안 부어온 곗돈을 떼일 수밖에 없어’라고 말하면 보내줄 거야.” 다들 고개를 끄덕이는데 누가 끼어듭니다. “우리도 이제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나이야. 5년은 너무 길지 않니? 10만 원씩 3년에 짧게 끝내자.” 그 말도 맞는 듯합니다.

우리는 2014년 1월 무등산에서 희용, 태성, 영수, 동규, 현근, 정형 6명이 그달부터 10만 원씩 곗돈을 내기로 합의했습니다. 1년쯤 지난 뒤 갑표가 합류해 계획이 구체화됐습니다. 각자의 바쁜 일정을 피하고, 성수기가 시작되는 대학교 여름방학 전에 떠나기 위해 6월 초로 합의했습니다.

 

■ 계획 : 트레킹이냐 유람이냐, 패키지냐 자유여행이냐?

태성이가 EBS에서 본 프로그램은 몽블랑 트레킹이었습니다. 딱히 몽블랑은 아니더라도 알프스를 걷는 것이 당초 콘셉트였죠. 그런데 체력 문제 등을 들어 난색을 표시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1주일 이상 매일 7~8시간씩 걷는 것은 나머지 친구도 모두 부담스러워 했죠. 처음 유럽을 가보는 친구도 있는데 모든 일정을 산기슭에서만 보내는 게 아쉽다는 의견도 있었죠.

전문 알프스 트레킹 여행사의 패키지 프로그램인 ‘투르 드 몽블랑 트레킹’이나 ‘3대 미봉(몽블랑․마터호른․융프라우) 트레킹’은 가격이 일반 스위스 패키지 프로그램보다 훨씬 가격이 비싼 것도 문제였습니다.

여행사에 알프스 트레킹 4~5일과 유럽 도시 4~5일 프로그램을 짜줄 수 있는지 묻자 “가능하긴 하지만 가격이 더 올라갈 뿐 아니라 7명이면 쉽지 않겠다“는 답변을 들었지요. 한 후배가 “스위스에는 길 표지판도 잘돼 있어 형들 정도면 얼마든지 자유여행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솔직히 열흘을 모두 자유여행으로만 채우는 것은 자신이 없었습니다.

더욱이 유럽을 가장 많이 가봤다는 내가 리더라고 하니 내 영어 실력을 잘 아는 아내와 딸이 극구 말립니다. 그렇다고 멤버들이 이 도시 저 도시 옮겨다니며 주마간산식으로 ‘인증 샷’ 찍고 다니는 패키지로만 다니는 것은 반대합니다. 며칠이라도 우리끼리 함께 지내며 자유롭게 다니고 추억을 만들기를 바랍니다. 알프스 잠깐 찍고 다른 도시(이를테면 로마나 파리나 비엔나)를 구경하는 방안도 떠올려봤으나 이왕 가는 거 스위스에 집중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나라 전체가 초록으로 뒤덮인 스위스의 자연풍경. 가는곳마다 이런 자연이 지천이다.

 

다행히 선택지가 하나 생겼습니다. 사실 스위스는 물가가 비싸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문 트레킹 상품이 아니면 스위스만 도는 패키지 상품이 없었습니다. 유럽 4개국이나 유럽 5개국 여행 패키지에 융프라우 찍고 오는 1박2일 일정을 끼워넣는 방식이었죠. 지금도 한 달 이상 배낭여행을 하는 젊은 친구들도 스위스는 2~3일만 들렀다 갑니다. 그런데 2013년 tvN ‘꽃보다 할배-프랑스․스위스’ 편에서 루체른과 체르마트-마터호른 등이 인기를 끌자 스위스 관광객이 늘어나고 1주일짜리 스위스 일주 패키지가 생긴 거지요.

더욱이 2017년 1~2월 JTBC ‘뭉쳐야 뜬다’ 스위스편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자 이 프로그램의 스폰서인 하나투어 말고도 여러 여행사가 비슷한 상품을 앞다투어 내놓았던 겁니다. 그래서 6박7일짜리 스위스 패키지 상품에 4박5일 트레킹 자유여행을 결합하는 일정을 짜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비용은 모든 일정을 패키지로 하는 것보다 비싸지지만 둘의 장점을 다 살리기로 한 것이지요.

우리는 대한항공 취리히 직항편으로 2017년 6월 1일 출발해 7일 인천공항에 도착하는 패키지 상품을 7명 예약한 뒤 6명은 귀국 항공편을 4일 늦춰 11일 도착하기로 했습니다. 나머지 1명인 갑표는 대학 강의를 2주나 빠질 수 없어 다른 패키지 관광객과 함께 6박7일 만에 먼저 귀국하기로 했습니다.

일정을 4일 늦춘 6명은 융프라우 VIP 패스의 한국 총판을 맡고 있는 동신항운을 통해 취리히~인터라켄 왕복 열차편, 인터라켄 호텔 하루 숙박권, 융프라우 그린델발트 다운타운 롯지(게스트하우스) 3일 숙박권, 융프라우 VIP 패스를 일괄 구입했습니다.

 

■ 준비 : “빨주노초파남보 색으로 단체 티셔츠 입고 갈까?”

전체 비용은 자유투어 패키지 금액이 289만 원에 멤버십 쿠폰 2% 할인받아 283만2천 원, 가이드·운전기사 팁 130스위스프랑, 옵션관광(고르너그라트 열차) 100스위스프랑, 동신항운에 턴키로 예약한 자유여행 숙소 열차편 등이 인당 74만 원, 이밖에 인천공항 식사비, 양주(5병) 구입비, 자유여행 식사비, 슈퍼마켓 물품 구입비 등이 들었습니다. 모두 따져 곗돈 371만5천 원에 추가로 80만 원씩 냈으니 451만5천 원의 공통비용을 쓴 셈이지요. 여기에 소주나 라면 등을 각자 사 갖고 간 비용, 선물 구입비, 맥주 한 잔씩 사 마신 돈 등이 얼마씩 더 들었습니다.

유럽 여행을 떠나는 젊은이들이 필수로 가입한다는 카페 ‘유랑’에도 들어가 후기 등을 읽어보았습니다. 170만 명이 넘게 가입했다는 유랑(http://cafe.naver.com/firenze)은 정말 대단하더군요. 여행 파트너나 숙박 파트너를 구하는 글이나 여행 일정이 적절한지 묻는 글을 올려 공유하는 건 물론 어디에 지금 비가 온다, 누가 소매치기를 당했다, 어떤 식당 음식이 맛이 없다, 어떤 박물관은 지금 수리 중이어서 휴관이다, 고르너그라트 올라가는 열차 탈 때는 왼쪽 창가에 앉는 게 좋다 등의 실시간 정보가 속속 올라옵니다.

쉬니케플라테에 6월 8일 올라갔다가 하산하는 친구들. 발걸음이 가벼워보인다.

 

처제는 우리 일행이 7명인 것을 알고 단체 티셔츠를 맞춰 입고 가라고 합니다. 기왕이면 빨주노초파남보 각기 다른 색깔을 입으라고도 하네요. 금발에 쭉쭉빵빵 가이드를 만난다면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와 똑같은 숫자가 될 겁니다.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폰 트랍 대령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온 수녀원 출신의 마리아는 일곱 남매에게 노래를 가르쳐줍니다. 저희도 7명이 알프스 초원에서 도레미송을 불러보는 상상도 해봅니다.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자문 의견을 위해 후배를 만났는데 이런 조언을 하더군요. “원로 농구인 김영기 씨가 친구들과 패키지여행을 다니다가 노인들은 화장실도 자주 가고 걸음도 늦다며 여행사가 박대를 하니 따로 다닌 지 꽤 됐다고 합니다. 그런데 패키지 때는 의견 다툼이 별로 없다가 자유여행을 하니 의견 충돌이 잦아 갈 때마다 각서를 쓴다고 합니다. 논의는 활발하게 하되 결정이 이뤄진 뒤에는 리더의 지시에 따르고 만일 이를 어기면 벌금을 낸다고 서약하는 것이죠. 형들도 꼭 그러는 게 좋을 거예요.”

수긍이 가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친구들에게 각서를 쓰자고 제안하기도 민망한 노릇이었습니다. 다른 대원들도 “우리가 대장 말 잘 따르면 되지, 뭘 각서까지…”라며 쑥스러워 합니다. 저도 “혹시 문제가 생기면 다음 여행부터 각서를 쓰기로 하거나 문제를 일으킨 친구는 빼고 가면 되지”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논의는 민주적으로, 결정은 독재적으로’ 하겠다고 선언하며 각서가 없어도 순명과 복종을 맹세해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 패키지 첫날(6월 1일) – 스위스에서 맞닥뜨린 한국 칠공자와 팔선녀
인천국제공항-취리히국제공항-숙소(홀리데이인 익스프레스 취리히 에어포트)

드디어 여행 날이 밝았습니다. 2017년 6월 1일 인천공항을 출발해 12시간 비행 끝에 취리히 공항에 내렸습니다. 지금부터 가슴이 떨리는 순간입니다.

패키지 일행 27명 가운데 우리가 7명이어서 최대 계파인 줄 알았는데 8명이 함께 온 여성 팀이 있습니다. 이른바 팔선녀 팀. 경기도 광주에서 온 팀으로 아이가 한 유치원에 다녀 친해진 사이라고 합니다. 평균 나이는 우리보다 좀 많은 듯합니다. 중년 부부가 4쌍, 한 팀은 중년 부부에 아들 하나. 중년 여성 혼자 온 사람도 있습니다.

혼자 여성은 내리막길을 뒤로 돌아서 내려갈 정도로 무릎이 좋지 않아 보이는데, 남편이 여행을 즐기지 않아 가끔 혼자 다닌다고 합니다. 우리 칠공자와 팔선녀의 밀당 게임은 패키지 내내 계속됩니다. 비행기에서 두 끼에 간식까지 먹었다고 저녁은 안 줍니다. 공항 인근의 호텔로 데려다주는데 주변에 아무것도 볼 게 없습니다. 호텔은 공항 이용객을 위한 전형적인 중급 수준입니다.

우리가 쓸 방 세 곳을 확인한 뒤 곧바로 잠자리 배정을 위한 첫 사다리 게임에 들어갔습니다. 방 전체에 활시위를 힘껏 당겼다가 놓기 직전의 팽팽한 긴장감이 흐릅니다. 전체 여행 기간의 운을 가늠할 중요한 순간입니다. 대부분 친구들은 3인실 보조침대보다 코를 고는 저와 룸메이트가 되는 걸 걱정하는 눈치입니다. 3인실의 보조침대를 보니 매트리스만 바닥에 놓여 있어 데미지가 적지 않을 듯합니다.

첫 불운의 주인공은 정형. 그것도 코골이 저와 룸메이트가 됐습니다. 나머지 한 명은 영수입니다. 태성과 동규, 갑표와 현근이 한 방을 쓰기로 정해졌습니다. 정형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합니다.

정형이가 키를 다시 받으러 프런트에 내려갔다가 희소식을 갖고 돌아옵니다. 오늘 운전기사가 집으로 갔다가 아침에 오기 때문에 기사 방이 비었으니 그 방을 우리더러 쓰라고 했답니다. 저보고 대장이니까 독방을 쓰라고 합니다. 대접해준다는 느낌보다 왠지 격리 수용되는 느낌입니다.

잠자리는 정해졌고 갑표와 현근 방에 모였습니다. 먹거리를 정리해 보니 태성이가 봉지라면 10개, 동규가 소주 40팩, 제가 비빔면 6개와 신라면 3개와 볶음김치 24봉과 멸치볶음과 스팸과 깻잎통조림, 갑표가 짜왕 5개(봉지면으로 사오랬더니 컵면을 사왔네요)와 고추장과 각종 통조림과 스팸, 정형이가 큰 컵라면 10개(부피를 줄이기 위해 용기와 면을 분리해 가져왔네요)와 김, 현근이가 육포와 오징어포와 믹스너츠와 껌, 영수가 햇반 20개와 고추장 등을 가져왔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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