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박용만의 국민군단 창설과 이승만과의 갈등

박용만, 군사력을 양성해 무력으로 독립 쟁취해야 한다고 주장

공식적으로 기록된 한인의 하와이 정착은 1903년 1월 13일 93명의 한국인 이민자가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한인 이민은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계속되어 그 수가 6,700여 명에 달했다. 이들 이민 1세대는 사탕수수 재배나 관개 사업 등 힘든 일을 하면서도 지역별·종교별 친목단체를 만들어 풍전등화에 놓인 조국의 현실을 걱정했다. 여러 개로 난립하던 단체들은 1907년 9월 ‘한인합성협회’로 통합한 뒤, 안창호가 1905년 4월 미국 본토에서 결성한 ‘공립협회’와 다시 통합해 1909년 2월 1일 ‘국민회’로 새롭게 출발했다.

국민회는 1910년 5월 다시 ‘대한인국민회’로 개칭하고 1911년 샌프란시스코에 중앙총회를, 산하에 북미 지방총회와 하와이 지방총회 등을 설치하는 것으로 조직을 확대했다. 하와이 지방총회는 조직 강화를 위해 1912년 12월 본토에서 활동하는 박용만(1881~1928)을 초빙했다.

박용만은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숙부인 박장현의 보살핌을 받으며 서울의 관립 일본어학교를 졸업했다. 1895년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교 과정을 마치고 게이오의숙에서 2년간 정치학을 공부했다. 귀국 후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보안회에서 활동하면서 계몽운동을 벌이던 중 1904년 7월 일제의 황무지 개척권 반대 투쟁을 전개하다가 투옥되었다. 그때 옥중에서 6살 연상의 이승만(1875~1965)을 만나 의형제를 맺었다.

출옥 후 박용만은 숙부인 박장현 대한제국 순회공사를 따라 이승만의 아들 태산(아명 봉수)을 데리고 1905년 2월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당시 이승만은 고종의 밀지를 미 대통령에게 전달하기 위해 1904년 11월 도미한 이래 계속 미국에 머물고 있었다. 박용만은 정한경(14세)과 유일한(10세) 등도 데리고 갔는데 미국 도착 후 이들과 함께 네브라스카주 커니시에 정착했다. 박용만은 링컨고를 거쳐 1906년 헤이스팅스 군사학교에서 군사학을 배우고 1908~1912년 네브라스카대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일찍이 독립운동의 방향을 무력 투쟁에서 찾았던 그는 1909년 6월 학생 신분으로 네브라스카의 한 농장에서 ‘한인소년병학교’를 창설했다. 소년병들은 학기 중에는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방학이 되면 입소해 군사훈련을 받았다. 소년병학교는 1912년 배출한 12명을 비롯해 일본의 항의로 1914년 폐교될 때까지 6년간 90여 명의 생도를 훈련시켰다.

박용만은 1911년 샌프란시스코 대한인국민회의 기관지 ‘신한민보’의 주필을 거쳐 1912년 12월 하와이 지방총회의 기관지 ‘신한국보’ 주필로 활동했다. 박용만의 영입으로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는 하와이 주정부의 묵인 하에 경미한 범죄 사건에 대해서는 사법권을 행사하는 정도의 자치권을 확보했다.

 

국민군단 첫 입대자는 103명

박용만은 하와이 국민회를 더욱 체계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1904년 한성감옥에 함께 투옥되었던 옥중 동지 이승만을 1913년 2월 하와이로 초청했다. 1905년 박용만이 미국으로 건너갈 때 이승만의 옥중 원고 ‘독립정신’을 가져가고 이승만의 유일한 혈육이자 7대 독자였던 이태산을 미국으로 데리고 갈 정도로 두 사람의 관계는 돈독했다. 이승만 역시 1912년 한인소년병학교 제1회 졸업생들을 직접 축하·격려해줄 정도로 둘의 우애는 깊었다.

이승만은 1913년 2월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직후 하와이 감리교가 설립한 한인기숙학교 교장직을 맡아 그해 9월 이름을 ‘한인중앙학원’으로 개명했다. 1913년 9월 20일에는 월간 ‘태평양잡지’를 창간해 주필로 활동했다. 그는 ‘태평양잡지’를 통해 한인중앙학원과는 별개로 새 한인학교를 설립할 계획이라고 발표하고 먼저 학교 근처에 여학생 기숙사를 마련했다. 그러던 중 1914년 6월 10일 박용만이 자신의 무력 투쟁 노선을 구체화하기 위해 대조선 국민군단과 장교 양성을 위한 사관학교를 창설하면서 둘의 관계가 비끗거리기 시작했다.

국민군단의 병영은, 하와이 오아후섬 북쪽 지역의 1,200에이커(147만 평) 파인애플 농장을 임대해 사용하고 있는 박종수로부터 제공받아 1914년 8월 29일 낙성식을 치렀다. 박용만은 국민군단 사령관과 사관학교 교장을 겸했다. 국민군단에 처음 입대한 젊은이는 모두 103명으로 많을 때는 311명이나 되었다. 단원들은 병영에 기숙하면서 낮에는 파인애플 농사를 짓고 오후에는 군사훈련과 학습을 병행했다.

이승만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은 1914년 12월 9일 목조 2층 건물의 하와이 국민회의 회관 낙성이었다. 하와이 국민회의 재정이 넉넉지 않아 한 곳만 지원해도 될까 말까 한 상황에서 국민회관을 건립하게 되면 자신이 추진하는 학교 설립이 자칫 물거품이 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국민군단 설치와 국민회관 공사로 자신의 학교 설립 운동이 차질을 빚게 되자 ‘태평양잡지’에 국민회 집행부를 규탄하는 장문의 논설을 실었다. 이승만의 주장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있어 이후 하와이 동포사회는 이승만과 박용만계로 양분되었다.

표면적인 계기는 한정된 국민회 자금을 어느 쪽에 먼저 투입하느냐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사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 대일항전 방식을 둘러싼 양측의 대립이었는데 박용만은 군사력을 양성해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하자고 주장한 반면 이승만은 일본에 무력으로 대항해 봐야 승산이 없다며 외교적 수단과 교육을 내세웠다.

 

박용만과 이승만, 더 이상 화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이런 상황에서 1915년 이승만이 “국민회가 국민회관 건축비를 유용했다”고 국민회 집행부를 공격하면서 결정적으로 갈라서게 되었다. 당시 국민회 회장은 박용만계의 김종학이었다. 국민회는 집행부 지지 측과 반대 측으로 양분되었다. 결국 김종학은 1915년 5월 열린 특별대의원회에서 파면되고 이승만 계의 정인수가 임시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정인수는 곧바로 김종학을 공금횡령 혐의로 고소했으나 김종학은 3개월 간의 재판 끝에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으나 김종학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자살을 기도했다. 이승만과 박용만은 더 이상 화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파인애플 농장의 불경기와 흉작으로 국민군단의 수입과 지원금이 대폭 줄어들어 결국 국민군단은 1916년 쇠퇴하기 시작해 1917년 해체되었다.

박용만은 하와이를 떠났으나 이승만에 대한 악감정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박용만은 1919년 중국 상해에서 통합 임시정부의 외무총장에 임명되었을 때 이승만과는 함께 일을 못하겠다며 취임을 거부하고 반이승만 운동을 전개했다. 박용만은 1920년 4월 신채호 등과 북경에서 ‘군사통일회’를 소집, 이승만을 규탄하며 이승만이 임시 대통령으로 있는 상해 임정을 부인키로 결정했다.

1926년에는 독립운동 기지 건설과 독립군 양성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농업개발회사인 ‘대륙농간공사’를 설립하는 등 무력 투쟁을 위한 활동을 펼쳤으나 1928년 10월 16일 그를 친일파로 생각한 의열단원 이해명 등의 총에 살해되었다. 피살 전 박용만을 둘러싸고 “변절했다”, “일본의 밀정이다”, “호화생활을 한다”는 소문이 없진 않았으나 학계는 “일본이나 박용만의 정적이 일부러 헛소문을 퍼뜨렸을 수도 있기 때문에 소문들의 사실 여부는 면밀히 밝혀내야 할 문제”라는 입장이다.

이승만은 1921년 7월 하와이에서 사조직의 성격을 지닌 ‘동지회’를 만들어 ‘국민회’와 결별했다. 이후 동지회는 구미 열강의 동의와 후원을 얻어 일본을 견제하고 독립을 앞당기려는 외교주의론을 기본 노선으로 삼았다. 반면 국민회는 백범 김구를 추종했다. 두 단체의 갈등과 대립은 종교에까지 영향을 미쳐 서로 다른 교회를 다녔으며 해방 후까지도 갈등이 계속되었다.

 

이승만과 독립운동가들의 노선 갈등

이승만의 독립운동 활동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이다. 파벌 싸움을 일삼는다는 부정적인 시각과 식민지 상황에서 불가피했다는 긍정적 시각이 혼재되어 있다. 평가에 앞서 당시의 주요 독립운동 노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에는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무장투쟁론, 준비론, 외교론 등 세 가지가 주로 논의되고 있었다. 한인들을 무장시켜 무력으로 직접 일제에 대항하자는 무장투쟁론의 중심에는 미국의 박용만, 중국의 이동휘와 신채호 등이 포진했다.

준비론을 주창한 대표적인 인물은 안창호였다. 당시 미국에서 국민회를 통해 한인동포들의 광범한 지지 기반을 확보하고 있던 안창호는 식민지 조선이 아직은 일제에 직접 대항할 실력과 무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으므로 교육과 경제 활동을 통해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외교론은 이승만의 일관된 철학이다. 조선이 일제에 대항하기에는 아직 벅차므로 서구 열강, 특히 미국의 협조와 지원을 받아 독립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당시 이승만의 생각을 알 수 있는 상징적인 사건이 있다. 1908년 3월 23일 공립협회 소속의 장인환 의사와 보국회 소속의 전명운 의사가 조선 정부의 외교고문이던 친일 인사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를 샌프란시스코역에서 살해했을 때 한인 단체들은 당시 하버드대 석사과정에 있는 이승만에게 소송과 관련된 통역을 의뢰했다. 그런데 이승만은 학생의 신분으로 학교를 장시간 비울 수 없고, 기독교인의 신분으로 살인자의 재판 통역을 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했다. 동포들이 크게 실망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승만은 이런 암살 사건들이 결과적으로 한국인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식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 결국에는 한국의 독립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처럼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해서는 타협을 하지 않다 보니 성격·노선·배경 등의 차이로 인해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충돌하는 일이 잦았다. 독불장군식의 성격에 자신을 모든 일의 중심에 놓고서 생각하는 강한 캐릭터까지 작용해 주위와의 불협화음이 끊이질 않았고, 갈등의 골이 더욱 깊게 파였다. 이승만의 리더십은 여론을 중시하기보다는 자신의 통찰에 더 많은 비중을 두는 유형이었다. 원만한 타협보다는 자신의 노선을 집요하게 관철하는 스타일이다 보니 지지자들에게는 열띤 성원을 받지만 반대자나 정적들에게는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성격·노선·배경 등의 차이로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자주 충돌

이승만이 본격적으로 미국 생활을 시작한 1912년부터 1945년 10월 환국할 때까지 30여 년간 그와 대립했던 인물은 줄잡아 10여 명에 이른다. 이 중 단순한 개인감정 차원을 넘어 정치적 견해나 노선 차이를 드러낸 인물만 손꼽아도 박용만·안창호·이동휘·신채호 등 여러 명이다. 먼저 부닥친 것은 무장투쟁을 중시했던 하와이의 박용만이었다. 둘의 갈등은 하와이 국민회의 자금을 어느 곳에 먼저 투입해야 하느냐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본질은 외교 노선과 무장투쟁 노선의 대립이다.

안창호와의 갈등은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국민회를 장악한 뒤부터 본격화되었다. 사실 국민회는 안창호의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하와이 국민회를 장악한 이승만이 미국 본토에서도 학식과 명망을 기반으로 안창호를 누르려 한 데서 갈등이 시작되었다. 이승만은 박용만의 노선에 대해서는 “현실성이 전혀 없는 것으로 사탕밭에서 교민들이 힘들여 번 돈을 밑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허비하고 있다”고 보았고, 안창호의 실력 양성론에 대해서는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비판했다.

안창호는 이승만에 대해서는 “자기의 일은 자기가 스스로 아니하고 가만히 앉았다가 말 몇 마디나 글 몇 줄로써 독립을 찾겠다는 것이 어느 이치에 허락하리오”라고 비판했다. 박용만에 대해서는 “아무리 무식해 판단력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전쟁이 어떤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비판했다.

이승만은 임정 국무총리 이동휘와도 불화를 빚었다. 이동휘는 1915년 러시아령으로 망명한 뒤 한인사회당을 결성하는 등 사회주의에 경도된 인물이었기 때문에 둘 간의 갈등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이승만과 이동휘의 갈등은 1921년 1월 열린 임정의 첫 국무회의에서부터 폭발했다. 이동휘는 이승만에게 위임통치 청원 문제를 거론하며 그 과정을 해명하라고 요구했다. 이승만이 1919년 3월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장차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건 하에 당분간 한국을 새로 창설될 국제연맹의 위임통치하에 놓아 달라”는 내용의 청원서를 제출한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동휘는 또한 대통령이 상해에 없을 때에는 국무총리인 자신에게 행정 결재권을 위임하라고 촉구하는 한편 국무위원의 다수결로 행정을 결정하자는 안을 내놓았다. 상해 임정의 임시 대통령이면서도 상해를 지키지 않는 이승만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었다. 실제로 이승만은 임시 대통령직을 수행한 5년 동안 5개월밖에 상해에 있지 않고 대부분 미국에 있었다. 이승만이 요구를 거절하자 이동휘는 1921년 1월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승만과 신채호의 갈등은 크게 보면 외교 노선과 무장투쟁 노선의 대립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과거에 급제하고 성균관 박사를 지낸 전통 사회의 엘리트인 신채호와 미국의 명문 대학인 프린스턴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새 시대 엘리트 이승만과의 대립이라는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원론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승만의 외교 노선과 박용만의 무장투쟁 노선, 안창호의 실력 양성론은 독립운동에 필수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이것을 추진하는 민족 지도자들이 자기의 주장만을 고집한 나머지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대립과 갈등을 빚어서 독립운동 그 자체의 전력에 막대한 손실을 가져왔다는 것은 역사의 교훈으로 남아 있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