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손문 중화민국 임시대총통 취임

‘영원한 혁명가’이자 ‘실패한 혁명가’

손문(1866~1925)은 평생을 봉기와 실패 그리고 망명으로 점철된 삶을 산 근현대 중국 최고의 풍운아다. 그러나 그가 주도한 봉기마다 모두 실패로 끝이 나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동지들이 처형되어 ‘영원한 혁명가’이면서 동시에 ‘실패한 혁명가’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그는 오늘날 ‘중국 혁명의 아버지’로 불리며 중국은 물론이고 대만에서도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중국공산당에서는 제1차 국공합작을 성립시킨 주인공으로, 대만의 국민당 정권에서는 국민당 창당 인사로 대우하며 찬양한다. 그것은 2,100여 년 동안 버텨온 봉건 왕조 정치의 맥을 끊고 민주주의 공화정부를 탄생시키는 데 평생을 바친 그의 삶에 대한 예우이자 찬사였다.

손문은 중국 광동성 향산현(지금의 중산현)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12살 때인 1878년 큰형과 숙부가 자리를 잡고 있는 미국 하와이로 건너가 호놀룰루의 영국계 학교에서 기독교 교리와 서양 학문을 배웠다. 1883년 고향으로 돌아와 고향의 수호신인 목신을 파괴하는 등 과격한 행동을 하다가 고향에서 쫓겨나 홍콩으로 도피했다. 홍콩에서는 영국계 고등학교를 거쳐 1892년 서양인이 운영하는 ‘서의서원’(현재의 홍콩대 의과대)을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마카오에서 병원을 개원했다.

1894년 11월 다시 하와이로 건너가 호놀룰루에서 혁명 단체인 ‘흥중회’를 결성, 험난한 혁명가의 역정을 시작했다. 흥중회의 목표는 만주족의 청조를 무너뜨리고 한족 중심의 민주주의 공화국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손문이 무장봉기를 위해 홍콩으로 돌아갔을 때 1895년 4월 청일전쟁의 패배에 따른 시모노세키조약이 체결되었다. 손문은 그해 9월 광주를 거점으로 무력 봉기를 계획했다. 하지만 봉기 전 기밀이 누설되어 마카오로 도주했다.

손문은 일본, 하와이, 뉴욕을 거쳐 1896년 9월 영국 런던으로 건너갔다가 동향 출신의 첩자에게 속아 런던 주재 청나라 공사관에 감금되는 위험한 상황을 맞았다. 하지만 서의서원 시절 스승이 ‘런던 타임스’를 통해 이 사실을 널리 알린 덕분에 구출되는 이른바 ‘청나라 공사관 피랍 사건’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손문은 10개월 남짓 런던에 체류하면서 서구 사조를 깊이 흡입했다. 그가 나중에 혁명 이념으로 내세운 ‘삼민주의’의 이론적 기초가 마련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손문은 중국으로 돌아와 광주와 혜주에서 동시에 봉기할 계획을 세웠다가 또다시 실패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봉건 왕조 정치의 맥을 끊고 민주주의 공화정부를 탄생시키는 데 평생 바쳐

몇 차례의 봉기 실패는 당시 국내외에 조직된 몇몇 혁명단체들로 하여금 한층 조직적이고 통일적인 혁명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그 결과가 손문이 주도하고 재일 유학생이 참여해 1905년 8월 20일 도쿄에서 결성한 ‘중국동맹회’다. 중국의 18개 성 가운데 17개 성 대표를 자처하는 유학생 70명이 참가한 중국동맹회는 이후 화흥회, 흥중회, 광복회 등 군소 단체를 흡수 통합해 전국적인 조직으로 세력을 키웠고 1905년 11월 기관지 ‘민보’를 창간해 무력 혁명 선전 작업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손문은 민보 창간호에서 “만주족을 몰아내고, 중화를 회복하며, 민국을 건립하고, 토지를 균등하게 소유하자”는 강령을 공표하고 삼민주의를 표방했다. 기본적인 주장은 혁명적 폭력을 사용해 청 왕조의 통치를 무너뜨리자는 것이었다. 동맹회 회원들은 손문의 관여 없이 1906년 호남·강서 접경 지역에서 봉기를 시도했다가 실패했다. 1907년과 1908년에는 손문의 주도하에 광동․광서․운남에서 6차례 무장봉기를 일으켰으나 이 역시 모두 실패했다.

그런 가운데 청일전쟁 패전 후 청조가 새로 편성한 서양식 군대 ‘신군’이 혁명운동의 새로운 주체로 떠올랐다. 신군은 1908년, 1910년 수차례 봉기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1911년 3월에도 광동성 광주에서 신군과 중국동맹회의 첫 번째 연합 무장봉기인 ‘황화강 봉기’를 일으켰으나 이 봉기 역시 실패했다. 이 과정에서 우군을 적으로 오인하는 바람에 서로 발포해 72명이 죽는 아픔을 겪었다. 손문으로서는 10번째 실패였다. 그러자 “지나치게 독선적”이라는 비난이 손문에게 쏟아졌다.

그래도 혁명의 객관적인 조건들은 더욱 성숙되었고 신군을 주축으로 하는 혁명군은 1911년 10월 10일 호북성의 성도인 무창에서 신해혁명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인근의 한구와 한양까지 점령한 그 혁명의 절정기에 손문은 현장에 없고 미국에 있었다.

청조는 고향에서 칩거하는 북양군벌 원세개에게 사태 수습의 전권을 맡겼다. 원세개는 11월 16일 자신을 수반으로 하는 내각을 구성한 후 재빨리 청 왕조의 정권과 군권을 장악했다. 섭정왕 재풍(선통제의 생부)은 12월 스스로 퇴위하는 형식을 취해 쫓아냈다. 이로써 청 왕조의 운명은 원세개의 손안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원세개라고 해서 전국 성 대부분이 청 왕조에 반기를 들고 독립을 선언한 마당에 혁명의 불길을 완전히 잠재울 수는 없었다. 원세개는 세력 판도가 혁명파에 밀리는 상황에서 타협을 모색했다. 다행히 제국주의 열강이 원세개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중화민국은 아시아 최초 공화 체제

손문은 미국에서 혁명 소식을 듣고 1911년 12월 25일 급거 상해로 귀국했다. 그러자 17개성의 대의원들이 12월 29일 남경에서 회의를 열고 손문을 임시 대총통으로 추대했다. 손문은 1912년 1월 1일 남경에서 임시 대총통에 취임하고 아시아에서 성립된 최초의 공화 체제인 중화민국의 수립을 공포했다. 손문은 헌법을 제정하고 한·만·몽골·티베트·회(이슬람) 5족을 상징하는 오색기를 국기로 정했다.

그러나 원세개는 손문의 남경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곧 군사를 동원해 한구와 한양을 점령하고 당시 혁명 세력의 추대를 받고 있던 무창의 여원홍과 평화 공존을 시도했다. 한편으로는 손문의 남경정부를 고립시키기 위해 혁명 진영 내부의 분열을 조장하는 공작을 펼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모든 걸 기대고 있는 청 왕조에 압박을 가해 황제의 퇴위를 요구했다. 손문으로서는 아직 힘이 열세인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열강도 남경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손문은 “북경의 원세개가 청의 황제를 퇴위시키고 공화국 정부 형태를 받아들인 후 수도를 남경으로 옮긴다면 임시 대총통 자리를 원세개에게 기꺼이 이양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원세개는 남경 정부의 총통이 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청 왕조와 남경 정부를 무너뜨린 뒤 자신이 남북을 통일한 전국 정부를 조직할 생각이었다. 그 일환으로 1912년 2월 12일 6살의 부의 황제를 퇴위시켜 청조의 문을 닫게 했다. 이로써 진시황 이래 2,100년 동안 유지해 온 중국의 황제 체제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러자 혁명파도 열강의 무력간섭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남경 정부를 해산하기로 했다. 손문은 반대했으나 힘이 없었다. 결국 손문은 2월 14일 물러났고 혁명파는 기다렸다는 듯 2월 15일 원세개를 임시 대총통으로 선출했다. 원세개가 3월 10일 북경에서 임시 대총통에 취임하자 남경 정부는 북경으로 정부를 이전하기로 결정했다. 남경 정부의 북경 이전 결정은 원세개의 완전한 승리를 의미하는 형식상의 마지막 절차였다.

손문은 한동안 원세개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원세개도 혁명 세력과 뜻을 같이하는 것처럼 행동해 공화제를 근간으로 하는 헌법 채택에 동의하고 1913년 2월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했다. 그러나 혁명 세력이 주축이 된 국민당이 다수당을 차지하자 원세개는 하수인을 시켜 국민당의 사실상 당수였던 송교인을 1913년 3월 22일 암살하고 1913년 11월 국민당을 불법화하고 해산시켰다. 그에 앞서 국회는 1913년 10월 6일 원세개를 정식 대총통으로 선출했다.

원세개는 10월 10일 대총통에 취임했다. 이로써 신해혁명은 실패로 종말을 고했다. 다만 신해혁명이 의도했던 독립과 민주는 달성하지 못했으나 2,100여년 넘게 이어져온 군주제를 무너뜨리는 데 일조한 것에 만족해야 했다.

 

“혁명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손문은 다시 원세개와 등을 지는 관계가 되었다. 이후 원세개의 독단과 전횡이 극에 달하자 손문은 ‘토원(討袁)운동’을 벌이며 신해혁명에 이은 제2 혁명을 꾀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원세개에 대항할 군사력이 없었다. 손문은 1914년 7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원세개의 타도를 기치로 내건 ‘중화혁명당’을 결성했다.

손문은 그 무렵 일본에서 출판 재벌인 송가수의 둘째딸이자 미국에서 공부를 마친 송경령을 자신의 영문 비서로 맞아들였다. 곧 둘 사이에 동지적 연대감과 애정이 싹터 결혼을 희망했다. 당시 손문에게는 송경령보다 나이가 많은 아들을 비롯해 3명의 자녀와 부인이 있었고, 송경령과는 나이 차이가 27살이나 났기 때문에 송경령의 아버지는 딸의 결혼을 한사코 반대했다. 딸을 일본에서 중국으로 불러들여 금족령을 내렸으나 송경령은 일본으로 몰래 건너가 1915년 10월 요코하마에서 손문과 결혼을 강행했다. 당시 손문의 나이는 49살이었고 송경령은 22살이었다.

원세개는 독재 권력을 더욱 강화해 1915년 12월 12일 중화제국의 황제로 즉위했다. 손문은 원세개의 황제 제도 부활을 반대하는 제3 혁명이 일어나자 1916년 3월 일본에서 상해로 돌아와 황제를 참칭하는 원세개를 토벌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이런 와중에 1916년 6월 6일 원세개가 만성피로와 요독증으로 눈을 감았다. 이후 중국은 절대 강자 없이 군벌이 난무하는 군웅할거 시대로 접어들었다.

손문은 1919년 10월 10일 상해에서 중화혁명당을 중국국민당으로 개편하고 1920년 6월 광주에서 중화민국 정부를 출범시킨 후 오랜 숙원이던 북벌(北伐)을 단행했다. 공산혁명에 성공한 러시아도 군사적 지원을 약속했다. 그러나 운이 다했는지 혁명 역량이 떨어졌는지 1922년 6월 광주에서 진형명이 일으킨 쿠데타로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쿠데타는 50여 일 만에 진압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손문이 깨달은 것은 강력한 군대 양성과 소련과의 제휴 필요성이었다.

손문은 1924년 1월 제1차 국민당 전국대회에서 ‘연소·용공(聯蘇·容共)’ 정책을 채택했다. 제1차 국공합작이 시작된 것이다. 1924년 6월에는 소련의 도움을 받아 황포군관학교를 설립, 강한 군대와 정당과 동맹국을 확보했다. 바야흐로 중국의 통일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문제는 건강이었다. 1924년 12월 동맹을 협의하자는 한 군벌의 초청을 받아 북경으로 갔다가 1925년 3월 12일 59세를 일기로 북경에서 눈을 감았다. “혁명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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