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직이 광장시장을 이끈 공로는 한국 경영경제사에 길이 남을 일
박승직(1864~1950)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기업 중 가장 오래된 두산그룹을 창업하고 서울 종로와 청계천로 사이에 위치한 광장시장의 오늘을 있게 한 우리나라 시장경제의 개척자다. 그가 조선 8도 장터를 누비는 보부상으로 모은 돈을 종잣돈 삼아 종로 4가 배오개시장에 ‘박승직 상점’을 연 것은 32살 때인 1896년 8월 1일이었다. 당시 배오개시장은 조선시대 전통적 서민 시장으로, 동대문으로 들어오는 여러 지방의 곡물·청과·잡화·포목·수산물 등이 거래되었다.
배오개시장은 그로부터 9년 뒤인 1905년 7월 몇몇 상인의 주도로 ‘동대문시장’으로 탈바꿈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이미 거상으로 우뚝 선 박승직을 비롯해 몇몇 상인이 동대문시장의 운영과 관리를 위해 한국 최초의 주식회사인 ‘광장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그 무렵 남대문시장은 일본인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박승직은 동대문시장에서는 조선 상인들만 장사할 수 있도록 질서를 잡았다. 그가 광장시장을 이끈 공로는 한국 경영경제사에 길이 남을 일이었다. 이후 시장은 동대문시장 또는 광장시장으로 불리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박승직은 경기도 광주군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몰락 양반으로 당시 세도가인 여흥 민씨의 위토를 부쳐서 입에 풀칠하는 소작농가였다. 박승직은 17세 때인 1881년 민영환이 해남군수에 임명되어 임지로 내려갈 때 민영환을 따라 세상을 두루 구경하며 내려가 현지에서 개인 비서 역할을 했다. 그러면서도 관청 일이 끝나면 해남 장터에 나가 장사꾼들을 유심히 살피다가 조금씩 물건을 사 모아 되팔았다. 박승직의 내면에서 똬리를 틀고 있던 상인 DNA가 마침내 밖으로 표출된 것이다. 박승직은 그렇게 해남에 머물며 큰돈을 모았다. 박승직은 3년 후 민영환의 군수 임기가 끝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은 서울로 흘러드는 물자의 중계지인 송파에 가까웠다. 그는 시장이 열리는 송파장을 자주 찾아가 지켜보다가 20살 무렵 송파에서 포목류를 사 경기나 강원 산간 지방에 팔아넘기는 보부상이 되었다. 그 후 박승직상점을 개점하고 광장시장을 안정화시켰다. 1906년 1월 조선인 기업가들로 이루어진 사상 최초 경영인 단체 ‘한성상업회의소’가 설립되었을 때는 발기인 대표로 이름을 올리고 1909년 상임위원에 선출되었다. 한성상업회의소는 뒷날 경성상업회의소, 대한상공회의소로 발전했다.
조선 상인들의 집결체인 ‘공익사’도 설립
박승직은 1907년 8월 조선 상인들의 집결체인 ‘공익사’를 설립했다. 공익사는 보부상 우두머리나 객주 출신 포목 상인들이 출자한 조합으로 일본인 중간상인들을 배제해 큰 성과를 거두었다. 박승직은 1925년 2월 종로 4가 15번지에 자리 잡은 포목점을 ‘주식회사 박승직상점’으로 개편했다. 그의 뛰어난 경영 능력을 높이 평가해 일본인들도 주주로 참여했다.
박승직은 여성 화장품인 ‘박가분’ 판매에서도 성공을 거뒀다. 박가분은 박승직의 아내가 집에서 부업 삼아 만든 것이 출발점이다. 납과 돌가루를 섞어 만드는 재래의 화장품 제조법에 자신의 아이디어를 곁들여 만든 박가분은 1915년부터 방물장수를 통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날이 갈수록 인기가 높아져 1920년대 불황기의 박승직 상점에 중요한 돈줄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1920년대 말 일본에서 고급 화장품이 밀려들어 오고, 재래 화장품 원료인 납에 독성이 있다고 알려지면서 퇴조하기 시작, 1937년 생산을 중단했다.
박승직은 1933년 국내에서 생산하는 일본 쇼와기린맥주 이사로 참여했다. 1945년 해방 후 일본인 경영진이 한국인 최대 주주인 박승직에게 경영권을 넘기고 떠나자 박승직은 31세 장남 박두병에게 기린맥주회사를 맡겼다. 박두병은 경성고상 졸업 후, 조선은행에 다니다가 1936년부터 박승직 상점의 전무로 근무하고 있었다. 박두병은 1952년 5월 한국 정부로부터 기린맥주를 불하받아 동양맥주주식회사를 창업했다. OB로 불린 이 동양맥주는 두산그룹의 주력 기업이 될 정도로 성장했다. 박승직은 1950년 12월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