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땅 구석구석

춘천의 금병산이 ‘비단(錦)과 병풍(屛)을 둘러친 듯 아름답다’고 해서 가봤더니 걷기 편한 능선과 나무들 그리고 김유정의 소설 속 이야기들이 반기더군요

↑ 동백꽃길 초입에 조성된 잣나무숲에서 찰칵 (사진 홍창화 작가)

 

by 김지지

 

오늘의 산행지는 강원도 춘천의 금병산(657m)이다. 2021년 2월 20일, 고교 동창들과 함께 올랐다.

 

■금병산과 산행 코스

 

금병산 산행의 대표적인 출발 지점은 경춘선 김유정역이다. 역사를 빠져나오면 멀리 왼쪽으로 바라보인다. 가을이면 산기슭이 비단(錦) 병풍(屛)을 둘러친 듯 아름답다고 해서 금병산(錦屛山)이다. 들머리는 크게 두 곳이다. 김유정역을 등지고 왼쪽 김유정길의 김유정문학촌과 오른쪽 금병의숙길의 금병초등학교를 지난 곳에 있다. 어느 쪽으로 올라가든 순환능선이어서 출발지점인 김유정역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 이른바 원점회귀 코스다.

오른쪽 금병초등학교와 금병의숙을 지나 직진하면 1.4㎞ 지점에서 ‘산골나그네길’ 능선과 만나 2.6㎞ 거리의 금병산 정상으로 이어진다. 김유정역에서 정상까지 거리는 4㎞이고 시간은 1시간 40분 정도 걸린다. 왼쪽 김유정문학촌을 지나 동백꽃길로 들어서면 이후 정상까지는 2.6㎞다. 역에서 정상까지 전체 거리는 3.8㎞이고 시간은 1시간 30분 정도다. 종합하면 김유정역을 출발해 병점초등학교 ↔ 산골나그네길 ↔ 금병산 정상 ↔ 동백꽃길 ↔ 김유정문학촌을 지나 김유정역으로 돌아오는 전체 거리는 7.8㎞이고 시간은 3시간 남짓 걸린다.

이 길이 외곽순환 산길이라면, 중턱 지점의 ‘실레이야기길’은 내곽순환 들레길이다. 5.2㎞ 거리에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산골나그네길’ ‘동백숲길’ ‘실레이야길’이 금병산의 등뼈라면 능선과 능선을 이어주는 ‘만무방길’ ‘금따는 콩밭길’ ‘봄봄길’ 등은 팔다리 뼈 역할을 한다. 길 이름 모두 이곳에서 태어난 김유정의 소설 제목에서 땄다.

금병산 지도. 오른쪽 아래 노란선이 실레이야길이다.

 

■우리 산행길

 

김유정역~금병의숙길~산골나그네길로 올라

우리의 산행코스는 오른쪽 금병의숙길이다. 금병초등학교와 금병의숙 옆을 지나면 산의 들머리로 이어진다. 금병의숙은 김유정이 고향에 세운 야학당이다. 물론 당시 흔적은 사라지고 지금 건물은 새로 지은 것이다. 산의 들머리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정하면 저수지를 지나는 ‘만무방길’로 이어지고, 직진하면 산의 주 능선인 ‘산골나그네길’과 만난다. 직진길은 조금 더 올라간 곳에서 또 다시 갈라지는데 그곳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정하면 산신각을 지나 만무방길과 만나고, 직진하면 산림욕장을 지나 산골나그네길 능선으로 이어진다.

금병산 초입에서

 

초입부터 하늘로 쭉쭉 뻗은 잣나무가 하늘을 가리고 있다. 우리의 산행 계획은 직진 후 만나는 산골나그네길 능선을 타고 정상으로 가는 것이다. 그러러면 산림욕장을 지나야 한다. 그런데 선두에서 그 길을 놓쳐 산신각 쪽으로 방향이 틀어졌다. 그리되면 산골나그네길 능선 대신 중간 능선에 해당하는 ‘만무방길’을 지나 정상으로 가야 한다.

뒤늦게 이런 사실을 알았는지는 몰라도 선두를 책임진 남수가 산신각을 지나 만무방길로 가다가 갑자기 근린 운동시설에서 만무방길을 포기하고 오른쪽 급경사 산길로 올라선다. 길이 아닌 건 아니지만 나뭇가지로 길을 살짝 막아놓은 것으로 미루어 다른 길로 가라는 뜻으로 보였다. 평소 정상 코스만 오르는 남수가 갑자기 정상길을 포기하고 비정상길을 택한 것이 이상해 “그 길은 아닌 것 같다”며 “예전의 남수가 아니여!”라고 농담조로 한마디 하니 약간 갈등하는 눈빛이다.

그런데 그 순간 창화가 “남수 대장이 결정하면 무조건 따라야 한다”며 남수에게 힘을 실어준다. 창화의 한마디에 모두 남수가 손짓하는 길로 올라섰다. 예상대로 그 산길에는 사람이 다닌 흔적이 흐릿하게 있긴 하지만 일반 등산객이 다니는 길은 아니었다. 급경사에 낙엽이 켜켜히 쌓여있고 얼어있던 땅밑이 조금씩 녹고 있어 미끄러웠다. 남수 결정에 힘을 실어주었던 창화가 그제서야 투덜댄다. 그렇게 15분쯤 오르니 산골나그네길 능선의 쉼터와 만난다. 결국 초입에서 놓쳤던 산골나그네길 주능선을 만난 것이니 뒤늦은 선택이었지만 남수의 판단은 옳았다.

 

흙산에 완만한 오르내리막 반복되고 온갖 나무들이 도열해 지루하지 않아

쉼터에 올라서니 늦겨울의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멀리 금병산 정상이 아스라이 보이고 정상쪽으로 산골나그네길이 순하게 펼쳐있다. 산 아래로는 김유정역과 실레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쉼터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난후 시작된 능선길 산행은 흙산에다 완만한 오르내리막이 반복되고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이 길옆으로 도열해 있어 지루하지 않다. 몸도 마음도 가볍다. 정상 전 20~30분 동안 고도가 높아지긴 하나 이 역시 산행 맛을 느끼게 해준다는 점에서 반갑다. 그렇게 정상에 오르니 김유정역에서부터 어느덧 2시간이 흘렀다. 초입에서 금병산을 올려다볼 때는 동네 뒷산처럼 보였으나 막상 정상에 오르니 금병산의 높이가 적당한 운동량을 요구하는 657m임을 실감한다. 그렇다고 그다지 고되진 않다.

금병산 정상의 정상표지석(왼쪽)과 전망데크

 

정상의 상징물은 정상표지석이 아니라 전망데크다. 정상석이 데크 아래 구석진 곳에 옹색하게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전망데크에 오르니 북쪽으로 춘천시내가 한 눈에 조망된다. 춘천이 엄청난 분지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오늘은 미세먼지 때문에 시야가 흐릿하나 맑은 날에는 춘천시내 너머 멀리 삿갓봉 용화산 오봉산 구봉산 사명산 등이 막힘없이 펼쳐질 것이다. 전망데크 앞에 헬기장이 넓게 조성되어 있으나 사실상 관리를 하지 않아 온통 풀밭이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온갖 산들이 하늘금을 이루지만 나의 지식으로는 산 이름까지 알지 못한다.

정상표지석에서 기념촬영한 친구들

 

하산 때 만난 동백꽃길 잣나무숲 인상적

하산은 김유정문학촌으로 이어지는 동백꽃길이다. 역시 능선이고 흙길이다. 하산이어서 “룰루랄라”하며 내려가는데 오늘도 어김없이 창화와 창민 둘이서 만담(漫談)을 주고받는다. 죽이 어찌 그리도 척척 잘 맞는지 신기할 뿐이다. 둘의 만담 수준은 거의 개그맨 수준이다. 덕분에 파안대소하는 우리의 웃음소리가 오늘도 저 멀리 산너머까지 퍼져나간다. 한바탕 웃고 있을 때 철호가 끼어든다. “옛날에 창화는 열구, 창민은 숨뻥으로 불렸던 적이 있다”고.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 “열구는 입만 열면 구라, 숨뻥은 숨쉴 때를 빼고는 뻥”이란다. 또 다시 웃음이 빵 터진다.

사실 철호가 말한 ‘구라’와 ‘뻥’은 사전적 의미의 구라·뻥과는 다르다. 우리 문단에는 자칭타칭 ‘ 3대 구라’가 있다. 시인이자 통일문제연구소장 백기완과 소설가 황석영 그리고 방동규다. 백기완과 황석영은 워낙에 유명 인물이니 설명이 필요없지만 방동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방동규도 글을 쓰긴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문인은 아니다. ‘시라소니 이후 최고 주먹’으로 불리면서도 과거 민주화운동 인사들과 허물없이 지내며 감옥까지 다녀온 사회운동가이다. 방송에는 김구라도 있다. 이렇듯 친구끼리 말하는 구라는 거짓말이나 이야기를 속되게 이르는 사전적 의미가 아니라 말에 관한 한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을 일컫는 친근한 표현이다.

동백꽃길을 거의 내려왔을 즈음 잣나무숲이 펼쳐진다. 내 눈엔 금병산 산행 중 최고 볼거리다. 영화 ‘클래디에이터’에 나오는 울창한 숲 같다고 하면 분명 과장이겠지만 그래도 처음 보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인상적이었다는 뜻일 게다. 그곳에서 사진을 찍느라 한참을 보냈다.

이곳 동백꽃길의 동백나무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 시뻘건 동백이 아니다. 동백나무는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에도 등장하는데 2~3월 한반도 남쪽에서 볼 수 있는 붉은 동백꽃 나무가 아니라 산수유꽃처럼 노란 봄꽃을 피우는 생강나무를 가리킨다. 동백꽃길을 다 내려오면 김유정문학촌과 김유정역으로 이어지는 김유정로다.

실레마을의 동백나무(생강나무)

 

금병산은 이처럼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접근이 가능하지만 이왕이면 금병의숙길로 올라갔다가 김유정로로 내려올 것을 권한다. 하산 후 김유정문학촌 등 김유정 관련 유물 유적을 천천히 둘러볼 수 있기 때문이다.

 

■김유정문학촌, 실레이야기길, 김유정역

 

김유정문학촌

김유정문학촌은 김유정이 이곳에서 태어난 것을 기념해 세운 곳이다. 전국에 산재한 문학촌 중 가장 왕성한 활동을 펼치는 곳으로 정평이 나 있다. 김유정 생가터 일대에 김유정생가, 기념전시관, 디딜방아간, 외양간, 휴게정 등을 조성해 2002년 8월 개관했다. 다만 이곳에는 김유정의 유품이 존재하지 않는다. 김유정의 유품을 보관해온 휘문고보 동창 안회남이 월북하면서 김유정의 흔적들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결국 김유정문학촌은 오롯이 김유정의 소설로 다시 태어난 문학촌인 셈이다.

김유정문학촌

 

실레이야길

실레이야기길은 김유정의 소설 속 이야기를 바탕으로 금병산 아래 실레마을(춘천시 신동면 중리)에 김유정의 스토리를 입힌 둘레길이다. 실레마을은 금병산에 둘러싸인 모습이 마치 오목한 떡시루 같다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실레는 시루의 강원도 사투리다. 실레마을에서 태어난 김유정은 이곳에서 보고 느낀 일들을 여러 편의 소설 소재로 삼았다. 마을의 실존 인물들도 작품에 등장시켰다. 대표작 ‘봄봄’을 비롯해 ‘동백꽃’ ‘총각과 맹꽁이’ ‘소낙비’ ‘산골나그네’ ‘만부방’ 등 12편이 바로 이곳 실레마을을 배경으로 쓰여졌다.

실레이야길은 김유정의 소설 속 내용에서 이름을 따온 16개 구간으로 이뤄져 있다. 구간마다 나무 표지판에 길 이름과 소설 속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 ‘점순이가 나를 꼬시던 동백숲길’ ‘응칠이가 송이 따먹던 송림길’ ‘산신각 가는 산신령길’ ‘복만이가 계약서 쓰고 아내 팔아먹던 응고개길’ 등이다.

실레마을에서는 도무지 김유정 이름 석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도로는 김유정로이고 역명은 김유정역이다. 김유정역은 사람 이름을 붙힌 전국 최초의 역이다. 김유정 우체국도 있다. 우체국 명칭에 사람 이름이 붙인 것 역시 전국 최초다. 농협지점 이름에도 김유정 이름이 붙여졌다.

마을 이곳저곳을 둘러봐도 김유정과 작품 속의 인물 이름을 딴 상호들이어서 실레마을이 아니라 김유정마을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다. 아쉬운 것은 젓봇대와 전선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실레마을에서 금병산 사진을 찍으려해도 온통 전선이 방해한다. 우리나라 관광지 대부분이 그러하듯 실레마을 역시 어수선하다. 어쩔 수 없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거슬린다.

 

김유정역

김유정역의 원래 역명은 신남역이다. 1939년 경춘선 개통 이후 65년간 신남역으로 불리다가 춘천시 문화인들 노력으로 2004년 12월 김유정역으로 개명했다. 사람 이름을 역명으로 사용한 것은 김유정역이 최초이고 지금도 유일하다. 워낙에 잘 정비해놓아 젊은이들의 데이트 코스로 활용되고 있다. 성동역~춘천역 간 경춘선은 서울 청량리역과 춘천역을 잇는 92.9㎞의 철도다. 1939년 7월 개통되었다. 당시 성동역 자리는 지금 제기동 미도파백화점 자리다. 이후 서울 시가지 확장에 따라 성동역~성북역 구간은 철거되고, 현재는 청량리역이 기점으로 되어 있다.

실레마을이 김유정의 고향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김유정 자신도 ‘오월의 산골작이’라는 수필에서 자신의 고향이 실레라며 마을 풍경을 묘사했다. 그런데 실레마을이 김유정의 선대 집안이 몇 대에 걸쳐 터를 잡고 살아온 곳은 맞지만 김유정이 태어난 곳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서울 진골(지금의 종로구 운니동)에서 태어났다는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언도 있다. 그런 내용까지 상술하면 본 글이 산행기가 아니고 기사가 될 것이고 또한 그걸 밝히는 것이 본 글의 목적이 아니므로 그 내용은 생략한다.

김유정역 옛날 역사

 

■김유정은 한국 단편소설의 대표 작가

 

김유정 고향을 찾았으니 김유정에 대해 알고 가면 좋을 듯 싶어 간단히 소개한다. 아는 만큼 보이므로. 김유정(1908~1937)의 집안은 춘천에서는 나름 명가에 속한다. 10대조는 실학의 선구자였고 9대조는 조선조 현종의 장인이자 숙종의 외할아버지였다. 고조부 때 실레마을로 이주하고 조부 때 6000석 추수를 하는 부자가 되어 춘천 의병 봉기에 재정지원을 했다.

김유정

 

김유정문학촌에 따르면 김유정이 6살 때인 1914년 부모님이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 대저택을 마련,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김유정이 7살과 9살 때 어머니와 아버지가 연이어 세상을 떠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김유정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휘문고보(1923~1929)를 졸업했으나 말더듬이어서 과묵했다. 1930년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결석 때문에 두 달만에 제적처분을 받았다.

목욕탕에서 나오는 당대명창 박녹주를 보고 첫눈에 반한 건 그 무렵이었다. 그는 매일 장문의 연애편지를 써서 보냈으나 몇 살 연상의 박녹주는 회신하지 않았다. 박녹주가 ‘남편이 있는 몸’이라고 타일러도 소용이 없었다. 김유정은 좀처럼 포기하지 않고, 노골적인 협박과 호소로 범벅된 편지를 계속 썼으나 결국에는 비련으로 끝났다. 그때의 경위와 심정은 단편소설 ‘두꺼비’에 기록되었다. 사후의 일기장에는 “녹주, 너를 사랑한다”는 혈서가 발견되었다.

김유정은 사랑에 실패하자 1931년 고향 실레마을로 내려가 야학당을 열어 마을 청년과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계몽운동을 벌였다. 1932년 야학당을 금병의숙으로 넓히고 간이학교로 인가받았다. 당시 실레마을에서 보고 느꼈던 고향의 정취와 농민들의 곤궁한 생활, 그 자신의 개인적인 불행에서 체험한 감상 등은 이후 쓰여질 그의 소설 속에 녹아들었다.

금병산 전망데크에서 바라본 춘천시내

 

늑막염, 치질, 폐결핵을 앓으면서도 글쓰기 멈추지 않다가 29세로 요절

1933년 다시 서울로 올라간 김유정은 고향 이야기를 소설로 쓰기 시작했다. 창작활동은 1933년 3월호 ‘第一線(제일선)’지에 첫 단편소설 ‘산골나그네’를 발표하고, 1935년 조선일보와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소낙비’와 ‘노다지’가 각각 1등 당선과 가장 입선하면서 본격화했다. 그 무렵 삶과 죽음에 걸쳐 각별한 관계를 맺게 되는 이상과 만났다. 두 사람은 부모를 일찍 여의는 등 집안 형편이 비슷하고 문학관도 통해 우정이 깊어졌다. 무엇보다 둘 다 폐결핵을 앓아 더욱 가까워졌다.

김유정은 만성적인 늑막염과 치질, 폐결핵으로 휴양을 하는 중에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봄·봄’(조광, 1935.12), ‘동백꽃’(조광 1936.5) 등 대표작을 연이어 발표했다. 하지만 건강은 날로 악화되어 29살이던 1937년 3월 29일 경기도 하남 땅에서 눈을 감았다. 시신은 홍제동 화장터에서 화장되어 한강에 뿌려졌다. 김유정이 죽고 난 스무날 뒤 멀리 일본에 있던 이상도 죽었다는 사실이 국내에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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