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박춘석 작곡 ‘비 내리는 호남선’ 발표

↑ 박춘석 음반

 

 

박춘석과 이미자의 만남은 트로트 황금시대의 개막

박춘석(1930~2010)은 ‘한국 가요계의 모차르트’, ‘한국 대중가요의 총설계사’로 불린다. 6․25전쟁 후의 폐허 속에서는 국민을 위로하는 친구였으며 1960~70년대에는 당대의 인기 가수치고 그의 노래를 부르지 않은 가수가 없을 정도로 한국 트로트 음악의 중심이었다.

서울의 부잣집에서 태어난 덕에 어린 시절 그의 집에는 피아노, 오르간, 유성기 등이 있었다. 이런 집안 환경에 음악적 재능까지 뛰어나 4살 때부터 오르간을 자유자재로 연주하고, 초등학교 때는 단조와 장조를 구분하고 멜로디에 화성을 넣을 정도로 실력이 출중했다. 인생에 큰 전기가 찾아온 것은 1946년이었다. 서울대 치대에 다니던 길옥윤 등이 대학생 그룹을 만들면서 경기중 4학년인 그에게 피아노 연주를 요청한 것이다. 이렇게 결성된 그룹 ‘핫 팟’은 명동의 미군 전용업소인 ‘황금클럽’ 무대에서 연주를 시작했다. 피아니스트 박춘석이 프로 음악계에 정식으로 데뷔하는 순간이었다. 까까머리 중학생 신분을 숨기려고 벙거지 모자를 쓰고 클럽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으나 집에 있는 피아노를 클럽으로 옮겨다 놓고 피아노를 칠 정도로 연주에 열심이었다. 당시 그가 주로 연주한 곡은 재즈, 팝송, 샹송 등이었다.

박춘석은 1949년 서울대 음대 기악과에 입학했으나 1년 만에 중퇴하고 신흥대(경희대 전신) 영문과에 편입했다. 1950년 6․25가 터져 부친이 인민군에 끌려가 목숨을 잃는 바람에 박춘석은 알거지 신세가 되었다. 이후 취미이던 피아노 연주는 생계 수단이 되었다. 박춘석이 12인조 악단을 결성한 것은 1950년 9․28 수복 직후였다. 악단 이름은 충무로 2가 ‘은성살롱’의 전속밴드로 들어간 것에 착안해 ‘은성 경음악단’으로 지었다. 박춘석은 악단을 이끌면서 팝송을 편곡한 번안 가요를 많이 만들었다. 은성 경음악단은 곧 실력을 인정받아 중앙방송(현 KBS) 라디오 전속 경음악단이 되었다.

박춘석 음반

 

음악에도 우리 정서에 적합한 게 있다는 걸 깨달아

박춘석이 팝과 재즈에서 벗어나 트로트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방송국에서 남인수, 이난영 등 원로 가수를 만나고 우리 전통 가요를 반주하면서 음악에도 우리 정서에 적합한 게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1954년 박춘석은 미군 부대에서 만난 가수 백일희에게 자신이 작곡한 ‘황혼의 엘레지’를 건넸다. 박춘석은 백일희를 사랑했으나 백일희는 미군 장교와 결혼한 후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이후 박춘석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작곡가 박춘석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노래는 1956년 손인호가 부른 ‘비 내리는 호남선’이었다. 이 노래 덕에 26세의 젊은 신예는 천재성을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박춘석은 이 노래 때문에 한동안 고초를 겪어야 했다. 제3대 대통령 선거전에 나선 신익희가 1956년 5월 5일 지방 유세를 위해 호남선을 타고 내려가다 열차 안에서 심장마비로 타계하고 이 때문에 노래를 담은 음반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간 게 화근이었다. 박춘석은 경찰서로 불려가 신문을 받았다. 경찰은 “신익희의 죽음을 애도하는 뜻에서 만들지 않았느냐”, “고인의 미망인이 가사를 붙이지 않았느냐”며 집요하게 캐물었다. 조사 결과 ‘비 내리는 호남선’은 신익희가 타계하기 3개월 전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져 오해는 풀렸지만 작사가 손노원은 계속 괴로움을 당해야 했다.

박춘석은 가수가 훌륭한 작곡가를 만나야 하듯이 작곡가 또한 좋은 가수를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곡이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도 이미자, 패티김, 문주란, 남진, 나훈아, 하춘화, 은방울자매, 김상진 등 당대 최고의 가수들을 만난 덕분이라며 겸손해 했다. 훗날 그 최고의 가수들은 ‘박춘석 사단’으로 불렸다. 박춘석이 패티김을 만난 것은 1959년이었다. 미 8군 무대에서 활동하던 패티김은 1959년 박춘석의 번안곡 ‘틸(사랑의 맹세)’과 ‘파드레’가 수록된 첫 독집음반을 낸 뒤 유명해졌다. 뒤이어 박춘석이 작곡한 ‘초우’로 가요계에 정식 데뷔하고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가시나무 새’, ‘못잊어’ 등 주옥같은 노래를 잇따라 히트시키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박춘석과 패티김

 

작곡가 또한 좋은 가수를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

주로 팝 싱어들과 호흡을 맞추던 박춘석의 음악세계에 큰 변화가 생긴 것은 1965년 이미자를 만난 후였다. 스스로 ‘음악인생 2기’라고 말하는 트로트 황금시대의 개막이었다. 1964년 ‘동백 아가씨’로 유명해진 이미자는 박춘석에게 기대주였다. 박춘석은 순전히 이미자의 노래를 작곡하겠다는 생각으로 1965년 이미자의 소속 회사인 지구레코드로 전속을 옮겼다. 이미자를 만난 후 그의 음악세계는 트로트로 급선회했다. 스윙, 탱고 등 경쾌한 노래들도 부르던 이미자의 노래 역시 애가(哀歌) 전문 트로트로 바뀌었다.

박춘석이 이미자를 위해 처음 작곡한 곡은 1965년 KBS 라디오 드라마 주제가인 ‘진도 아리랑’이었다. 이후 이미자는 ‘섬마을 선생님’, ‘그리움은 가슴마다’, ‘흑산도 아가씨’, ‘기러기 아빠’, ‘황혼의 블루스’ 등 박춘석이 작곡한 700여 곡을 불렀다. 박춘석이 작곡한 노래가 모두 2,700여 곡이었으니 4분의 1이나 되는 노래를 이미자에게만 준 것이다.

박춘석과 이미자

 

그는 가수들의 이름을 리듬감 있게 고쳐주기도 했다. 문필연에게는 문주란을, 김남진에게는 남진이라는 새 이름을 만들어주었다.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1965․곽순옥), ‘가슴 아프게'(1967․남진), ‘마포종점'(1969․은방울자매), ‘하동포구 아가씨'(1971․하춘화), ‘공항의 이별'(1972․문주란), ‘물레방아 도는데'(1972․나훈아) 등도 모두 박춘석의 작품들이다.

국내 히트 작곡가로서의 명성은 일본으로까지 이어져 1978년 12월 일본 최고의 여가수 미소라 히바리에게 ‘가제사카바(風酒場)’ 곡을 취입시켜 미소라에게 외국인 최초로 신곡을 써준 인물로 기록되었다. 1994년 8월, 밤새워 곡을 쓰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이후 16년 동안 투병생활을 하다가 2010년 3월 14일 숨졌다. 현재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등록된 1,152곡은 개인 최다로 기록되어 있다.

박춘석과 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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