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1864년 : 흥선대원군의 섭정… 쇄국과 수구로

쇄국정책 고수함으로써 내우외환의 위기 심화시켜

흥선대원군(1820~1898)은 긍정과 부정의 양면적 평가를 받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부정적 이미지가 더 강한 편이다. 그토록 견고했던 외척 세력(안동 김씨)의 힘을 약화시키고 서원 철폐와 세제 개편으로 조선 사회를 쇄신한 개혁정치가의 이미지가 없진 않지만 시대적 흐름을 읽지 못해 개방을 거부하고 쇄국정책을 고집함으로써 조선의 근대화를 늦추고 조선을 망국의 길로 접어들게 한 수구적 이미지가 더 강하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이 당면한 시대적 과제는 개방을 통한 근대화와 부국강병이었다. 그러나 대원군은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간파하지 못하고 위정척사론의 배타적 이데올로기에 얽매여 쇄국정책을 고수함으로써 내우외환의 위기를 심화시켰다.

본명이 이하응인 흥선대원군은 남연군의 아들로 태어났다. 남연군이 사도세자의 서자이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된 덕분에 이하응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는데도 영조로부터 이어지는 왕가의 가계에 편입되었다. 문제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상황에서 직계가 아닌 왕족은 그다지 축복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당시 안동 김씨는 순조비의 아버지인 김조순으로부터 60여 년간 이어온 조선조 최대의 외척으로 왕권을 쥐락펴락할 정도로 권력이 막강했다. 헌종의 뒤를 이어 1849년 즉위한 강화도령 철종도 안동 김씨 세력이 골라 세운 허수아비 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철종마저 후사가 없자 왕이 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왕족은 안동 김씨로부터 온갖 견제를 받았다.

가계상 왕권과 제법 가까운 자리에 있던 이하응은 왕위 후계에 미련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시정잡배들과 어울리면서 난봉꾼 생활을 했다. 안동 김씨 가문을 찾아다니며 구걸을 서슴지 않아 ‘궁도령’, ‘상갓집 개’라는 비웃음을 샀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러면서도 이하응은 병약한 철종이 죽는다면 누가 왕위를 계승할 것인가를 은밀히 계산했다.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장차 임금이 날 자리라고 하는 충남 덕산으로 이장한 것도 자신의 정치적 야망 때문이었다.

이하응은 철종 사후에 왕의 지명권을 갖게 될 신정왕후(조대비)를 주목했다. 조대비는 효명세자(순조의 아들)의 세자빈으로 궁궐에 들어왔으나 젊은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어 아들이 헌종으로 즉위했어도 안동 김씨를 친정으로 둔 시어머니 순원왕후(순조비)가 수렴청정을 해 한 많은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1849년 헌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한 후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1857년 순원왕후가 죽어 궁중의 최고 어른이 되자 안동 김씨에게 친정의 원한을 갚을 길을 찾았다.

이하응은 조대비에게 접근, 철종이 후사 없이 죽을 경우 자신의 아들을 철종의 왕위 계승자로 지명하도록 설득했다. 조대비는 왕위 계승 문제를 자신과 풍양 조씨의 입지 강화를 위한 포석으로 활용했다. 그러던 중 1864년 1월 17일 철종이 오랜 병고 끝에 후사 없이 죽었다. 조대비는 이하응의 둘째 아들인 이재황을 이미 죽고 없는 효명세자(사후 익종으로 추존)의 양자로 삼아 익성군으로 봉한 뒤 왕위에 옹립했다. 온갖 수모와 멸시를 받으면서도 세도가들에게 철저하게 자신을 숨겨온 이하응에게 마침내 정치적 야망을 펼칠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고종의 즉위는 흥선대원군 시대의 개막

고종은 1864년 1월 21일(음 1863.12.13) 조선의 제26대 왕으로 즉위했다. 이하응은 대원군에 봉직되었다. 참고로 대원군 명칭은 선대의 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승하하면 그 방계 종친이 타계한 왕의 아들로 입적해 왕위를 계승하는데 이때 신왕의 생부에 대한 예우로 주는 존호(尊號)다.

즉위 당시 고종은 12세의 미성년자였다. 이 때문에 고종의 즉위는 흥선대원군 시대의 개막이기도 했다. 흥선대원군은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강력한 개혁 정책을 펼쳤다. 먼저 안동 김씨들을 축출하고 당색과 문벌을 초월해 인재를 등용했으며 토색과 주구에 열중하는 탐관오리들을 처벌했다. 과세 균등의 원칙을 세워 양반계급에는 면제되던 병역의 의무를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 부담하게 하는 호포제를 시행했다. 안동 김씨의 기반이기도 한 최고 권력기구 비변사를 혁파해 의정부를 복설하고 삼군부를 최고 군사기관으로 설치해 통치기구를 정비했다. 대전회통, 육전조례 등 법전도 편찬해 질서를 잡았다.

무엇보다 획기적인 일은 서원 철폐였다. 당시 서원은 정치 세력에 기생하려는 양반 유생들이 들끓던 붕당의 근거지로, 세금을 면제받아 국가 재정을 악화하는 원인으로 비판받고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1865년 3월 화양서원과 만동묘에 첫 칼을 내려친 것을 시작으로 전국 700개의 서원 중 47개소를 제외한 모든 서원을 정리하고 그에 딸린 토지와 노비를 몰수했다. 양반들은 크게 반발했지만 국고는 풍족해지고 양민의 부담은 줄어들었다. 서원 철폐는 중앙정부의 권위와 통제력을 회복시켜 토반(土班)들의 대민 착취를 줄이고 국고 수입을 늘리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보았다.

흥선대원군의 정책 중에는 부정적인 것도 적지 않았다. 비록 그가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경복궁 중건을 위해 무리하게 노동력을 징발하고 당백전과 원납전 등을 발행해 백성의 삶을 다시 피폐하게 했다. 위정척사를 앞장서 끌고 나간 것도 사회를 혼란케 했다. 위정척사(衛正斥邪)는 정학(正學)과 정도를 지키고 사학(邪學)과 이단을 물리친다는 사상으로 위정은 성리학을 수호하고 척사는 성리학 이외의 모든 종교와 사상을 배격하는 것이다. 처음엔 천주교 등 서구 종교와 문화를 배격하다가 1860년대 들어 서양과의 교역을 반대하는 통상 반대 운동으로 전개되면서 쇄국정책의 근간을 형성했다.

 

조선을 망국의 길로 접어들게 한 수구적 이미지 강해

대원군이 처음부터 천주교에 부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아내는 천주교 교리문답을 배우고 아들(고종)을 키운 유모도 천주교 신자였다. 하지만 대원군이 천주학쟁이와 결탁한다는 소문이 퍼져 위정척사의 수구 세력들로부터 정치적 공세를 받게 되자 권력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1866년 정초부터 천주교 금압령을 내렸다. 이후 몇 개월 동안 프랑스 천주교 조선교구장인 베르뇌 시므온 주교를 포함해 12명의 프랑스 신부 중 9명을 새남터에서 처형했다.

그러자 3명의 신부가 조선을 탈출해 중국 천진에 있는 프랑스 극동함대사령관 피에르 로즈 제독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프랑스 함대는 1866년 9월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서울 근교 서강에 이르렀다가 1주일만에 중국으로 물러났다. 10월에는 7척의 프랑스 함선과 600명의 해병대가 강화성을 점령하고 문수산성 등지에서 조선군과 교전을 벌였다가 정족산성에서 패해 1개월 만에 철수했다. 프랑스군은 이 병인양요를 일으킨 후 철수하면서 강화성의 모든 관아에 불을 지르고 외규장각 도서 340여 권과 은괴 19상자 등 많은 서적과 재화를 약탈했다. 1868년 4월에는 유대인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충남 덕산에 있는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대원군의 분노는 극에 달해 사건에 연루된 천주교도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1866년 프랑스 신부를 처형하면서 시작된 병인박해는 더욱 기세등등해져 1872년까지 모두 8,000여 명의 천주교도를 처형했다. 대원군은 1871년 4월 서울 등지에 척화비를 세워 양이(洋夷)와의 전쟁 불사를 다짐했다. 이후 ‘대원군께서 분부하셨다’라는 뜻의 ‘대원위분부(大院位分付)’ 다섯 글자는 모든 관리와 백성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대원군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을 때 지난 10년간 아버지에게 권력을 위임했던 고종의 마음속에 아버지의 짙은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갈망이 꿈틀거렸다.

 

지나친 집권욕으로 아들·며느리와의 관계 파국으로 치달아

고종과 민비 그리고 민비의 척족 세력인 여흥 민씨들이 대원군의 권력을 빼앗기 위해 최익현과 반대원군 세력을 부추겼다. 최익현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 등에 악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는 1873년 12월 14일 서원을 철폐하고 청나라 돈을 수입해 경제 질서를 훼손했다는 점을 들어 대원군의 내정 개혁을 비판하면서 고종이 이제는 성인이 되었으니 더 이상 아버지가 섭정할 필요가 없다며 2차 상소를 올렸다. 고종은 이런 분위기를 이용해 주요 신하들을 물러나게 해 정권 교체를 밀어붙였다. 대원군이 운현궁에서 창덕궁으로 들어가는 전용문도 사전 통보 없이 폐쇄함으로써 대원군을 실각시켰다. 고종은 1873년 12월 말 친정(親政)을 시작했다.

그런데도 대원군은 권력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대원군의 소행으로 의심되는 각종 화재와 폭발 사고를 일으켜 고종과 민비의 분노를 샀다. 1881년에는 자신의 서자이자 고종의 이복형인 이재선을 국왕으로 추대하려는 고종 폐립 사건에도 관여했다. 이렇듯 재집권에 대한 야망은 민비와의 갈등으로도 이어져 시아버지와 며느리 두 사람은 평생 불구대천의 원수 사이가 되었다.

대원군이 재집권한 것은 1882년 7월 23일 일어난 임오군란 후였다. 고종은 백성의 지지를 받는 대원군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 임오군란 사태를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해 군란 이튿날인 7월 24일 사태 수습을 위한 전권을 대원군에게 위임했다. 대원군이 개화 정책을 폐지하고 군인 급료의 정상적 지급을 약속하자 혼란했던 분위기는 점차 가라앉았다. 문제는 대원군이 경기도 장호원으로 피신한 민비가 죽었다고 국상을 선포한 것이다. 이 문제는 결국 부자 간의 약한 고리마저 끊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고종이 추진하던 개화정책을 대원군이 전면 백지화해 두 사람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그런 와중에 임오군란 진압을 위해 조선에 군대를 상륙시킨 청국이 대원군을 임오군란의 배후 조종자로 체포해 1882년 8월 중국 천진으로 끌고가 억류했다. 결국 대원군은 33일 만에 권좌에서 내려오고 고종은 다시 권력을 되찾았다. 하지만 군란을 진압해준 대가로 청국의 간섭이 지나쳐 고종과 민비는 청의 간섭과 위세에서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도모했다.

조정은 1885년 6월 러시아공사와 비밀리에 접촉해 유사시 러시아 황제의 보호를 요청하는 비밀외교를 추진했다. 이 사실을 알게된 청국은 고종과 민비를 견제할 사람은 대원군밖에 없다고 판단해 1885년 10월 대원군을 조선으로 귀국시켰다. 대원군은 청국이 조선을 감시하기 위해 파견한 원세개와 결탁, 1886년 고종을 폐위하고 장손 이준용을 옹립하려다가 실패해 운현궁에 칩거했다.

 

일본공사관, 대원군을 을미사변의 배후자로 몰아가

그러던 중 1894년 동학농민군이 봉기하면서 또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일본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조선에 진주시켰다가 1894년 7월 23일 경복궁에 침입한 후 갑오개혁을 추진했다. 일본은 동학농민군과 백성의 지지를 받는 대원군을 집정으로 임명해 갑오개혁이 대원군의 주도 아래 진행되는 것처럼 꾸몄다. 결국 고종은 대원군에게 권한을 넘긴다는 전교를 내려야 했고 대원군은 3번째 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대원군은 일본이 추진하는 갑오개혁이 불만이었다. 그래서 청나라 군사 및 동학군과 손을 잡고 고종을 폐위한 뒤 장손인 이준용을 옹립하려고 했다. 일본은 이 사실을 알고 대원군을 몰아낸 뒤 고종과 협상해 고종이 일본의 의중에 따라 갑오개혁을 추진하도록 했다. 또한 박영효․서광범․윤치호․서재필 등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에 망명 중이거나 친일 성향을 띤 개화파 지도자들은 사면하고 귀국시켜 각료로 기용하기로 고종과 합의했다.

1895년 러시아․독일․프랑스 3국이 일본에 압력을 가한 ‘삼국간섭’ 후 민비가 앞장서서 러시아와 긴밀하게 손을 잡자 일본은 칩거 중인 75세의 대원군을 앞세워 1895년 10월 8일 경복궁에 난입, 민비를 살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일본공사관은 책임을 최소화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을 음모의 배후자로 몰아갔다. 이 때문에 각국 공사나 영사들은 흥선대원군을 배후로 알았다.

하지만 그런 판단은 오래가지 않았다. 일본군의 경복궁 침입, 흥선대원군의 경복궁으로의 출발 지체, 일본공사관의 문서 위조 등 흥선대원군을 배후라고 볼 수 없는 많은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대원군의 을미사변 연루는 그의 정치적 이미지에 돌이킬 수 없는 큰 상처를 남겼다. 1898년 2월 22일 고종의 반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생을 마감함으로써 조선은 전환점을 맞았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