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과 부부 (22)] 김지미와 네 남자 이야기-전편… 홍성기(영화감독), 최무룡(영화배우), 나훈아(가수), 이종구(의사)와 살아보고 내린 결론은 “남자는 다 똑같이 어린애”
2022년 12월 29일 · zznz

↑ 김지미의 젊은 시절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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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지
■김지미 총평
20세기가 저물던 1999년 월간조선이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영화감독, 배우, 영화평론가, 제작자 등 101명에게 “20세기 최고 영화배우가 누구냐”고 물었다. 대답은 김지미(여자배우)와 김승호(남자배우) 2인이었다. 영화는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이, 영화감독은 임권택 감독이 최고로 뽑혔다. 20세기 최고 영화배우로 선정된 김지미(1940~ )를 설명하는 세 가지 키워드는 ‘화끈하고 당찬 성격’ ‘국내 유명인사 4인과 결혼·동거’ ‘국내 최다 영화 출연 여자배우’다.
▲성격
영화인들이 말하는 김지미는 이런 사람이었다. “눈부신 프리마돈나를 보는 느낌”(곽지균 영화감독), “설명이 필요없는 아시아의 별”(도동환 제작자), “치마 두른 남자”(신영균 배우), “촬영을 하다보면 연애하고 싶은 감정에 빠져”(정일성 촬영감독), “지랄같은 후배”(김승호 배우), “시원시원한 성격과 외모가 돋보이는 아시아 최고 스타”(김남진 촬영감독), “뭇 남성들을 매혹하는 요부형”(정비석 소설가), “웬만한 남자와는 비교가 안 되는 여장부”(박노식 배우)
김지미를 만난 기자들과 김지미 자신의 평을 종합하면 이렇다. 활달하고 직선적. 한번 내뱉으면 도장 찍은 것보다 확실. 모질고 괴팍하고 독특. 자존심 강하고 독해. 당돌하고 오만하며 함부로 접근하는 것은 거부. 약속은 틀림없이 지키고 한번 안 하겠다고 말을 하면 끝까지 안해. 흐트러지지 않고 꼿꼿. 비굴하거나 눈치 보지 않아.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물불 가리지 않아. 김지미 어머니는 딸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기억한다. 어렸을 때부터 남자든 여자든 지고는 못사는 성미였다. 공부든 운동이든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했다. 오빠 따라 스케이트 타러 갔다가 오빠한테 시비 걸어오는 사내들에게 얼음장을 깨들고 달려든 적도 있었다. 한번 성미를 부리면 밥도 몇끼를 굶는다. 김지미의 화끈한 성격을 알려주는 일화가 있다. 1990년대 영화인협회이사장 시절, 청와대 초청 오찬 자리에서 김영삼과 김대중 당시 대통령 앞에서 줄담배를 피웠다. 누군가 눈치를 주었다. “담배 피운다고 뭐라고 하면 ‘나는 가겠습니다, 나는 담배를 피워야 하는 사람입니다’ 하고 나오면 된다”라고 응수했다.

▲영화 일생
김지미 외모의 특징은 아담한 키, 이목구비가 뚜렷한 달걀형 얼굴, 균형잡힌 몸매에 여무지고 당당한 표정이다. 전통적인 미인형이라기보다는 도시적인 세련미와 신선감을 주는 서구형에 가까웠다. 이런 외모 덕분에 데뷔 때부터 ‘사각(死角)이 없는 배우’ 즉 어느 쪽에서 카메라를 들이밀어도 죽은 구석이 없는 배우라는 평을 받았다. 영화배우 이력은 화려하다. 7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국내에서는 대종상 여우주연상과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차례 수상했다. 국제적으로도 아시아태평양영화제 여우주연상, 파나마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시카고영화제 세계평화메달상 등을 받았다.
김지미는 영화에서 위협적인 팜므 파탈, 강인한 의지와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여성, 곡절이 많은 운명적인 비극의 주인공을 주로 연기했다. 출연 영화 편수는 다소 들쑥날쑥하다. 1992년 ‘명자 아끼꼬 쏘냐’ 개봉 당시 김지미는 자신의 출연작이 800여 편이라고 했다가 그후 언젠가부터는 700여 편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무엇이 사실이든 세계영화사에선 드문 기록이다. 그런데 한국영상자료원의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김지미의 출연작은 376편이다.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은 김지미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거나 유실된 필름이 많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김지미가 출연한 1950년대 후반 영화 중 ‘비 오는 날에 오후 3시’(1959년) ‘고개를 넘으면’(1959년) 필름만 남아 있을 뿐 데뷔작인 ‘황혼 열차’(1957년)를 포함해 모두 사라지고 없다.
김지미가 출연한 영화의 주요 감독은 첫 남편 홍성기를 비롯 김기영·유현목·정창화·김수용·이만희·신상옥·임권택·정진우 등 30명이 넘는다. 상대 남자배우들은 1917년생 김승호에서 1950년생 이영하까지 폭이 넓다. 한국영상자료원의 자료를 기준하면 김지미 상대 남자배우는 최무룡이 77편으로 으뜸이고, 신성일이 60편이다. 김지미는 훗날 “영화 주인공으로 700가지의 인생을 살았다. 안 해본 역할이 없다”면서도 “한 번도 내 연기에 만족해본 적이 없다. 왜 저렇게 했을까 하는 생각에 도망가고 싶을 때가 많다”며 자신의 연기를 실망스러워했다.
김지미는 1957년 17살 나이에 길거리 캐스팅으로 충무로에 들어왔다. 당대의 기라성 같은 선배 스타들과 경쟁하며 시대극, 미스터리물, 액션 등 장르를 가리지 않았다. 그중 멜로 드라마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영화평론가 이영일이 “김지미의 등장을 계기로 한국의 멜로드라마가 신파극과 갈라섰다”고 말할 정도였다. 1960년대 중후반, 한국 영화계에 청춘영화의 붐이 일었다. 엄앵란, 문희·윤정희·남정임 등 트로이카 군단이 인기를 끌었다. 김지미는 그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 최고의 자리를 지켜 냈다. 그런데도 김지미를 따라다닌 것은 “연기력이 떨어진다”는 평이었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 ‘인기와 미모에 의존하는 스타배우’라는 항간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진정한 연기자로 변신하는데 성공했다. 1970년 청룡영화상에서 ‘너의 이름은 여자’로 여우주연상을 받고 1974년 김수영 감독의 ‘토지’로, 1975년 김기영 감독의 ‘육체의 약속’으로 2년 연속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것이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평론가들이 김지미의 최고 연기로 꼽는 영화는 1986년 임권택 감독의 ‘길소뜸’과 ‘티켓’이다. 김지미는 1962년부터 2002년까지 40년 간 각 분야 최고의 남자들과 세 번의 결혼과 이혼, 한 번의 동거와 결별 등으로 세간의 시선을 집중시키면서 흔들림 없는 여장부의 모습을 보였다.
김지미는 1970년대 초 당대 유명 배우들이 TV와 영화에 겹치기 출연할 때도 영화만을 고집했다.미모를 뽐내는 스타에서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는 배우로 변신하고 영화제작자(1986년 지미필름 설립)이자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1995~2000년)으로 활동하며 영화계의 산증인으로 자리를 지켰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국회의원을 하라는 등 정치권에서 요청이 있었지만 영화배우로 살겠다며 모두 거절했다.

■김지미의 성장기와 영화 데뷔
▲데뷔
김지미는 1940년 대전의 신탄진에서 8남매 중 7녀로 태어났다. 본명은 명자였다. 아버지가 청주사범을 졸업하고 교직 생활을 거쳐 회사를 경영한 덕분에 집안은 부유했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땅도 많았고 큰 정미소도 있었다. 김지미는 4살 때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남대문초등학교를 다니던 중 1950년 6·25전쟁이 터져 다시 대전으로 내려가 신탄진국민학교와 대전의 명문 대전여중을 졸업했다. 서울이 수복된 뒤 다시 서울로 올라와 덕성여고를 다녔다. 여고 시절에는 육상 등 스포츠에 소질이 있었다. 미국 유학을 목표로 영어 공부도 열심히 했다. 아버지가 서울에서 운영한 비교적 규모가 큰 인쇄소 덕분에 자가용(뷰익)을 타고 학교에 다녔다. 형제들은 인물이 좋고 공부도 잘했다. 큰오빠와 큰언니는 각각 서울대 문리대와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고 둘째언니는 이화여고를 다녔다.
김지미가 덕성여고 2학년 때이던 1957년 봄이었다. 하루는 작은 어머니가 운영하는 명동의 다방에 갔는데 낯선 사람이 ‘영화에 출연할 생각이 없냐’고 물어왔다. 나중에 알고보니 ‘영화계의 기인’으로 불리는 김기영 감독(1919~1998)이었다. 그는 집에까지 수 차례 찾아와 김지미 부모를 설득했다. 당시 김기영이 김지미를 보고 “사람이 어떻게 저리 예쁠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온다.
김지미는 어릴 때부터 예쁘다는 말을 듣긴 했으나 영화에 특별히 관심이 없었다. 더구나 큰오빠가 미국 유학을 가는데 김지미를 데리고 간다 해서 쉽사리 결정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김지미는 고민 끝에 출연을 결심했다. 단발머리 여고생에게 은막의 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반대하던 부모는 불같은 성격의 김지미가 결심하니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사실 김지미가 형제 중 처음 영화에 출연한 것은 아니었다. ‘이화여고 대표미인’ 소리를 듣던 둘째언니가 6·25 전쟁이 나기 전에 ‘나라를 위하여’라는 영화에 가족 몰래 출연했다가 집안이 발칵 뒤집혀서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김지미의 데뷔작은 김기영 감독의 ‘황혼 열차’(1957.10.31. 개봉)였다. 개봉에 앞서 감독과 투자사가 그녀에게 ‘지미’라는 예명을 새로 지어주었는데 당시로선 파격적인 이름이었다. 고아원 선생님과 보모 간의 러브스토리를 다룬 ‘황혼 열차’에 김지미는 일약 주인공으로 발탁되었다. 5살 꼬마 안성기가 아역을 맡아 두 사람은 데뷔 동기가 되었다. 영화는 큰 성공을 거두고 김지미는 영화계의 주목을 끌었다.

▲데뷔 후 영화 인생
‘황혼 열차’ 다음 작품에서는 운명적인 만남이 김지미를 기다렸다. 당시 영화계 최고 감독으로 인정받는 홍성기 감독이었다. 그는 ‘실낙원 별’(1957.9.28. 개봉)이 10만명의 대히트를 치자 곧바로 후편을 제작했는데 ‘황혼 열차’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 김지미를 이 영화에 특별출연시킴으로써 운명적인 만남을 시작했다.
김지미는 이후 박상호 감독의 ‘장미는 슬프다’(1958.5.22. 개봉)와 김기영 감독의 ‘초설’(5.30. 개봉)에 잇따라 출연했으나 ‘초설’의 흥행 성적은 참담했다. 다행히 ‘초설’보다 하루 늦게 개봉한 홍성기 감독의 ‘별아 내 가슴에’(5.31. 개봉)가 대박을 터뜨려 데뷔 7개월 만에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별아 내 가슴에’는 25일간 유례 없는 장기 흥행을 하면서 13만 명을 동원, 해방 이후 최다 흥행 성적을 올린 ‘춘향전’(1955년, 12만명)과 ‘자유 부인’(1956년, 11만 5000 명)의 기록을 단번에 깨뜨렸다. 김지미는 1959년 5월 미국의 유명 감독 존 포드가 한국의 문화 예술 등을 소개한 ‘조용한 아침의 한국’ 제목의 다큐멘터리에도 출연했다. 그런데 영화 촬영 후 존 포드가 김지미에게 할리우드에 가서 영화를 해보지 않겠느냐고 의사를 타진했다. 김지미는 한국에서 자신의 위치와 할리우드라는 미지의 세계에서 어떤 대우를 받을지 확신할 수 없어 포기했다.
‘별아 내 가슴에’ 성공 후, 김지미에게 시나리오가 산더미처럼 몰려왔다. 전국의 극장마다 김지미가 출연한 영화에 목을 매고 영화사 감독마다 출연을 사정했다. 김지미는 작품을 분석하거나 역할를 검토하지도 못한 채 그 모든 영화에 얼굴을 내밀었다. 그 무렵은 한국 영화의 중흥기(1958~1964년)였다. 1955년 15편, 1956년 30편, 1957년 37편이던 영화 제작 편수는 1958년 74편, 1959년 111편으로 급증했다. 결정적인 이유는 1958년 이승만 정권의 ‘국산 영화 제작 및 영화 오락 순화를 위한 보상 특혜조치’에 따라 외화 수입을 쿼터제로 만들어 국산 영화 제작을 장려했기 때문이다.
김지미도 덩달아 바빠졌다. 한꺼번에 36편의 영화에 겹치기로 출연한 때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이 촬영장에서 “철수씨”하고 부르던 남자배우를 다른 촬영장에서는 “상감마마”라고 부르며 연기를 해야했다. 연기를 한다기보다는 ‘그저 얼굴을 내민다’는 표현이 더 적합했다. 1960년대 김지미의 연기가 혹평을 받은 것도 이런 시대적 배경이 작용했다. 김지미는 전후 서울을 배경으로 한 ‘비 오는 날의 오후 3시’(1959.11.25. 개봉)에서 한국영화 최초로 양장 차림으로만 출연해 화제가 되었다. 당시는 멜로드라마 여주인공들이 한복과 양장을 번갈아 입고 나오던 때였다.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라는 별명이 생긴 것은 그 무렵이었다.
■첫 번째 남자 : 영화감독 홍성기
▲결혼
1958년 ‘별아 내 가슴에’로 대박을 터뜨린 홍성기(1924~2001)는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만주 안동중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신경(현재 장춘)의 건국대 정경학과를 2년 수료했다. 1943년 만주국립영화학원 연출과를 졸업하고 광복 이듬해인 1946년 귀국해 국내 영화계에 몸을 담았다. 한국 영화 개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최인규 감독 밑에서 신상옥 등과 조감독 생활을 하다가 1949년 16㎜ 필름으로 제작한 한국 최초 컬러 극영화인 ‘여성일기’(1949년 4월 9일 개봉)를 연출하면서 감독으로 데뷔했다. ‘여성일기’는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5만명이 관람했다.
홍성기는 ‘별아 내 가슴에’도 대박을 터뜨리자 김지미를 출연시킨 새 영화 ‘산 넘어 바다 건너’ 촬영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둘의 관계가 가까워졌다. 다만 그때만 해도 연출자와 연기자의 관계였다. 그런데 영화계 주변에서 두 사람이 가까워지도록 분위기를 잡았다. 홍성기는 노총각의 명감독이었고 김지미는 나이는 어리지만 쓸만한 배우라고 생각한 영화계 사람들이 두 사람의 결혼을 성사시키려고 바람을 잡은 것이다. 당시 김지미는 꽃다운 나이 18살이었고 홍성기는 16살이 많은 34살이었다. 신인배우 김지미에게 홍성기는 영화계에서 가장 지적이고 공부도 많이 한 엘리트 신사였다. 감독으로서도 매력적이었다. 그런 사람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하니까 나이도 생각하지 않고 고민할 겨를 도 없이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1958년 9월 12일 서울 원남동의 한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김지미는 훗날 “세상 물정도 모르던 시절, 영화를 찍는 건지 현실인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결혼식을 치렀다”고 회고했다. 재미있는 것은 훗날 “결혼식장이 어디였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한동안 생각하다가 “아마 운현궁이었던 같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의 결혼식장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영화에서 결혼식을 워낙 많이 해 자신이 어디서 결혼식을 했는지 가물가물했기 때문이다. 사진도 어느 게 자신의 인생사진이고 어느 게 영화 속 사진인지 구분을 잘 못했다. 결혼 보름 후 개봉한 김지미-홍성기 커플의 영화 ‘산 넘어 바다 건너’(1958.9.26. 개봉)는 10만명의 관객을 끌어들여 또다시 대박을 터뜨렸다.
▲결혼 후 영화 인생
김지미-홍성기 커플은 결혼 후, ‘자나 깨나’ ‘청춘극장’ ‘별은 창 너머로’ ‘비극은 없다’ 등 1959년까지 연이어 4편의 영화를 더 만들었다. 당시 영화계도 김지미를 흥행의 보증수표로 인식해 김지미는 1958년 1959년 2년 동안 16편에 출연했다. 1959년 출연 영화 중에는 6편이 그해 흥행 순위에 올랐다. 특히 ‘청춘극장’(1959.3.1. 개봉)은 1년 전 ‘별아 내 가슴에’에 이어 1959년 흥행 순위 1위를 기록, 11만 9400명의 관객을 극장으로 끌어들였다. 다만 ‘별아 내 가슴에’와 ‘청춘극장’ 모두 필름은 사라지고 없다. 김지미의 1960년대 출발도 순조로웠다. 신년 벽두부터 국제극장에 간판을 내건, 김지미가 출연하고 홍성기가 감독한 ‘재생’(1960년)이 또다시 흥행몰이에 성공했다. 기세를 몰아 김지미는 1960년 한 해 동안 14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그러나 마냥 장밋빛 인생일 수만은 없었다. 김지미-홍성기 콤비의 ‘춘향전’(1961.1.18. 개봉)이 10일 뒤 개봉한 신상옥-최은희 콤비의 ‘성춘향’(1961.1.27. 개봉)에 완패했기 때문이다.

▲‘춘향전’과 ‘성춘향’ 대결
김지미-홍성기 콤비의 ‘춘향전’과 신상옥-최은희 콤비의 ‘성춘향’은 제작비와 개봉 시기가 비슷하고 컬러 시네마스코프(와이드 스크린)를 국내 최초로 시도했다는 점에서 경쟁이 불가피했다. 특히 비상한 관심을 끈 것은 홍성기-신상옥 라이벌 감독의 승부와 신구세대를 대표하는 김지미 대 최은희의 대결이었다. 신상옥 감독이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시네마스코프의 장대한 화면과 총천연색 영화를 시도하기 위해 컬러 필름으로 테스트 촬영을 마치고 시나리오를 다듬은 것은 1960년 3월이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게된 홍성기 감독이 자신도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로 춘향전을 촬영하겠다며 신상옥보다 먼저 ‘춘향전’ 제목으로 촬영신고를 냈다. 신상옥 감독이 “상도의에 어긋난다”며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홍성기 감독은 “내가 먼저 시작했다”며 버텼다. 결국 촬영은 양쪽 모두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진행되었다. 신상옥 감독 역시 ‘춘향전’ 제목으로 상영을 신청했으나 동명이어서 상영불가 판정을 받게되자 울며 겨자 먹기로 제목을 ‘성춘향’으로 바꿔 달았다.
개봉 전, 유리해 보인 것은 홍성기의 ‘춘향전’이었다. 홍성기 감독이 그동안 히트작을 쏟아낸 흥행감독인데다 ‘성춘향’보다 10일 먼저 개봉하고 톱스타 김지미를 주연으로 내세웠으니 대부분 홍성기의 흥행을 점쳤다. 게다가 홍성기 영화의 남여주인공인 신귀식과 김지미 나이가 각각 스물과 스물둘인데 비해 신상옥 영화의 남녀주인공인 김진규·최은희가 각각 38살, 36살이었기 때문에 관객들이 젊고 화려한 배우들의 ‘춘향전’을 더 보고 싶어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우세했다. 그러나 홍성기 감독은 컬러의 선명함을 살리지 못했다. 극적인 긴박감도 떨어지고 지루한 정극 스타일의 연출로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비판을 받았다. 반면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은 컬러의 느낌을 제대로 살린 선명한 화면에 기술적 완성도가 높았다. 결과는 서울에서만 74일간 38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성춘향’의 압승이었다.

▲이혼
‘춘향전’ 실패 후 홍성기는 빚더미에 앉았다. 김지미는 영화에서 번 돈으로 남편의 빚을 갚아주고 새 영화의 제작비를 댔다. 다행히 김지미가 출연한 정창화 감독의 ‘장희빈’(1961.9.23)이 성공하고 춘향전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역량을 기울인 홍성기 감독의 ‘에밀레종’(1961.9.24)이 관객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으면서 김지미의 아성이 견고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홍성기의 재기 가능성도 높아졌다.
문제는 두 사람이 정신없이 바쁘다보니 사이가 점점 소원해졌다는 것이다. 김지미는 겹치기 출연까지 하느라 바쁘고 홍성기는 다음 작품을 위해 여관에 틀어박혀 글을 쓰거나 촬영해 들어갔기 때문에 부부가 마주앉아 오순도순 얘기할 여유가 없었다. 한 집에 살면서도 얼굴 보는 날이 별로 없었다. 1960년 딸이 태어났지만 엄마노릇을 하지 못해 딸은 선배 여배우 노경희 할머니 손에 키워졌다.
그런 생활이 계속 되다 보니 정상적인 부부 관계가 유지되기 어려웠다. 어쩌다 집에서 만나면 오히려 서먹서먹하고 쑥스러웠다. 김지미도 얽매이고 구속 받는 것을 싫어했지만 홍성기도 아내를 강하게 붙잡아매려 하지 않았다. 김지미 마음 속에 “남편은 왜 내가 이렇게 일에 얽매이지도록 내버려두나. 나는 아무래도 괜찮다는 말인가” 하는 불만이 싹텄다. 짜증도 났다. 다만 서로 다투거나 미워하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홍성기가 1962년 1월 부도수표 발행으로 구속되었다가 10일 만에 풀려난 뒤 1962년 8월 집행유예 선고를 받았다. 결국 두 사람은 결혼 4년만인 1962년 3월 1일 합의이혼했다. 이 사실은 영화배우 최무룡과 김지미 간 스캔들 소문이 퍼지고 나서 9월 4일 언론에 공개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