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美 히피들의 해방구 ‘사랑의 여름’ 축제 개막

↑ ‘Fantasy Fair and Magic Mountain Music Festival’의 한 장면

 

☞ 찰스 맨슨이 궁금하면 클릭!!

 

가정과 학교는 포기, 성에 대한 관습 거부, 환각제 사용이 특징

기이한 모습의 젊은이들이 미국 곳곳에서 목격되기 시작한 것은 베트남전과 인종문제로 홍역을 앓고 있던 1960년대 중반이었다. 남녀를 막론하고 어깨까지 내려가는 치렁치렁한 머리에, 남자들은 수염을 기르고 누더기 같은 옷에 목걸이를 했으며 여자들은 요란한 레이스에 원색을 이용한 ‘사이키델릭풍’의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했다. 그들은 엄격한 성윤리가 지배하는 시대에 성에 대한 기존의 관습을 거부하고 자유로운 성행위를 추구했으며 마리화나와 LSD 등 환각제를 거리낌 없이 사용했다. 가정과 학교는 포기한 채 황무지에 집을 짓고 땅을 일구며 자신들만의 유토피아를 꿈꿨다. 그들에게 기존 사회는 구제할 수 없는 폐기물에 가까웠기 때문에 버림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그들의 구호 중 “30세 이상은 믿지 말라”는 외침은 기성세대에 대한 원천적인 불신의 표현이었으며 반대로 자신들이 새로운 삶의 양식을 개척하겠다는 의지의 선언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들 대부분이 중산층에 해당하는 ‘와스프(WASP)’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유복하고 안락한 백인(W), 앵글로색슨(AS), 신교도(P) 가정 출신의 젊은이들이 길거리로 뛰쳐나온 것이다. 세상은 이런 그들을 가리켜 ‘히피(hippie)’라고 불렀다. 히피들은 ‘꽃의 아이들’이라는 애칭답게 꽃을 사랑했고 ‘사랑의 세대’라는 별명답게 ‘사랑과 평화’에 가치를 두었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문화를 이렇게 설명했다. 장발은 전통적인 남녀 구분에 대한 항의의 상징이고, 제멋대로의 기이한 복장은 점잖은 미국 중산층 복장에 대한 반발이며, 프리섹스는 엄격한 미국의 청교도적 도덕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라고. 또한 평화주의는 세계 제1의 군사력으로 세계를 압도하려는 미 정부에 대한 반발이고, 탁발은 근면을 미덕으로 한 미국적 윤리에 대한 부정이며, 학교를 중퇴하는 것은 학력과 성적을 중시하는 기존 사회질서에 대한 거부라고. 더불어 LSD와 마리화나는 환각에 몸을 내맡겨 의식의 확대를 꾀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히피들의 온상지는 샌프란시스코에서도 노동계급이 많이 거주하던 헤이트-애쉬베리(Haight Ashbury) 거리였다. 1966년 6월경에는 1만 5,000명으로 불어나 히피풍의 클럽과 술집이 문을 열었고, 마약 밀매상이 자금을 지원한 히피 주간신문 ‘샌프란시스코 오라클’이 1966년 9월 창간되었다. LSD와 마리화나를 즐기는 ‘애시드 트립 페스티벌’도 종종 벌어졌는데, 애시드는 LSD와 마리화나와 같은 환각제의 은어였다.

 

“Turn on, turn in, drop out(흥분하라, 함께하라, 이탈하라)” 외쳐

히피 문화가 절정에 다다른 것은 1967년이었다. 시작은 1월 14일 순수예술가 마이클 보언이 주최하고 헤이트-애쉬베리와 경계 지역인 샌프란시스코 금문교 공원(Golden Gate Park)에서 열린 ‘휴먼 비-인(Human Be-In)’ 행사였다. 히피 문화와 음악이 한데 어우러진 이 축제의 장에 제퍼슨 에어플레인, 그레이트풀 데드 등 록가수들이 참여해 3만여 명 히피들의 흥을 돋우었다. 시인 앨런 긴즈버그와 하버드대 교수 출신의 심리학자인 티머시 리어리는 환각제 사용을 옹호했다. 리어리는 1960년 환각제를 처음 경험한 후 환각약품의 영향을 연구하면서 LSD가 다수의 정신병을 고칠 수 있다고 믿고, 학생들에게 LSD를 복용토록 한 것이 문제가 되어 결국 하버드대에서 쫓겨난 전직 교수였다. 그러나 리어리는 개의치 않고 1964년 환각제 관련 책을 집필하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환각을 체험케 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1967년 1월 ‘휴먼 비 인’ 무대에서 관중을 향해 “Turn on, turn in, drop out(흥분하라, 함께하라, 이탈하라)” 구호를 외쳤다. LSD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정신세계를 경험하고, 나를 둘러싼 세계와 조화롭게 소통하고, 본인을 속박하는 기존 체제에서 벗어나라는 의미의 외침에 반항과 일탈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열광적으로 반응했다.

‘휴먼 비 인’ 행사 후 환각과 자유와 록음악을 원하는 수많은 청춘들이 너도나도 캘리포니아 헤이트-애쉬베리로 몰려들었다. 그들 중에는 리어리가 제창한 구호 “drop out”에 고무되어 고등학교나 대학교를 중퇴하고 집을 나와 헤이트-애쉬베리를 새 정착지로 택한 학생들도 많았다. 지미 헨드릭스, 재니스 조플린, 제리 가르시아 등 뮤지션과 그들의 밴드 동료들이 헤이트-애쉬베리에 정착하면서 반문화의 심벌, 히피들의 낙원, 록음악의 성지로 자리잡았다.

분위기가 뜨거워지자 샌프란시스코의 한 라디오 방송국이 대규모 콘서트를 기획했다. 1967년 6월 10일~11일 공연한 ‘판타지 페어 앤드 매직 마운틴 뮤직 페스티벌’(Fantasy Fair and Magic Mountain Music Festival)이었다. 그리고 5일 뒤인 1967년 6월 16일~18일 3일간은 미국의 청소년들이 일찍이 경험해본 적이 없는 거대하고 폭발적인 축제가 샌프란시스크 부근의 몬터레이에서 ‘몬터레이 팝 페스티벌’ 이름으로 열렸다. ‘음악·사랑·꽃’이 슬로건인 ‘몬터레이 팝 페스티벌’을 즐기기 위해 전국에서 10만명의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1967년 개최된 일련의 축제는 ‘사랑의 여름(Summer of Love)’으로 불렸다. ‘사랑의 여름’은 헤이트-애쉬베리로 몰려오는 젊은이들로 인해 예상되는 문제들을 해결하거나 예방하기 위해 약 25명의 사람들이 조직한 ‘사랑의 여름 위원회’에서 유래했으나 1967년 여름을 뜨겁게 달군 히피 패션의 옷차림과 행동을 뽐내는 젊은이들이 헤이트-애쉬베리에 모여 히피음악, 환각제, 반전, 프리섹스 생활을 했던 일련의 사회적 현상을 지칭했다.

이른바 ‘사랑의 여름’ 축제는 이전까지 국지적인 지명도만 가지고 있었던 록 밴드들에게 명성과 기회를 안겨 주었고 무명에 가까운 출연진들을 스타로 만들었다. ‘사랑의 여름’ 축제에는 그레이트풀 데드, 마마스 앤 파파스 등 당대를 대표하는 유명 록 밴들들이 대거 참여해 사이키델릭 록의 진가를 만천하에 알리고 신인가수 재니스 조플린은 스타덤에 올랐다. 인기가 영국에 국한되었던 지미 핸드릭스는 이 페스티벌을 통해 미국 시장에서도 먹히는 뮤지션으로 발돋움했고 짐 모리슨이 이끄는 도어스의 ‘Light my fire’는 사실상 1967년 최고의 히트곡으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더 큰 성과는 사이키델릭 밴드들의 약진이었다. 인기가 서부 해안의 히피 커뮤니티에 국한되어 있던 샌프란시스코 사이키델릭 밴드들이 이 페스티벌을 계기로 잠시나마 전국구 밴드로 반짝 인기를 누리게 된 것도 ‘사랑의 여름’ 덕분이었다.

무엇보다 페스티벌의 사전홍보를 위해 이 축제의 기획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존 필립스(혼성그룹 마마스앤 파파스의 리더)가 작곡하고 가수 스콧 매켄지가 5월 13일 발표한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머리에 꽃을 꽂으세요’ 노래가 ‘몬터레이 팝 페스티벌’에 울려퍼지면서 노래는 축제의 상징곡이 되고 이후 히피 문화와 히피 운동의 찬가로 대중에게 사랑을 받았다. 노래는 곧 미국 빌보드 핫100에서 4주 연속 4위에 오르고 영국을 비롯해 유럽 4개국에서는 차트 정상에 올랐다. 3일간 펼쳐진 ‘몬터레이 페스티벌’은 곧바로 히피문화의 시작을 전 세계에 알리고 2년 뒤 록 음악사를 장식하게 될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토대가 되었다. 오늘날 많은 음악팬이 즐기는 대형 페스티벌의 효시로서 대중음악사에 선명한 자취를 남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몬터레이 팝 페스티벌’ 포스터

 

“미국의 사회적 병폐가 낳은 부산물”(아널드 토인비)

기성세대들에게 이런 축제가 달가울 리 없었다. 로널드 레이건 당시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히피들이 공산주의적인 음모를 숨기고 있다”고 목청을 높이고 한 하원의원은 “미국 사회구조에 최대의 위협을 주는 무리들”이라고 비난했다. 현장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던 영국의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는 “미국의 사회적 병폐가 낳은 부산물”이라면서 “미국 건국 이래 청교도적 전통사회에 대한 정면도전”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경찰은 LSD를 소지하거나 거래하는 히피들을 현장에서 체포하는 방식으로 축제를 방해했다. 체포된 젊은이들 중에는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원작자 켄 키지와 러시아 출신 무용수 루돌프 누레예프 등도 있었다. ‘사랑의 여름’ 축제는 기성세대가 보기에는 섹스와 마약과 로큰롤 놀이에 불과했으나 젊은이들에게 그것은 사회 혁명과 새로운 공동체를 염원하는 비폭력·비정치적인 축제였다.

‘사랑의 여름’ 축제에 참석했던 히피들은 경찰의 강경한 태도에 한동안 저항하다가 1967년 10월 6일 ‘히피들의 죽음’이란 이름의 모의 장례식을 연 뒤 그들의 해방구를 등지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유랑생활을 하며 자신을 신봉하는 이른바 ‘맨슨 패밀리’로 하여금 많은 사람들을 살해하도록 사주한 찰스 맨슨도 있었다. 히피 문화의 전파자 역할을 했던 ‘샌프란시스코 오라클’지도 1968년 2월 제12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사랑의 여름’의 훼방과 파괴는 히피들을 전국적으로 흩어지게 해 히피 문화가 미 전역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히피는 1968년 미국 인구의 0.2%를 차지할 정도로 늘어나고 히피 문화는 미국에서 신좌익운동, 시민권운동과 더불어 미국의 주요 흐름으로 자리를 잡았다. 1968년 12월 ‘히피’라는 단어를 처음 사전에 올린 랜덤하우스 사전은 ‘히피’를 이렇게 정의했다. ‘1960년대 후반기의 사람으로서 기존 체제를 거부하고 사랑에서 자연발생적인 인간관계를 추구하며 의식의 확장을 지향해 환각제를 먹고 비전통적인 옷차림을 하며 특히 꽃을 몸에 달기를 좋아하는 사람.’

그러나 히피문화는 1969년 말 체포된 찰스 맨슨이 일부 극단적 히피들의 컬트 교주로 군림하며 온갖 살인을 사주하고, 그들을 세뇌하고 착취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들불처럼 번져간 마약의 범람, 난교와 미혼모 양산 등으로 인해 히피들에 대한 대내외적인 인식도 서서히 싸늘해졌다. 지미 헨드릭스는 28세이던 1970년 9월, 재니스 조플린은 27세이던 1970년 10월 약물 과다복용으로 죽었고 그레이트풀 데드의 가르시아는 죽는 날까지 약물 중독에 시달렸다. 히피 운동이 사회적인 변혁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기대하고 동조했던 소위 운동권들도 히피들의 무책임과 방종에 학을 떼고 등을 돌리면서 히피는 서서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