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찰스 맨슨의 추종 그룹 ‘맨슨 패밀리’, 영화배우 샤론 테이트 등 5명 잔혹하게 살해

↑ 1969년 찰스 맨슨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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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벽에 피로 쓴 ‘돼지들에게 죽음을’, ‘헬터 스켈터’ 글씨 남겨

1969년 8월 8일 밤, 환각제의 일종인 LSD에 취한 1명의 남자와 3명의 여자가 미국 로스앤젤레스 베벌리힐스의 한 고급주택에 침입했다. 집에는 영화배우 샤론 테이트를 포함 5명이 있었다. 그중에는 가정부도 있었고 대학 진학 학비를 벌기 위해 그 집을 방문했던 10대 청년도 있었다. 테이트의 남편이면서 할리우드의 중견 영화감독 로만 폴란스키는 영화 일로 영국 런던에 가 있었다. 침입자들은 다음날 새벽까지 칼과 총으로 5명 모두를 살해한 뒤 현장을 빠져나가면서 피로 쓴 ‘돼지들(PIGS)’이라는 글씨를 남겼다.

경찰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임신 8개월의 테이트는 16번이나 칼로 난자당한 처참한 모습으로 숨져있었다. 발가벗겨진 채 1번의 총탄과 7번의 칼질을 당하고 국부가 절단된 테이트의 옛 애인은 목이 매달려 죽은 채였고 다른 일행 3명은 총에 맞거나 칼에 수십 군데 찔린 채 잔디밭이나 차 안에 버려져 있었다. 범인들은 다음날인 10일에도 로스앤젤레스 교외의 한 주택에 침입해 라비앙카 부부를 잔인하게 살해한 뒤 방 벽에 ‘돼지들에게 죽음을’, ‘헬터 스켈터(helter skelter)’라고 피로 쓴 글씨를 남기고 사라졌다.

영화배우 테이트의 잔혹한 살해는 미국인들을 경악케 했다. 하지만 범인들은 잡히지 않고 데이트의 사생활을 둘러싼 각종 스캔들과 억측만 무성했다. 그러자 23년간 군 정보기관에서 비밀업무를 수행하던 테이트의 아버지가 군복을 벗고 직접 범인을 체포하는데 뛰어들었다. 그는 범인들이 현장에 남겨둔 ‘돼지’라는 글씨에 주목했다. ‘돼지’는 히피들이 주로 쓰는 표현이었다. 아버지는 머리와 수염을 기르고 히피 행세를 하면서 4개월 동안 전국의 히피 소굴을 드나들었으나 범인의 윤곽은 오리무중이었다.

그러던 중 예상치 않은 곳에서 범인의 단서가 드러났다. 테이트 살해 사건에 가담했다가 다른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수감된 수전 앳킨스라는 여성이 다른 재소자에게 테이트 살해에 대해 떠벌인 것이 경찰 귀에까지 들어간 것이다. 앳킨스는 경찰조사에서 테이트 살해는 자신이 속해있는 ‘맨슨 패밀리’의 소행이고 패밀리의 우두머리는 찰스 맨슨이라고 자백했다.

 

맨슨에게 현혹된 추종자들이 하나 둘 맨슨 주변으로 몰려들어

찰스 맨슨(1934~2017)은 누군지 알지 못하는 아버지와 매춘부였던 알코올 중독자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10대 초반부터 절도와 강도 등 잡다한 범죄를 일삼으며 감옥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던 30대 중반의 백인 남성이었다. 테이트 살해 당시 35살이었던 맨슨이 감옥에서 보낸 기간은 인생의 절반(17년)이나 되었다. 감옥은 그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준 교육의 온실이었다.

맨슨은 1967년 출소 후 히피 생활이 제격이라고 생각하고 당시 미국 히피들의 온상지였던 샌프란시스코의 헤이트 애슈베리에 터를 잡았다. 자신을 예수처럼 보이기 위해 머리와 수염을 기르고 자신을 유랑시인이라고 소개하며 종말과 환경, 인종문제 등을 그럴듯하게 늘어놓았다. 감옥에서 배운 기타 실력은 수준급이었고, 음악에 대한 자부심도 컸다. 미국의 유명 록밴드 ‘비치 보이스’의 한 멤버와는 친분이 깊었고, 맨슨이 작곡한 노래(Cease to Exist)에 비치 보이스가 새 가사와 제목(Never Learn Not to Love)을 붙여 내놓을 정도로 음악적 재능도 뛰어났다. 테이트 살해 현장에 남긴 ‘헬터 스켈터’가 비틀스의 노래 제목인데서 알 수 있듯 맨슨은 비틀스의 광팬이기도 했다.

이런 맨슨에게 현혹된 추종자들이 하나 둘 맨슨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추종자들 중에는 백인 중산층 여성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교주와의 잠자리를 축복으로 여겼다. LSD 등 환각제는 지천에 널려 있었다. 맨슨은 음악과 마약, 섹스로 추종자들을 서서히 취하게 하면서 ‘맨슨 패밀리’를 결성한 뒤 사교 집단의 교주 역할을 했다. 1968년 4월 맨슨은 최소 18명인 여성들과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포기한 추종자들을 데리고 애슈배리를 떠나 유랑생활을 시작했다. 특정한 곳에 정착할 때는 집단섹스와 환각제에 탐닉하는 원시적인 공동체 생활을 했다. 이마엔 나치 문양 ‘하켄크로이츠(Hakenkreuz·갈고리 십자가)’를 새겼고 추종자들은 그를 따라 이마에 X 문양을 새겼다. 맨슨은 ‘헬터 스켈터’를 언젠가 다가올 ‘운명의 날’을 의미하는 암호로 사용했고 ‘맨슨 패밀리’는 인류 최후의 인종 전쟁인 ‘헬터 스켈터(helter skelter)’가 곧 일어날 것이라고 믿었다.

 

35명을 숨지게 한 살인 및 살인 교사 혐의로 기소돼

맨슨은 1969년 7월 말 마약으로 큰 돈을 번 남자에게 돈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그 남자를 살해하도록 패밀리에 지시했다. 맨슨 패밀리의 첫 번째 살인이었다. 두 번째 살해 대상은 맨슨이 음반 제작을 도와달라고 요청했을 때 맨슨의 음악성이 매우 저질이라고 비판하며 거절한 음악 프로듀서였다. 맨슨은 프로듀서에게 앙심을 품고 ‘맨슨 패밀리’에게 또다시 살해명령을 내렸다. 맨슨이 지목한 프로듀서의 집은 주인이 바뀌어 영화배우 테이트가 살고 있었으나 ‘맨슨 패밀리’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채 테이트를 살해했다. 맨슨의 이 잔혹한 살인 사건 후 미국인들은 히피가 위험한 존재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 살인 사건이 1960년대 히피 문화가 종지부를 찍었다고 평가하는 의견도 있다.

맨슨은 결국 체포되어 자신을 추종하는 ‘맨슨 패밀리’의 일부 멤버들과 함께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모두 35명을 숨지게 한 살인 및 살인 교사 혐의로 기소되어 1970년 7월부터 재판을 받았다. 재판에서 한 정신분석가가 맨슨을 ‘망상형 정신 분열증’으로 진단했을 때 맨슨은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며 “나는 사람을 죽이라고 명령한 적이 없다. 너희들의 아이가 자신의 나이프로 해치운 것이다. 그런 교육을 한 것은 내가 아니고 너희들”이라며 항변했다. 맨슨 체포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던 수전 앳킨스는 재판 도중 “8명을 살해한 것이 중요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베트남전에 참전한 미군이)네이팜탄으로 수천명을 죽인 일은 중요했나요?”라고 대답해 질문자를 곤혹스럽게 했다.

맨슨은 1971년 3월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1972년 6월 캘리포니아에서 사형제도가 폐지된 덕에 무기징역형으로 바뀌어 목숨은 부지했다. 12차례 가석방을 요청했지만 매번 거부당했다. 2014년에는 옥중에서 54세 연하의 여성과 결혼하겠다며 결혼허가증을 발급받기도 했지만, 둘의 결혼 전에 허가가 만료되어 무산되었다. 결국 감옥에서 천수를 누리다 2017년 11월 19일 감옥에서 자연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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