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유일한과 중국계 아내 호미리
by 김지지
문재인 대통령이 1월 21일 경기도 부천에 소재한 유한대의 졸업식에 참석했다. 유한대는 설립자 유일한 박사의 교육철학에 따라 1962년 발족한 유한학원이 1977년 설립한 전문대학이다. 유일한 박사의 삶을 조명한다.
기업의 사회 환원 실천한 기업인
유일한(1895~1971)의 생전 기업 이념은 이랬다. “정성껏 좋은 상품을 만들어 국가와 동포에 봉사하고, 정직·성실하고 양심적인 인재를 양성·배출한다. 기업은 첫째 회사를 키워 일자리를 만들고, 둘째 정직하게 납세하며, 셋째 남은 것은 기업을 키워준 사회에 환원한다.” 실제로 유일한은 자신이 정한 이념을 모두 실천했다.
유일한은 평남 평양에서 9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도매상으로 돈을 벌어 자식들을 일찌감치 해외 유학을 보낼 정도로 교육열이 높았다. 장남 유일한은 미국, 차남은 러시아, 3남은 중국, 5남은 일본으로 보냈다. 유일한은 부모 슬하에서 응석을 부릴 나이인 9살 때 박장현 대한제국 순회공사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다.

1905년 2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유일한이 처음 둥지를 튼 곳은 미국 중부 네브래스카 주 커니라는 작은 농촌 도시였다. 당시 박장현의 미국행에는 독립운동가 박용만과 정한경 등 여러명이 동행했다. 유일한은 박용만이 1909년 네브래스카 주 헤이스팅스에 설립한 ‘한인소년병학교’에서 훈련(1909~1912)을 받았다. 그 때 형성된 민족의식과 자주독립 사상은 이후 유일한이 전개한 독립운동의 원천이 되었다.
유일한은 헤이스팅스고교 시절부터 신문팔이, 구두닦이, 식당 종업원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는 주경야독으로 1916년 미시간주립대 상과에 입학했다. 대학 때는 중국에서 수입한 특산물을 보부상처럼 갖고 다니며 팔았다. 1919년 4월, 150여 명의 재미 한인 대표가 필라델피아에 모여 사흘간 한인자유대회를 열었을 때는 결의문을 낭독했다.

서재필, 버드나무 그려진 목각품 선물하며 격려
유일한은 1920년 대학 졸업 후 뉴욕의 제너럴일렉트릭(GE)에 입사했다. 당시 GE는 중국을 비롯한 동양 시장에 진출할 생각으로 유일한에게 동양 지역의 총지배인을 맡기려고 했으나 유일한은 거절하고 1922년 퇴사해 미국인 대학 동창과 숙주나물을 판매하는 ‘라초이 식품회사’를 차렸다. 중국인들이 즐겨 먹는 만두에 숙주나물(중국어로 라초이)이 필수적으로 들어간다는 것에 착안한 사업 아이템이었다. 유일한은 미국의 곡창지대인 오하이오주 등에서 원료인 녹두를 대량으로 구입해 숙주나물을 재배하고 통조림을 만들어 큰 성공을 거뒀다.
유일한은 자신감이 생기자 1924년 서재필, 정한경 등과 함께 한국, 중국, 러시아 등의 토산품을 취급하는 ‘뉴일한(New Il Han)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사장과 부사장인 서재필과 정한경도 일부 출자했지만 최대주주는 유일한이었다. 1925년 유일한은 중국계 여성 호미리와 결혼했다. 그는 동양 여성 최초로 코넬대에서 소아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 소아과 의사였다.
유일한은 1926년 모든 사업을 접고 귀국선에 몸을 실었다. 서재필은 고국으로 떠나는 유일한에게 딸이 만든, 버드나무가 그려진 목각품을 선물하며 “자네 성이 버들 류(柳)이니 버드나무처럼 무성하게 잘 자라기를 바란다”며 격려했다. 이 버드나무 목각품은 장차 ‘버들표 유한양행’ 로고가 된다.

귀국 후 유일한은 식민지 조선의 열악한 의료 현실을 의식해 1926년 12월 10일 서울 종로2가에 ‘유한양행’이라는 상호의 가게를 열었다. 아내는 같은 건물 2층에 소아과를 개원해 틈틈이 의료봉사 활동을 펼쳤다. 유한양행은 의약품을 주로 팔았으나 화장지, 생리대, 아이보리 비누, 치약 등 위생용품과 화장품, 껌, 초콜릿 등도 수입해서 팔았다.
국내 제약업체들이 ‘신비의 명약’ ‘만병통치약’이라고 허위 과대광고를 일삼고 있을 때 유한양행은 효능을 명시하고 의사 부인 호미리와 책임 약제사의 이름, 회사 전화번호까지 싣는 등 파격적인 광고로 눈길을 끌었다. 다른 제약회사와 달리 소량 판매를 시작한 것도 성장의 디딤돌이 되었다. 1928년에는 영문으로 쓴 ‘한국에서 내 어린 시절’을 발간해 한국의 의상, 음식, 주택, 결혼, 명절놀이 등을 해외에 소개했다.
미 정보기관 OSS 한국 담당 고문으로도 활동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났을 때는 만주, 대련, 천진 등 중국으로 시장을 확대하고 1933년 자체 개발상품 1호인 ‘안티푸라민’을 선보여 유한양행의 성장을 견인했다. 1934년에는 미국 일변도로 되어 있는 거래처 다변화를 위해 유럽 각국을 둘러보았다. 독일에서는 게르하르트 도마크 박사가 1932년 항균효과를 발견한 프론토질을 동양 최초로 도입하기로 계약을 체결했다. 프론토질은 염증 치료제로 효능이 좋아 당시만 해도 기적의 약으로 불렸다. 유한양행은 ‘GU 사이드’라는 브랜드로 1935년부터 팔았다. 약은 불티나게 팔려 유한양행 신화 창조의 일등 공신이 되었다. 유한양행은 여세를 몰아 네오톤 토닉(결핵 치료제), 안도린(피부병 치료제), 헤노톨(구충제) 등도 소량씩 생산·판매했다. 매출액은 급증하고 공장은 경기 부천 등에 증설되었다. 중국, 베트남, 대만 등 해외 출장소 직원까지 모두 합하면 종업원은 1,000여 명이나 되었다.
유일한은 1939년 수출 시장 개척차 미국으로 건너가 1941년 남가주대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1941년 4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해외한민족대회’를 주도적으로 개최했다. 그가 미국에서 체류하고 있던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유일한은 1942년 미 정보기관 OSS 한국 담당 고문으로 활동하고 LA 재미 한인들의 맹호군을 창설하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또한 재미 한인동포들로 구성된 특수공작조를 한국에 침투시켜 무장 항일운동을 벌이려던 OSS의 ‘냅코 작전’에도 가담했다.
당시 OSS의 중국 지역 담당은 소설 ‘대지’의 작가인 펄 벅이었기 때문에 유일한과 펄 벅은 이것을 인연으로 오래도록 친교를 맺었다. 펄 벅이 1967년 부천 심곡동에 ‘소사 희망원’을 개원할 때 유일한이 1만여 평의 대지를 무상으로 기증한 것도 이런 인연이 작용했다.

전쟁이 장기화하자 서울의 유한양행이 곤경에 빠졌다. 사장이 미국에서 돌아오지 않고 미국계 회사라는 이유로 일제의 탄압을 받은 것이다. 회사 간부 전원이 경찰서로 연행되기도 하고 표적 세무조사도 받았다. 1943년 8월에는 유한양행의 ‘양행(洋行)’이 적성적인 표시라는 이유로 회사 이름을 유한제약공업주식회사로 바꿔야 했다.
“한평생 검소하게 살고 남은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유언 남겨
유일한은 해방 후인 1946년 7월 귀국해 대한상공회의소 초대 회장을 맡았다가 그해 12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1948년 8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상공부 장관을 맡아 달라고 전갈을 보냈으나 거절했다. 일제 때부터 이승만의 정치 노선과 독선적 행태에 찬동하지 않은 데다 기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다. 6·25 전쟁 발발로 늦어진 귀국은 1953년 7월에야 이뤄졌다.
유한양행은 1962년 제약업계 최초로 주식을 상장하는 등 전성기를 구가했다. 유일한은 회사가 안정적인 성장세를 유지하자 필생의 목표인 교육 사업을 추진했다. 재단법인 ‘유한학원’(1962년)과 ‘유한공고’(1964년)를 설립했다. 1969년 10월 30일에는 부사장에게 대표회사 회장직을 물려주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50년 가까이 일궈온 자신의 기업을 혈연·인척 관계가 전혀 없는 사람에게 물려준 것이다.

1971년 3월 11일 운명한 뒤 유일한의 유서가 공개되었을 때 세상은 유언장 내용에 다시 한 번 감동했다. 7살짜리 손녀 유일링에게만 대학까지의 학자금으로 1만 달러를 물려주었을 뿐 아들과 딸, 심지어 아내에게도 한 푼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들에게는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자립해서 살아가라”며 유산을 남기지 않았고, 딸 유재라에게는 “어린 학생들이 뛰놀게 하라”며 자신의 묘가 있는 유한공전 내 동산 부지 5,000평만 남겼다. 자신의 유한양행 주식 14만941주 전부도 사회에 환원했다. “기업은 나라와 민족의 것이다. 한평생 검소하게 살고 남은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는 유일한의 뜻이 그대로 실현된 것이다. 이런 그를 기념해 2005년 경기 부천시 유한대학 앞 6㎞ 구간에 ‘유일한로’가 조성되었다. 기업인의 공을 기려 길에 이름을 붙인 것은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의 호에서 딴 울산의 ‘아산로’에 이어 두 번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