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연인과 부부 ⑩] 멕시코가 낳은 세계적인 여성 화가 프리다 칼로, 남편(디에고 리베라)의 바람기 견디며 결혼·이혼·재혼으로 점철된 애증의 삶 살면서도 예술혼 꽃피워

↑ ‘두 프리다’(1939년)를 그리고 있는 프리다 칼로

 

☞ [연인과 부부] 시리즈 전체가 궁금하다면 클릭!!

 

by 김지지

 

멕시코의 벽화운동은 20세기 세계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문화운동이자 사회운동이었다. 문맹의 민중에게 멕시코혁명의 성과와 민족의 정체성을 가르치자는 취지로 벽화운동을 처음 구상한 것은 1920년 12월에 출범한 알바로 오브레곤 정부였다. 그에 맞춰 벽화운동을 선도한 주역은 디에고 리베라(1886~1957), 호세 오로스코, 다비드 시케이로스 3인이었다. 그중에서도 으뜸은 국제적 명성과 영향력에서 앞선 리베라였다.

리베라는 멕시코의 산 카를로 아카데미 미술과를 졸업하고 1908년 스페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가 일시적으로 귀국했을 때 멕시코에서는 1910년 10월 디아스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멕시코혁명이 한창이었다. 그러나 리베라는 혁명에 동참하지 않고 1911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갔다. 파리에서는 자유분방한 소용돌이에 몸을 맡겨 이런저런 여성들과 어울리며 그림에 심취했다. 주로 입체파(큐비즘)의 영향을 받았으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프레스코 벽화에서도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 사이 그의 조국 멕시코에서는 오브레곤이 1920년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10년에 걸친 혁명의 혼란을 잠재웠다. 오브레곤은 혁명의 에너지를 계속 이어가고 국민에게 민족주의를 고취하기 위해 벽화에 주목했다. 리베라는 정부의 이런 뜻을 알고 1921년 멕시코로 돌아와 국립예비학교의 벽화 작업을 시작했다. 1922년 9월 시작해 수년간 계속된 교육부 청사 내부 벽화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벽화를 그리고 있는 디에고 리베라

 

리베라는 멕시코 민중의 진솔한 생활상과 멕시코혁명 등을 풍부하고 다양한 색채로 변화에 담았다. 민중은 지지와 애정으로 화답했다. 멕시코 공산당에 입당한 그에게 공산주의는 그림을 그려야 할 이념적 토대였고 때로는 무기였다. 다만 집단적인 것보다는 개인적인 것을, 정치보다는 예술을 우선시했기 때문에 공산당의 지시를 곧이곧대로 따르지는 않았다. 1927년, 8개월간 소련을 방문했을 때도 소련 미술의 관료적 획일성을 거침없이 비난했다. 이후에도 스탈린의 정책을 반대하는 일이 잦자 1929년 멕시코 공산당이 그를 당에서 축출했다.

 

멕시코 벽화운동의 으뜸은 디에고 리베라 

리베라가 프리다 칼로(1907~1954)를 처음 만난 것은 멕시코의 최고 명문인 국립예비학교에서 벽화를 그리던 1923년이었다. 당시 칼로는 독일 출신인 유대인 아버지와 혼혈 메스티소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국립예비학교를 다니던 16살의 꿈 많은 소녀였다. 하지만 그 만남은 일회적이어서 지속되지는 않았다.

칼로는 6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왼쪽 다리를 절었다. 그래서 1922년 국립예비학교에 진학해 의사를 꿈꿨다. 그러나 그 꿈은 18살 때인 1925년 9월 17일 하교길에 타고 있던 버스가 전차에 들이받히면서 산산이 부서졌다. 칼로는 옆구리 한복판을 뚫고 들어온 철제 난간이 척추와 골반을 관통해 허벅지로 빠져나오는 중상을 당했다. 척추는 허리 부분에서 세 군데가 부러지고 대퇴골 경부는 끊어졌다. 왼쪽 다리에는 골절이 11군데나 있었고 오른쪽 발은 탈구되고 으스러졌다. 왼쪽 어깨는 빠지고 골반뼈는 세 동강이 났다. 살아 있다는 게 기적이었다.

수술 후에도 칼로는 온몸에 깁스를 한 채 수개월을 병원과 집의 침대에 묶여 지내야 했다. 운명 앞에서 칼로는 의사의 꿈을 접고 붓을 들었다. 칼로는 침대에 누운 채 부모가 머리맡에 붙여놓은 거울을 들여다보며 자화상을 그렸다. 훗날 “나는 병이 난 것이 아니라 부서졌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는 동안만은 행복했다”고 술회했다. 그림은 모르핀으로도 사라지지 않는 고통을 잊게 해주었다. 칼로가 이렇게 병상에 누워 있을 때 리베라는 왕성하게 벽화운동을 펼쳤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것은 첫 만남 후 5년이 지난 1928년이었다. 그때도 칼로의 예비학교에서 벽화 작업을 하고 있던 리베라에게 칼로가 먼저 말을 걸면서 운명의 소용돌이가 쳤다. 자신의 그림에 대한 재능과 열정을 평가받으려는 칼로에게 리베라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이 과정에서 사랑이 싹텄다. 당시 리베라는 40대였으나 여전히 매력이 넘쳐흘렀다.

프리다 칼로. 왼쪽부터 12살, 19살, 25살 때 모습

 

리베라가 21살이나 많고 네 아이의 아버지인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세 번째 아내 운명 받아들여  

칼로는 리베라가 자신보다 21살이나 많고 네 아이의 아버지인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세 번째 아내가 될 것을 결심했다. 칼로의 부모는 리베라가 공산주의자이고 여성 편력이 심하고 두 번이나 결혼했다는 이유로 반대했지만 칼로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코끼리와 비둘기의 결혼”이라며 반대하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1929년 8월 21일 결혼을 강행했다.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

 

리베라는 1930년 11월 미국 샌프란시스코 증권거래소와 캘리포니아 미술학교의 벽화를 제작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 1931년 12월에는 뉴욕현대미술관 전시회에 143점의 그림을 출품해 호평을 받았고 1932년 헨리 포드의 주문으로 디트로이트 미술학교에 자동차 공장의 노동자들을 그렸다.

1933년 3월부터는 자신의 벽화 활동에서 가장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게 될 벽화 작업에 참여했다. 그것은 록펠러가가 뉴욕 심장부에 건설하고 있는 라디오시티(현재의 록펠러센터)의 대형 홀을 장식할 거대한 벽화였다.

리베라가 벽화 ‘교차로에 선 사람’을 그리기 시작할 때만 해도 작업은 순조로워 보였다. 그러나 벽화 중심부에 그려진 노동 지도자의 모습이 레닌을 닮아가면서 5월부터 건물주와 불화했다. 그러지 않아도 공산당원을 지원한다는 비난에 예민해 있던 록펠러가는 레닌의 초상을 익명의 얼굴로 대체해달라고 요청했다. 리베라가 거절하자 록펠러가는 5월 9일 미완성 벽화를 천으로 가리고 6개월 뒤에는 벽화를 없애버렸다. 리베라는 1934년 록펠러센터가 파괴한 그림을 재현하면서 술집에서 술잔을 들고 여자와 손잡고 있는 존 D. 록펠러 주니어의 초상화를 집어넣는 것으로 복수했다.

 

넬슨 록펠러가가 그림에 레닌 등 공산주의자들의 얼굴이 들어갔다며 그림을 파괴하자 리베라는 멕시코로 돌아가 파괴된 작품을 재현하면서 넬슨 록펠러의 아버지인 존 D. 록펠러의 초상을 집어넣는 것으로 복수했다. 술집에서 안경을 쓰고 술잔을 들고 여자와 손잡고 있는 사람(그림 가장 오른쪽)이다. 위 그림은 ‘인간, 우주의 지배자(Man, Controller of the Universe, 4.80×11.45m)’ 제목의 그림이고 아래는 그림의 일부 장면을 확대한 것이다. 왼쪽부터 레닌, 트로츠키·마르크스 등, 존 D. 록펠러

 

“내 평생에 겪은 두 차례의 대형 사고는 전차가 나를 들이받은 것과 리베라를 만난 것”  

리베라가 이렇게 활발히 활동하는 동안 칼로의 신체적 고통은 멈추지 않았다. 무엇보다 사고로 인한 자궁 손상으로 그토록 원하던 아이를 세 번이나 임신하고도 그때마다 지워야 하는 현실은 그의 영혼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각종 후유증 때문에 수십 차례나 수술을 받아야 하는 고통 속에서도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은 리베라의 바람기였다.

결혼 전부터 수많은 여성 편력을 보였던 리베라는 결혼 후에도 외도를 멈추지 않았다. 칼로는 인내했으나 자신의 한 살 어린 여동생과 바람을 피운 사실만은 참을 수 없었다. 동생의 배신이 드러난 건 1934년 여름이었다. 그는 당시의 심정을 “내 평생에 겪은 두 차례의 대형 사고는 전차가 나를 들이받은 것과 리베라를 만난 것”이라고 언급했다.

‘두 프리다’(1939년, 173×173㎝, 멕시코시티 현대미술관). 동맥으로 연결된 2명의 프리다를 통해 자신의 복잡한 감정을 표현했다. 식민지 시대풍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는 왼쪽 여인은 고통당하고 있는 프리다 자신이다. 반 토막이 난 심장의 동맥에서는 피가 떨어지고 있다. 오른쪽 멕시코 전통의상을 입고 있는 프리다는 디에고가 사랑하는 여인이다. 한 손에 남편의 어린 시절 사진을 들고 있고 심장은 건강하다. 사랑의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그녀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했다.

 

절망감에 빠진 칼로는 남편을 떠나 자유롭게 여행하며 이성과 동성을 가리지 않고 사랑을 나눴다. 1937년 1월 트로츠키 부부가 멕시코로 망명했을 때는 자신의 친정집을 피난처로 제공하고 트로츠키와 밀회를 나누었다. 멕시코를 방문한 초현실주의 대가 앙드레 브르통과의 관계도 각별했고, 사진작가와도 사랑에 빠져 뉴욕에서 행복한 몇 달을 보낸다. 그러면서도 리베라를 떠나지는 못했다. 칼로는 1939년 파리의 대규모 전시회에 참가했다. 그때 전시된 그림은 20세기의 멕시코 화가로서는 최초로 루브르 미술관에 소장되었다.

 

총 143점의 회화 작품 중 55점이 자화상

파리에서 귀국했을 때 그를 기다린 것은 리베라의 이혼 요구였다. 외도와 배신을 참아내던 그에게 막상 닥친 이혼 요구는 분노와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두 사람은 결국 1939년 11월 6일 이혼했다. 하지만 1년 후 칼로의 건강이 악화해 비극적 결말을 가져올지 모른다는 의사의 충고를 받아들여 리베라가 재결합을 요청했다. 칼로는 성관계를 갖지 않고 생활비는 각자 해결한다는 조건을 내걸고 재혼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1940년 12월 8일 다시 부부가 되었다.

리베라와 재혼 후 몇 년간은 칼로에게 가장 평온한 시기였다. 시립미술학교 교수로 초빙되고 그림에도 더욱 몰입해 리베라의 아내가 아닌 화가 칼로로 이름을 알렸다. 문제는 계속 악화하는 건강이었다. 진통제와 알코올 없이는 견딜 수 없는 통증이 계속되었다. 결국 1946년 뉴욕에서 척추 수술을 받고 1950년 오른쪽 발가락을 잘라냈다.

누워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프리다 칼로

 

1953년 리베라는 칼로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고 칼로의 회고전 준비를 서둘렀다. 그것은 그의 마지막 파티였다. 칼로의 침대가 화랑으로 옮겨지고 밖에는 앰뷸런스가 대기했다. 칼로는 1953년 4월 13일 개막한 전시회에서 침대에 누운 채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 노래하고 즐거워했다. 파티 이후는 끔찍했다. 몇 달 뒤 오른쪽 다리에 괴저가 도져서 다리를 잘랐으나 결국 1954년 7월 13일 47년의 생을 마감했다.

리베라는 칼로 사후인 1955년 6월 자신의 조수이자 매니저 여성과 몰래 결혼했다. 사실 이 결혼은 칼로가 죽기 전, 매니저에게 자신이 죽으면 리베라와 결혼해서 그를 돌봐 달라고 부탁해 이뤄진 것이다. 리베라는 2년 뒤 1957년 11월 24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칼로는 총 143점의 회화 작품을 남겼다. 그중 55점이 자화상이다. 짙고 두꺼운 눈썹, 붉은 입술, 정면을 응시하는 강렬한 눈빛의 자화상에는 그녀가 처한 육체적 고통과 시련이 초현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 왼쪽은 ‘원숭이와 함께 있는 자화상, 1940년)이고 오른쪽은 ‘내 마음 속의 디에고'(1943년)다. 짙고 두꺼운 눈썹, 붉은 입술, 정면을 응시하는 강렬한 눈빛이 특징이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