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거스 히딩크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 감독 부임

↑ 거스 히딩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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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축구계의 구습 끊고 실력 위주로 대표팀 꾸려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네덜란드 태생의 거스 히딩크(1946~ )만큼 우리 국민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자신감을 불어넣어준 인물은 없었다. 대한민국 명예국민 제1호가 되었고 서울과 부산의 명예시민이 되었으며 한국 축구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그의 열정적인 ‘어퍼컷 세리머니’는 한국인에게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히딩크는 현역 시절 네덜란드 PSV에인트호번 등 4개 팀을 전전했던 평범한 미드필더였다. 1982년 친정팀이었던 네덜란드 PSV에인트호번의 코치로 입단하고 1987년 같은팀의 감독 지휘봉을 잡으면서 지도자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PSV에인트호번이 3년간 네덜란드 에레디비시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트레블(3관왕)을 달성해 주목을 받았고 1988년엔 PSV에인트호번을 유러피언컵(현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으로 이끌어 명장의 길을 밟아나갔다. 이후 페네르바흐체(터키), 발렌시아와 레알 마드리드(이상 스페인), 첼시(잉글랜드) 등 명문 클럽을 지휘하고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선 네덜란드 축구대표팀을 맡아 조별리그에서 한국을 5-0으로 대파한 뒤 4강까지 오르는 성과를 냈다.

이런 히딩크가 2000년 12월 18일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 감독의 사령탑으로 계약서에 서명했으니 축구팬들의 기대가 컸던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히딩크는 부임 후 코칭스태프에게 “어려운 곳에서 어려운 상대와 어려운 경기를 해야 우리의 약점이 보이고 보완할 방법을 찾을 수 있다”며 “쉬운 길, 어려운 길 중에 어려운 쪽으로 가겠다”고 선언했다. 축구팬들은 이런 배경을 몰랐지만 출발은 측근의 예상대로 불안했다. 2001년 대구에서 가진 컨페더레이션스컵 프랑스전과 체코와의 평가전에서 0-5로 연달아 대패, ‘오대영’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히딩크는 그래도 자신감을 잃지 않고 자신의 스타일대로 한국팀을 개조했다. 학연·지연 등이 알게 모르게 작용하고 있던 한국 축구계의 구습을 끊어 실력 위주로 대표팀을 꾸렸다. 무명이나 다름없던 박지성 선수가 훗날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한 것도 히딩크의 이런 능력 위주의 선발 원칙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선수들을 사로잡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선수 개개인에 대한 공개적인 평가나 비난을 삼가해 선수들로부터 신뢰를 쌓았다.

그는 ‘토털 축구’를 추구했다. 선수들에게는 서너 가지 포지션을 동시에 소화해 내는 ‘멀티 플레이어’를 요구했다. 그러려면 체력이 관건이었다. 힘 좋은 유럽 축구와 현란한 발재간을 자랑하는 남미의 기술축구를 맞상대하려면 체력을 바탕으로 한 우리만의 축구가 필요했다. 월드컵이 임박한 2002년 3월까지도 파워 프로그램으로 선수들과 직접 몸싸움을 하며 훈련을 계속해 나갔다. 베스트 11은 고사하고 뚜렷한 전술 훈련도 없이 매일 체력만 다졌다. 치열한 주전 경쟁을 시켜 경기력을 극대화하는 전략이었다. 월드컵이 열리는 2002년이 되었어도 성적이 나아지지 않자 “언제까지 테스트만 하다 말 것인가”, “베스트 11을 조기 확정해 포지션을 전문화해야 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들끓었다.

히딩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베스트 11은 없다. 베스트 23이 있을 뿐이다”라며 자기 길을 갔다. 대한축구협회도 묵묵히 히딩크를 믿고 밀어주었다. 그래도 원성이 끊이지 않았다. 일부 언론은 “한국 축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언어의 마술사’가 아니라 ‘능력 있는 축구 지도자’”라며 몰아세우기까지 했다.

사실 히딩크는 ‘언어의 마술사’였다. 말이 안 통하는 한국 선수들과 어떻게 의사소통을 하느냐는 질문엔 “땀으로 그들과 대화했습니다”라며 순발력 있게 대답하는가 하면, 체코에 0-5로 패했을 때는 “많이 맞아봐야 겁이 없어지고 배짱도 생긴다”고 응수했다. 비등한 비난에는 “달리는 말에 채찍질도 좋지만 상처를 입혀서는 안 된다”고 일침을 가했고, “약팀과의 승수 쌓기는 나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어려운 길을 택했다”며 중심을 잃지 않았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히딩크만큼 우리 국민을 하나로 묶어준 인물은 없어

히딩크호가 달라진 모습을 보인 것은 2002년 4월이었다. 코스타리카를 2-0으로 물리친 후 상승세를 타기 시작한 것이다. 개막 한 달을 앞둔 4월 30일 마침내 최종 엔트리 23명이 발표되었다. 월드컵을 코앞에 두고는 잉글랜드와 프랑스 등 유럽의 강호들과 차례로 평가전을 치러 국민들에게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감독 취임 초기 “월드컵 16강 진출은 어렵지만 1승은 가능하다”며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던 히딩크는 개막 1개월을 앞두고서는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겠다”며 목표를 상향 수정했다. 그의 훈련 방식은 경기를 치를수록 진가를 발휘했다. 우리와 경기를 치른 폴란드의 한 선수가 “한국 선수들은 위치가 너무 자주 바뀌어서 누굴 막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할 정도로 멀티 플레이어 훈련이 적중했음을 입증해 보였다.

그의 승부사 기질은 2002년 5월 31일 개막한 한일월드컵 때 이탈리아와 16강전(6월 18일)에서 0-1로 지고 있을 때 그대로 드러났다. 수비수를 빼고 세 사람의 공격수를 교체 투입한 것은 패배할 가능성이 더 높은 결정이었는데도 그는 그렇게 했고 결과적으로 승리를 끌어냈다. 한국은 마침내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뤄냈다. 18개월의 짧은 기간 한국 축구는 세계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진입했다.

‘언어의 마술사’는 경기 내내 말의 성찬을 이어갔다. “우리도 반란의 주인공이길 바란다”(개막전에서 세네갈이 프랑스를 꺾자), “와인 한 잔 마시고 이 밤은 쉬고 싶다”(포르투갈을 꺾고 16강 진출을 확정짓자), “나는 아직도 승리에 굶주려 있다”(이탈리아와의 16강전을 앞두고), “한국은 폭주 기관차다. 나조차 우리 팀을 막을 수 없다”(스페인과의 8강전을 앞두고). 외신들은 히딩크를 월드컵 최고 지도자로 선정했다. 우리 국민은 그 정도로 만족할 수 없어 그를 ‘영웅’으로 불렀고 한국 이름 ‘희동구’를 선물했다.

히딩크는 2002년 한국 대표팀을 떠나서는 PSV에인트호번 감독을 다시 맡아 활약하다가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호주를 16강에 진출시키고 유로 2008에선 러시아를 맡아 4강에 올라 지도자로 전성기를 구가했다. 2014년 무릎이 망가져 은퇴를 고민했으나 한국에서 수술을 받은 뒤 터키 축구대표팀과 23세 이하 중국대표팀 등도 이끌며 왕성하게 활동했다. 칠순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노익장을 자랑했던 그의 마지막 무대는 카리브해에 위치한 인구 16만의 작은 섬나라 퀴라소였다. 히딩크는 네덜란드 자치령인 퀴라소에서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 도전하며 마지막 열정을 불태웠다. 히딩크 효과는 퀴라소가 북중미 1차예선을 무패(3승1무)로 통과하면서 잘 드러났다. 그러나 코로나19에 감염되어 2차 예선을 제대로 지휘하지 못한 사이 파나마의 벽을 넘지 못하며 도전도 중단되었고 히딩크도 2011년 9월 은퇴함으로써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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