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조선·일본, 강화도조약 체결

‘운요호(雲揚號) 사건’을 계기로 조선과 일본 대표가 마주앉았다. 신헌과 윤자승,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와 이노우에 가로우(井上馨)가 양국의 협상 파트너였다. 구로다는 미국의 그랜트 대통령을 접견한 바 있는, 나름대로 국제적 안목을 지닌 육군 중장이었고, 이노우에는 영국 유학을 마친 국제파였다. 따라서 국제 경험을 쌓고 강온과 문무를 적절히 배합한 일본 대표와 여전히 중화사상에 젖어 중국을 하늘로 여기고 있는 조선 대표의 협상 수준이 같을 리 없었다.

일본은 이미 구미 각국과 조약을 체결하고 청나라와도 대등한 입장에서 청일수호조약(1871년)을 체결한 경험이 있어 국제조약에 관한 한 베테랑이었다. 이에 비해 조선은 한 번도 외국과 조약을 체결한 적이 없는 신출내기였다. 게다가 일본은 여차하면 무력까지 행사할 채비까지 갖춰 협상이라기보다 일방적 통고의 자리였다. 일본의 조약안 초안을 본 조선 대표의 첫 반응은 “조선국 앞에 ‘대(大)’자가 빠져있고 일본국에서 ‘황제’를 빼라”였다. 일본을 ‘대일본국 황제폐하’라고 표기한 것과 달리 ‘조선 국왕폐하’라고 표현했으니 당연한 반응일 테지만 문제는 조선의 생사를 가르는 중차대한 내용들로 가득한 조약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보다 의례적인 문구에 집착했다는 데 있었다. 일본이 만국공법, 즉 오늘날의 국제법에 기초한 조약 체결을 강조해 ‘조약’이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했던 조선 대표가 그 의미를 묻자 일본 측이 거만한 자세로 설명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1876년 2월 27일, 강화도조약 즉 조일수호조약이 체결됐다. 변화된 일본의 모습은 조약 문구에서도 나타났다. 그동안 양국간 공식문서 정본에 사용해오던 한문 대신 일본어를 공식 용어로 채택하고 한문은 문서 부본에만 사용한다는 원칙을 조약에 분명하게 명시한 것이다. 조약은, 조선을 중국 중심의 구질서에서 떼어내 자신의 속국으로 삼고자 한 일본의 치밀한 계략의 일환이었으나 조선은 아직 조약이 몰고올 파장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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