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2002한일월드컵 개막과 대한민국의 4강 신화

 

2002 한국·일본 월드컵은 아시아 첫 개최이자 월드컵 사상 첫 공동 개최

아시아 첫 개최이자 월드컵 사상 첫 공동 개최였던 2002 한국·일본 월드컵은 2002년 5월 31일 서울 상암경기장에서 프랑스-세네갈전을 시작으로 한 달간의 열전에 돌입했다. 전 세계 32개국이 출전한 제17회 한일 월드컵은 개막경기에서부터 이변을 연출했다. FIFA 랭킹 42위이자 첫 출전국 세네갈이 98년 대회 우승국 프랑스를 1-0으로 격침한 것이다.

한 달간 지구촌을 뜨겁게 달군 한일 월드컵의 최종 승자는 ‘축구 왕국’ 브라질이었다. 브라질은 6월 30일 일본 요코하마경기장에서 열린 독일과의 결승에서 ‘신 축구 황제’ 호나우두가 2골을 터뜨리는 활약에 힘입어 2-0으로 승리, 한일 월드컵의 대미를 화려하게 장식하며 첫 월드컵 통산 5회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호나우두는 대회 총 8골로 득점왕(골든슈)을 차지하며 세계 축구계의 황제에 등극했다.

한일 월드컵은 이변과 충격, 파란의 연속이었다. ‘월드컵 동네북’ 한국과 ‘유럽 변방’ 터키가 4강까지 눈부시게 약진했고 전 대회 우승팀 프랑스와 우승 후보 0순위 아르헨티나가 조별리그에서 탈락해 짐을 꾸렸다. 일본은 16강에 진출했고 미국 역시 8강까지 올라 ‘축구 불모지’라는 오명을 벗어던졌다. 전통의 강호 포르투갈이 1라운드에서 낙오했는가 하면 세네갈이 8강까지 진출, 아프리카 강세를 이어갔다. 최우수선수상인 골든볼은 독일의 골키퍼 올리버 칸에게 돌아갔고 브라질의 호나우두는 실버볼, 한국의 홍명보는 브론즈볼을 수상했다.

대회의 가장 큰 고민은 압박축구가 몰고 온 골의 감소였다. 결승전까지 64경기에서 나온 총 골 수는 161골. 경기 평균 2.51골로 1998년 프랑스 대회의 2.67골, 1994년 미국 대회의 2.71골보다 더욱 적어졌다. 1990년대부터 본격화한 압박축구가 완성 단계에 이르면서 골 가뭄이 빚어졌다는 분석이다. 세계 언론들은 “역사상 가장 훌륭한 월드컵”, “축구계의 판도를 재편하고 아시아의 축구를 세계에 과시한 대회”라며 높은 평점을 주었다. 또 “월드컵의 최대 승리자는 한국과 한국민들”이라며 열광적이지만 절도 있는 응원 문화와 한국 축구의 돌풍에 찬사를 보냈다.

굳이 외국 언론의 평을 들먹이지 않아도 월드컵의 진정한 승자는 세계를 놀라게 한 한국인의 열정과 뜨거운 응원이었다. 월드컵 내내 대한민국은 온통 붉은 물결이었다. 손에 태극기를 쥐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Be The Reds”라고 쓰인 붉은 티셔츠를 입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응원을 주도한 ‘붉은 악마’ 회원은 14만 명이었지만 거리응원에 나선 붉은 악마들은 무려 2,200만 명에 달했다. 그들은 질서정연한 모습으로 아스팔트 위에 앉아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을 연호했다.

TV를 통해 이 모습을 본 세계인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뉴욕타임스는 FIFA의 부정부패와 지나친 상업주의, 스타급 선수들의 피로 누적으로 인한 경기 질 저하, 입장권 판매 부진 등을 아쉬운 점으로 지적하면서도 “축구 쿠데타를 연상시키는 한국 붉은 악마들의 열광적인 응원은 이러한 문제점을 보상하기에 충분했다”고 전했다. 정말 아쉬웠던 점은 월드컵 폐막식을 하루 앞둔 6월 29일 북한이 서해교전을 일으켜 월드컵 축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었다. 오랫동안 쌓아온 공들을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만드는 그들의 반민족적인 행위에 우리 국민들은 다시 한 번 치를 떨었다.

 

거리마다 태극기 물결로 넘쳐났고 “대~한민국” 외침이 메아리쳐

2002년 6월 4일 오후 8시 30분, 대한민국이 폴란드와 벌인 첫 경기가 부산월드컵경기장에는 5만여 관중이 들어찼다. 온통 붉은색 물결이었다. 황선홍이 첫 골을 터뜨리고 뒤이어 유상철이 한 골을 보태 2-0으로 첫 승을 기록했다. 월드컵 출전 사상 첫 승이었고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 처음 출전한 뒤 48년 만에 거둔 감격의 1승이었다. 한국은 그동안 총 5차례나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지만 단 1승도 거두지 못하고 4무 10패의 초라한 성적에 머물러 있었다.

두 번째 열린 미국전(6월 10일)에서는 안정환이 월드컵 최초의 헤딩슛을 성공시키며 1-1 무승부를 기록, 16강 진출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3차전(6월 14일)에서 만난 포르투갈은 D조 최강이었지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불타 있는 한국팀에게 더 이상 두려운 상대는 아니었다. 박지성이 천금 같은 펠레슛을 성공시켜 1-0으로 승리, 사상 최초로 16강 진출이 확정되었다. 그것도 2승 1무, 조 1위로 16강에 오른 것이다.

16강 진출만으로도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다. 여기서 멈춘다 해도 여한이 없었으나 거스 히딩크 감독은 “나는 아직 배가 고프다”며 승리에 목말라했다. 한국 축구사에서 가장 극적인 경기는 이탈리아와의 16강전(6월 18일)이었다. 전반 4분, 한국은 절호의 기회 페널티킥을 얻어냈으나 안정환이 실축하는 바람에 불길한 기운에 휩싸였다. 게다가 이탈리아에 1골을 허용, 8강의 문턱에서 좌절하는 듯했다. 그러나 후반 43분 설기현이 동점골을 터뜨리면서 기적이 일어났다. 한반도의 밤은 광란에 빠졌다. 승부는 연장전으로 돌입했다. 후반 12분 마침내 안정환이 연장 골든골을 성공시켜 역적에서 영웅이 되었다. 한반도의 거리마다 태극기 물결로 넘쳐났고 “대~한민국”의 외침이 메아리쳤다.

8강전(6월 22일) 상대는 스페인이었다. 경기 내내 일진일퇴 공방전을 펼쳤으나 혈투는 득점 없이 끝났다. 승부차기에서 한국은 4-3으로 승리, 마침내 4강 신화를 달성했다. 축제는 밤이 새도록 끝없이 펼쳐졌다. 정부는 병역 혜택을, 대한축구협회는 1인당 3억 원의 특별 보너스를 결정했다. 준결승(6월 25일)에서는 독일에 0-1로 패했으나 온 국민은 태극전사들에게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보냈다. 터키와의 3-4위전(6월 29일)에서도 2-3으로 분패, 4위로 월드컵을 마무리하며 2002년 그 여름밤의 신화도 서서히 저물어갔다.

총 7번의 경기에서 한국은 3승 2무 2패를 기록했다. 폴란드, 포르투갈, 이탈리아를 꺾었고 독일과 터키에는 패했다. 승부차기는 무승부로 처리한다는 FIFA 규정에 따라 미국, 스페인과는 비긴 것으로 기록되었다. 모두 8골을 뽑았고 6골을 허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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