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과 부부 ⑲] 초혼인 이희호는 일찌감치 마음 열고 청혼을 기다렸으나 상처한 김대중은 처지가 못돼 오랫동안 머뭇거려… ‘영욕의 반세기’를 함께 한 부부의 사랑과 결혼과 연대
2022년 12월 7일 · zznz

↑ 서울 체부동 외삼촌(이원순) 집에서 열린 결혼식(1962년 5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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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지
이희호는 흔히 ‘정치인 김대중의 부인’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삶의 궤적을 따라가 보면 민주화운동가이자 여성운동계 지도자로 존경받기에 손색 없는 삶을 살았다. 그렇기에 이희호의 한평생은 ‘김대중의 부인’이나 ‘퍼스트 레이디’라는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는다. 김대중은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다. 5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6년간 감옥에 있었으며 10년간 망명과 가택연금 생활을 했다. 두 사람은 ‘영욕의 반세기’를 함께한 반려자이자 정치적 동지였으나 그 전에 그들 역시 사랑의 꽃을 피우고 부부가 되고 자식을 낳아 길렀다. 신산했던 그들의 인생역정을 살펴본다.
■결혼 전 이희호의 삶
이희호(1922~2019)의 일생은 여성과 민주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가부장제 아래 신음하던 여성들의 권익 실현을 위한 싸움에 앞장선 1세대 여성운동가였고, 김대중과 함께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정치 동반자였다. 이희호는 김대중과 결혼하기 전부터 여성문제연구회 창립을 주도하고 대한YWCA연합회 총무로 여성운동을 이끌었던 사회운동가였다.
▲출생과 성장
이희호는 1922년 9월 21일 서울 종로구 수송동 외가에서 넷째로 태어났다. 위로는 오빠가 셋이었다. 밑으로 여동생과 3명의 남동생이 태어나 부모는 6남 2녀의 대가족을 이뤘다. 태어나서 며칠 안 돼 죽은 오빠와 어려서 세상을 떠난 동생까지 포함하면 부모는 8남 2녀를 낳았다. 형제들은 훗날 이희호의 삶이 정치 풍파에 휩쓸릴 때 함께 격랑에 휘말렸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집안이 대대로 서울 사대문 안에 살았던 서울토박이였다. 아버지는 친구 여동생인 어머니와 1913년 청계천 옆 수표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신식 혼레였다.
아버지는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를 나와 세브란스 의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종합병원 의사가 됐다. 덕분에 이희호는 유복한 가정에서 화목한 유년기를 보냈다. 남아 선호사상이 지배했던 시대에 아들 딸 차별하지 않는 부모 밑에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할아버지가 손녀 이름을 남자 아이들에게만 쓰는 돌림자를 넣어 ‘희호’라고 지을 정도로 집안은 개화의 공기로 가득했다. 부모는 독실한 감리교 신자였다. 따라서 이희호에게 감리교는 태어나기 전부터 이희호를 감싸고 있던 태반이었다. 이희호는 이후 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감리교에서 세운 여학교와 전문학교를 다녔으며 미국 감리교회에서 마련해준 장학금으로 미국 유학을 떠났다.
아버지는 이희호가 7살 때쯤 충청남도 서산으로 이사해 읍내에 개인병원을 열었다. 이희호는 서산공립보통학교에 다녔다. 어머니는 5학년 2학기부터 1학년 간 담임 선생님이 없는 것을 알고 6학년을 한 번 더 다니게 할 정도로 딸의 교육에 열심이었다. 이런 어머니의 관심 덕택으로 이희호는 14살이던 1936년 서울의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이화여고 전신)에 입학했다.

▲이화고녀와 서울대 시절
졸업반 무렵 이희호는 전문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나 평소에 그토록 딸의 공부를 독려했던 어머니가 병석에 누워 진학을 앞둔 딸에게 “졸업하고 1년만 내 곁에 있어주면 좋겠다”고 말해 전문학교 준비를 중단하고 어머니를 간병하러 서산 집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1년을 앓던 어머니는 딸이 집으로 내려간 지 사흘 만에 세상을 떠났다. 1940년 3월 24일이었다. 그해 가을 새어머니가 들어왔을 때 이희호는 아버지의 재혼이 원망스러웠다. 이희호는 1941년 입학시험을 준비하려고 서산에서 서울로 떠나면서 세 가지 다짐을 했다. 학업을 마칠 때까지 결혼하지 않는다, 건강을 지킨다, 공부를 많이 한다.
이희호는 1942년 봄 이화여전 문과에 입학했다. 보통학교 6학년을 두 번 다닌데다 어머니의 병환으로 2년의 공백이 생긴 터라 서너살 아래 후배들과 함께 학교를 다녔다. 그러던 중 1943년 12월 조선총독부가 전시교육임시조치령을 내려 이화여전은 기존 교육과정을 모두 중단하고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원 양성기관으로 바뀌었다. 이때 학생들의 과반수가 학교를 그만두었다. 이희호를 포함한 재학생들은 1944년 1월부터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3개월 과정의 지도원 양성 훈련을 받고 4월 강제 졸업했다. 이희호는 1944년 4월 충남 예산의 삽교공립학교 부설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원으로 내려갔다. 오전에는 여자 청소년들을 가르치고 오후에는 학생들과 함께 논밭에서 김을 매고 풀을 베었다.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했다. 이희호는 1년 4개월만에 서울로 올라갔다. 가족도 15년 넘게 살던 서산을 떠나 서울로 올라갔다. 이희호는 1946년 4월 이화여대(이화여전의 후신)에 편입하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아 서울대로 방향을 바꿨다. 문리대 국문학과와 사범대 영어학과에 모두 합격했으나 영어학과를 선택했다. 3학년으로 올라갈 때는 교육학과로 옮겼다.
이희호는 대학시절 내내 경동교회 강원룡 목사와 함께 기독교청년학생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그 시절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난 독립적이고 활달한 행동 때문에 ‘다스’(das, 독일어 중성관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희호의 또 다른 활동 공간은 면학동지회였다. 각 대학의 학생 리더 30여명이 뜻을 합쳐 1948년 12월 이화여고 강당에서 결성한 모임이었다. 좌우익 갈등에 학교가 휩쓸리던 시절에 배움에 휩쓰면서 민족의 미래를 열어가자는 것이 창립 취지였다. 결성식이 끝난 뒤 회원들은 경교장으로 달려가 백범 김구를 만나고 사진을 찍었다. 멤버들은 강영훈(노태우 정부에서 국무총리), 이동원(한일 국교 수립 당시 외무부 장관), 박익수(김대중 정부에서 국민의 정부에서 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회 위원장) 등 다양했다.
이희호는 28살이던 1950년 5월 서울대 사범대학을 졸업했다. 결혼엔 흥미가 없어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는데 6·25전쟁이 터졌다. 충남 서산으로 피란을 갔다가 9·28 서울 수복 뒤 서울로 올라왔으나 1·4 후퇴로 1950년 12월 다시 부산으로 피란해 1953년 휴전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이희호의 가족들도 부산에 모였다. 아버지는 부산 조선방직회사 부설 병원의 내과 과장으로 들어갔다. 부산에서 이희호가 먼저 한 일은 대한여자청년단 참여였다. 시인 모윤숙이 단장을 맡은 대한여자청년단에서 훗날 국회의원과 장관을 역임할 김정례는 조직국장, 이희호는 외교국장으로 실무 역할을 맡았다. 1년 남짓 여자청년단에서 활동했으나 뜻에 맞지 않아 그만두었다.
그 후에는 1952년 11월 여성문제연구원을 창립하는 데 힘을 보탰다. 기자 출신의 여성운동가 황신덕이 초대 원장을 맡고 이희호는 상임 간사가 되었다. 여성문제연구원이 주력한 것은 남녀차별 법 조항을 철폐하고 헌법에 보장된 남녀 평등을 현실에 구현하는 것이었다. 여성문제연구원은 1959년 여성문제연구회로 이름을 바꾸었고 이희호는 1964년 2대 회장을 맡았다. 면학동지회도 1951년 피난지 부산에서 다시 모여 이름을 면우회로 바꾸었다. 면우회는 매달 한 번씩 모여 만남을 계속했다. 이 면우회에서 이희호는 김대중을 알게 된다.
▲김대중과 첫 만남
이희호와 김대중을 이어준 가교 역할을 한 사람은 김정례였다. 김대중이 김정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951년 1·4후퇴 즈음이었다. 그때 김정례는 서울의 피란민들을 배로 후송하려고 인천으로 데리고 갔다. 거기서 피란민을 싣고 갈 배의 주인에게서 도움을 받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김대중이었다. 당시 김대중은 해운회사 사장으로 목포에서 쌀을 배에 싣고 인천으로 올라갔다가 쌀을 모두 판 뒤 서둘러 목포로 내려갈 참이었다. 김정례는 김대중에게 피란민들을 부탁하고 부산에 오게 되면 한번 만나자고 했는데 뒤에 부산으로 사업 거점을 옮긴 김대중이 김정례를 찾아간 것이다.
김대중은 김정례 초대로 여자청년단 회식 자리에서 이희호를 처음 만났다. 두 사람은 서울의 대학생들 모임인 면우회에서도 만나 대화를 나눴다. 김대중은 1·4 후퇴 후 사업 근거지를 목포에서 부산으로 옮겨와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이희호 눈에 비친 김대중은 눈이 크고 핸섬한 멋쟁이였다. 책을 많이 읽고 아는 것이 참 많은 남자였다. 김대중의 아내(차용애)도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김대중 눈에 비친 이희호는 이지적인 눈매를 지닌 활달하고 젊음이 용솟음치는 생기발랄한 여성이었다. 김대중은 훗날 회고 글에서 자기보다 나이가 2살이나 많고 공부도 많이 한 이희호 앞에 처음에는 주눅이 들어 움츠러 들었다고 술회했다. 김대중은 이후 면우회 모임에 가끔 참석했는데 그때마다 두 사람은 이상하리만큼 말이 잘 통하고 뜻이 맞았다. 그러나 그 무렵 부산에서 이희호가 마음에 둔 사람은 따로 있었다. 4·19 이후 재야 운동의 기수가 될 계훈제였다.

▲계훈제를 연민
이희호와 계훈제의 첫 만남은 이희호가 서울대 졸업 무렵 면학동지회 회원 중 한 사람이 계훈제를 이희호에게 소개하면서 이뤄졌다. 계훈제(1921~1999)는 평안북도 선천 출신으로 해방 후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에 다니며 문리대 학생회장으로 백범 김구의 민족주의 노선에 서서 반탁운동 등 우익학생운동을 주도했다. 이희호 역시 김구를 존경했던 터라 계훈제를 호의적으로 바라보았다.
연민의 정이 생긴 것은 1950년 12월 부산 피란 때였다. 그때 계훈제는 결핵에 걸린 데다 맹장염 수술을 받은 환자였다. 당시 결핵은 무서운 전염병이었다. 부산에서 계훈제의 병은 더욱 깊어져 한 달 반 만에 거제도 세브란스 병원의 결핵 병동으로 옮겼다가 1951년 가을 다시 마산 공군요양소로 옮겼다. 결핵으로 시작한 병은 늑막염으로 깊어졌다. 이희호는 대한여자청년단 활동과 기독교학생운동을 하는 중에도 자주 병동에 찾아가 계훈제를 간호했다. 그러나 병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 무렵 이희호는 여성운동과 사회운동을 하면서 미국 유학의 꿈을 꾸고 있었다. “유학을 간다면 병들어 요양소에 있는 사람은 어찌 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이 이희호의 마음 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결국 괴로움과 망설임 끝에 공부를 계속 해야겠다고 결심한 후 계훈제를 떠나기로 했다. 휴전 뒤인 1953년 9월 서울로 올라온 이희호는 미국 유학을 위해 병든 사람을 두고 왔다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했다. 사실 두 사람의 관계는 남녀관계가 아니라 동지적 연대라고 할 만한 관계였으나 어려운 처지에 빠진 사람을 외면하지 못하는 이희호의 성격 탓에 애처로움과 안타까움이 좀처럼 이희호를 떠나지 않았다.
계훈제는 전쟁이 끝나고도 계속 마산 요양소에 머물다 늑골 6대를 잘라내는 대수술을 한 뒤 조금씩 건강을 회복해 1959년 서울로 올라왔다. 이희호는 훗날 계훈제가 결혼하고 아들을 두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마음의 짐을 벗었다. 재야 민주화 운동의 평생을 바치며 단벌 옷에 흰 고무신을 신고 살았던 계훈제는 이희호가 청와대 안주인이었던 시절에 타계했다.

▲미국 유학
이희호는 유학을 결심했으나 돈이 없었기 때문에 장학금을 받는 것이 급선무였다. 먼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이화여대 출신의 면우회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친구는 자신의 유학길을 터준 미국의 목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목사는 테네시주 멤피스의 감리교회 44곳의 남성 클럽 회장인 변호사에게 이희호를 소개하는 편지를 썼다. 변호사는 4년 동안 공부할 장학금과 미국행 비행기 표까지 마련해주었다. 이희호는 1954년 8월 15일 유학을 떠났다. 32살 만학이었다.
이희호는 8월 말, 테네시주 잭슨 카운티에 있는 램버스 대학에 입학해 사회학을 공부했다. 글을 써서 상금을 받기도 했지만 여름이면 공장에서 일을 하며 용돈을 벌었다. 1956년 램버스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테네시 주의 주도 내슈빌에 있는 스캐릿 대학으로 옮겨 1958년 5월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해 8월 15일 이희호는 학생을 가르치고 싶다는 소망을 품은 채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희호는 이화여대 사회사업학과 학생들에게 사회학을 강의하면서 대학교수의 길로 나아갈 생각을 했다.
그러나 생각지도 않은 추천을 받아 학자의 길을 포기하고 사회운동가로 진로를 바꾸었다. 그것은 1959년 1월 취임한 대한YWCA연합회 총무 자리였다. 사회운동가 출신의 이희호가 처음 시작한 캠페인은 ‘혼인신고를 합시다’였다. 당시에는 결혼을 하고도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사는 부부가 많았다. 그러다보니 나중에 첩으로 들어온 사람이 혼인신고를 하는 바람에 자식 낳고 살다가 하루아침에 빈손으로 쫓겨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희호가 다시 김대중과 재회한 것은 1959년 여름 끝자락 무렵이었다. 부산 피란 시절 면학동지회에서 만난 뒤 6년 만이었다. 길을 가다 종로에서 만난 두 사람은 근처 다방에서 잠깐 서로의 안부를 묻고 다시 헤어져 각자의 길을 갔다.

■결혼 전 김대중의 삶
김대중(1924~2009)은 이희호가 태어나고 정확히 1년 3개월 보름 뒤인 1924년 1월 6일 전남 목포에서 34㎞ 떨어진 무안군(현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태어났다. 김대중은 고향 이름 ‘후광’을 평생의 아호로 삼았다. 아버지는 부인이 두 사람이었는데 김대중의 어머니는 둘째 부인이었다. 아버지는 첫 부인과는 1남 3녀를, 둘째 부인과는 3남 1녀를 두었다. 김대중은 어머니의 장남이자 아버지의 차남이었다. 집안은 비교적 풍족했다. 하의도에서 유일하게 유성기(축음기)도 있어 당대의 명창들 소리가 집안에서 끊이지 않았다. 김대중은 7살 때부터 서당에 다니다가 10살 때 신설된 하의보통학교 2학년으로 편입했다. 어린 시절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아 보통학교 3~4학년 때는 신문에 일본 내각 개편이 발표되면 그것을 베껴서 가지고 다닐 정도였다.
김대중의 가족이 목포로 이사한 것은 12살이던 1936년 가을이었다. 부모는 여관을 운영했고 김대중은 보통학교를 다녔다. 졸업 때는 목포신보사 사장상을 받았는데 훗날 김대중은 이 목포신보사를 인수해 사장이 되었다. 김대중은 5년제 목포공립상업학교(목포상업고등학교 전신)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당시 목포상업학교는 전국에 알려진 명문이었다. 김대중은 1943년 12월 목포상고를 졸업한 후 일본인이 경영하는 해운회사에 취직을 했다. 목포상고를 졸업할 무렵 일본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젊은이들을 전선으로 끌고 갔다. 그러자 아버지가 김대중의 징집을 늦추기 위해 생년월일을 1925년 12월 3일로 바꾸었다. 원래 나이로는 징병 1기였으나 3기로 징병 시기가 늦춰졌다. 덕분에 김대중은 징집되기 전 해방을 맞았다.

▲첫 아내 차용애
김대중이 첫 아내 차용애를 알게 된 것은 20살이던 1944년 여름이었다. 김대중은 양산을 쓰고 하얀 원피스를 입고 지나가는 젊은 여자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 목포에서 그렇게 세련되고 아름다운 여인은 본 적이 없었다. 알고 보니 목포상고 동창의 여동생이었다. 차용애는 일본 나가노현의 여학교에 다녔는데 일본 본토에 대한 미군의 폭격이 심해지자 아버지가 불러들여 목포에 있었다. 김대중은 차용애를 보려고 친구 집을 자주 찾아갔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을 고백하기에 이르렀고 장래를 약속했다. 그러나 전라남도에서 두세 번째로 큰 인쇄소를 운영하고 있는 차용애 아버지는 언제 징집될지 모르는 김대중을 사위로 맞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대중 씨한테 시집 못 가면 죽어버리겠습니다”는 차용애의 고집을 어쩌지 못하고 김대중을 사위로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1945년 4월 9일 결혼했다. 김대중과 차용애의 결혼생활은 해방 정국의 어지러움 속에서도 행복했다. 결혼 이듬해 태어난 딸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예뻤으나 1948년 1월 첫 아들 홍일이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홀연히 세상을 떠나 김대중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사업가 시절
김대중은 해방 직후 여운형이 결성한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해 목포지부에 가담했다. 그 뒤 좌우합작을 표방하는 조선신민당에 가입했다가 당내 공산주의자들과 갈등을 빚은 끝에 탈당했다. 다니던 회사의 일본인 사장이 일본으로 떠난 뒤에는 회사 직원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회사를 운영했다. 목포에서 제일 큰 조선소도 직원들이 요청해 한동안 운영했다. 그러다가 1946년 10월 무렵 조그마한 배 1척을 구입해 자신의 상선회사를 설립했다. 차츰 사업이 번창해 70톤급 2척을 추가로 보유하게 되었고 사업은 번창했다. 그렇게 목포의 유지가 되었다.
그러던 중 1950년 6·25전쟁이 터졌다. 김대중은 전쟁 발발 10일 전, 업무 차 서울로 출장을 갔다가 꼼짝 없이 서울에 갇혔다. 어렵게 한강을 건너 20일만에 목포에 도착했으나 목포도 이미 인민군이 장악한 상태였다. 김대중의 집도 역산(逆産·부역자 가옥)으로 지목되어 들어갈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김대중이 집에 없던 1950년 7월말 아내는 둘째 아들 홍업을 집이 아닌 방공호에서 낳아야 했다. 김대중은 어느 날 길거리를 걷다가 검문을 당해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하루에 20명씩 처형당하는 중에 1950년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고 인민군이 목포에서 빠져나가면서 풀려났다.
전쟁 중인데도 김대중은 다시 사업을 시작했다. 다행히 사업이 번창해 김대중은 지프차를 타고 다녔다. 목포에서 지프차를 타는 사람이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드물던 시절이었다. 김대중은 1950년 10월 목포일보사를 인수했다. 일제 시대 남북한을 합쳐서 지방지로는 제일 큰 신문사였다. 2년 정도 운영하다 사업 거점을 부산으로 옮기면서 경영권을 신문사 직원들에게 넘겼다. 그후에는 가수 남진의 아버지인 김문옥이 맡아 오래 사장을 지냈다.
전세가 다시 기울어 1951년 1월 서울이 다시 인민군에 점령당했다. 정부가 부산으로 내려가자 김대중도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이사해 해운회사를 설립했다. 5척의 배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다른 회사의 배까지 전세 내어 십수척을 운영했다. 그 무렵 만난 이희호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 모습이 참으로 예뻐보였다.

▲4전 5기 끝에 당선… 그러나 ‘3일 천하’
전쟁이 끝나 다시 목포로 돌아간 김대중은 오래전부터 품어온 정치인의 길을 준비했다. 평소 김대중은 자신이 정치적인 소질을 타고났다고 생각했다. 김대중은 1954년 5월 목포에서 제3대 민의원 선거에 입후보했다. 목포지역 노동조합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자유당 정부의 노골적인 선거 방해로 첫 도전에 실패했다. 10명의 후보 중에서 5등을 했다. 김대중은 정치에 모든 것을 걸겠다고 결심을 새로이 하고 1955년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사했다. 사업은 접었다.
김대중은 아내가 미장원을 열어 생활비를 버는 동안 한국노동문제연구소에 출근하며 노동문제에 대해 글을 썼다. 월간 잡지 ‘신세계’의 주간도 맡았는데 훗날 출판인으로 성공한 윤형두 법우사 회장이 기자로 함께 일했다. 웅변학원도 운영했는데 훗날 정치적 동지가 될 김상현과 김장곤 의원도 이때 학원에서 만났다.
김대중은 1956년 6월 장면 부통령을 대부로 모시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세례식은 명동성당 노기남 대주교 사무실에서 장면 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중림동 성당의 김철규 신부가 집전했다. 자신의 세례명이 토머스 모어라는 것을 아는 순간 김대중은 섬뜩했다. 토머스라면 위대한 신학자 토머스 아퀴나스도 있는데 단두대에 목 잘린 사람을 자신의 세레명으로 주었기 때문이다. ‘유토피아’를 쓴 토머스 모어는 가톨릭 교회에서 분리해 나온 영국왕 헨리8세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순교를 택했던 영국의 사상가이자 정치가였다. 토머스 모어가 이혼을 인정하라는 헨리8세의 요구를 뿌리치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왕의 뜻을 따르고 목숨을 건지라고 애원했지만 듣지 않아 결국 목이 잘렸다.
신부가 김대중에게 토머스 모어를 세례명으로 준 것은 “당신도 교회를 위해서 이렇게 순교할 각오를 하라”는 뜻이었다. 김대중은 믿음이 부족해 그때는 깨닫지 못했으나 시간이 지나 토마스 모어의 진면목을 알게 되면서 신이 내린 은혜로 받아들였다. 김대중은 훗날 자서전에서 “몇 번의 생과 사를 넘나들었던 것이 세례명이 암시한 것인지 아니면 나 자신이 세례명에 걸맞게 살려고 했기 때문인지 모른다”고 썼다.
김대중은 1956년 9월 장면 부통령의 권유로 민주당에 입당했다. 당시 민주당은 이승만 정권과 싸우고 남북관계에서는 평화통일을 지향했다. 김대중은 1958년 5월 제4대 민의원 선거 때는 강원도 인제에서 출마했다. 생면부지의 땅이었지만 유권자의 80%에 이르는 군인과 군속과 가족 표에 기대를 걸었다. 당시 군인들은 부패한 자유당에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선거운동이 시작되기도 전에 장애물이 막아섰다. 이승만 정권의 주구나 다름없던 선거관리위원회가 이런저런 핑계로 등록을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두 번째 도전도 무위로 끝났다. 김대중은 선거관리위원회를 후보 등록 방해죄로 제소했다. 다음해 3월 승소 판결이 났다. 1959년 6월에 인제 보궐선거가 열렸으나 이번에는 흑색선전과 부정선거에 가로막혀 세 번째 도전도 실패했다.

세 번 연거푸 미끄러지자 빈손만 남았다. 7번이나 옮긴 전셋방엔 당장 먹을 식량조차 없었다. 아내의 미장원도 빚 때문에 넘어갔다. 그러던 어느날 아내가 가슴앓이가 심해 약을 먹었는데 어디가 잘못됐는지 정신을 잃고 혼수상태에 빠지더니 곧 숨을 거두었다. 세상이 온통 푸르렀던 1959년 여름의 끄트머리 무렵이었다. 33살 아내는 초등학생 두 아들을 남기고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당시 자살설이 돌았다. 생활이 너무 힘들고 남편의 잇단 실패의 충격으로 죽음을 택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동아일보 1959년 8월 28일자에는 “이화여고 교사 차용애(33)가 오랜 신병과 경제난을 비관한 끝에 음독자살했다”는 기사가 실려있다. 직업만 다를 뿐 한자 이름과 나이가 같다.
김대중은 4·19 혁명 후인 1960년 7월 민주당의 민의원 후보로 인제에 또다시 도전장을 냈다. 민주당이 전국적으로 압승한 선거인데도 김대중은 또다시 낙선했다. 그런데도 민주당 대변인으로 발탁되어 언론에 이름이 자주 오르내렸다. 원내 과반 의석 이상을 차지한 민주당에서 원외의 김대중을 대변인으로 지명한 것은 파격이었다.
1961년 3월 김대중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왔다. 1년 전 인제 선거에서 당선된 경찰서장 출신의 민의원이 1960년 3·15 부정선거에 관련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 의원 자격을 잃었기 때문이다. 김대중은 인제 보궐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다시 나섰고 5월 13일 마침내 뜻을 이뤘다. 고향 목포에서 1954년 낙선한 이래 1958년, 1959년, 1960년 내리 4번의 패배 끝에 이뤄낸 감격스러운 승리였다. 인제 지역 주민들에게 당선 인사를 하고 5월 16일 서울로 떠날 예정이었는데 그날 새벽 군부가 5·16쿠데타를 일으키고 국회를 해산하는 바람에 김대중은 국회 의석에 앉아보지도 못하고 또다시 정치 낭인으 길을 걸어야 했다. 김대중에게 남은 것은 휴지가 된 의원 당선증 뿐이었다.
■사랑과 결혼
5·16 쿠데타 후 김대중은 민주당 대변인을 지냈다는 이유로 연행되어 창살 안에 갇혔다가 8월 초 풀려났다. 정치활동도 금지당해 외롭고 괴로운 나날을 보내던 어느날 이희호가 떠올랐다. 김대중은 1961년 늦가을 어느날 용기를 내 이희호가 총무로 있는 명동의 대한YWCA연합회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말이 잘 통했다. 각각 정치와 여성운동 영역에서 왕성한 활동을 했기 때문에 서로의 근황은 알고 있었다. 이희호는 총무 일을 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 김대중을 만나주고 말을 들어주었다. 다방에서 차를 마시고 가끔은 식당에서 밥을 같이 먹었다. 김대중이 형편이 궁했던 터라 데이트 경비는 이희호가 거의 부담했다.

김대중에게 이희호는 은은한 매력이 있었다. 이지적이고 활달했지만 교만하지 않았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 부러울 것이 없었으나 겸손했다. 대화는 지식인들의 정치 토론에 가까웠다. 아기자기한 살가운 대화는 거의 없었다. 뜨겁지는 않았지만 서로의 속을 들여다 볼 수는 있었다. 그렇게 사랑의 감정이 의식의 수면 위로 올라왔다.
이희호가 김대중의 동반자가 되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1961년 말이었다. 그러나 김대중이 청혼을 하지 않아 기다렸다. 워낙 형편이 어려워 감히 말 꺼내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여기고 김대중이 스스로 결정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던 것이다. 이희호가 김대중을 인생의 동반자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는 남자로서의 매력이었다. 김대중은 한마디로 잘생기고 멋있는 남자였다. 둘째는 해박한 지식이었다. 김대중은 시간을 아껴가며 책을 읽었고 그렇게 얻은 지식을 소화해 현실에 적용했다. 세 번째는 김대중의 꿈이 이뤄지도록 돕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김대중은 이희호의 눈에 사랑이 담겨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선뜻 마음을 드러낼 처지가 아니어서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상대는 미래가 보장된 여성계 지도자였지만 자신은 하루하루 생계도 꾸려가기 힘든 빈손의 가난뱅이였다. 그 머뭇거림에서 김대중을 벗어나게 해준 것이 병이었다. 겨울 내내 김대중은 집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대신 그리움이 켜켜이 쌓여갔다.
김대중이 이희호를 다시 찾아간 것은 1962년 3월 어느날이었다. 김대중은 탑골공원(파고다공원)에서 “그동안 많이 아팠고 몹시 보고 싶었다”고 말하면서 이희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원대한 목표가 있습니다. 나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당신이 나와 아이들을 돌보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나도 내 모든 것을 다 바쳐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고는 정식으로 청혼했다. 이희호는 머뭇거리지 않고 청혼을 받아들였다.
이희호가 김대중과 결혼한다고 하자 주변에서 깜짝 놀라며 반대했다. 그들은 미국 유학까지 갔다와 여성계 지도자로 뻗어나가고 있는 이희호가 궁색한 처지의 남자와 결혼한다니 균형이 맞지 않는 일이라 생각했다. “시집 못 간 노처녀를 치우게 됐다”고 후련해 하는 친척이 없진 않았지만 여성계 선후배는 물론 가족과 친척들도 반대했다. 객관적인 상황을 보면 결혼에 반대하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었다. 김대중은 두 아이가 딸린 홀아비에 빈털털이였다. 전셋집에는 몸이 성치 않은 홀어머니와 이화여대 국문학과에 다니던 중 심장판막증으로 병석에 누운 여동생이 있었다. 무엇보다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정치인이었다. 하지만 이희호는 “김대중은 내가 꼭 도와야 할 사람”이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다행히 아버지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결혼을 허락해주었다.
두 사람은 1962년 5월 10일 종로구 체부동에 있는 외삼촌 이원순의 너른 집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희호 나이 마흔, 김대중 나이 서른여덟이었다. 예물과 결혼 반지는 이희호가 마련했다. 두 사람은 널따란 한옥 대청마루에서 조향록 목사를 주례로 모시고 서로를 섬기기로 약속했다. 청첩을 돌리지 않았는데도 친지와 선후배 100여 명이 지켜봤다. 김대중 쪽에서는 두 동생만 참석했다. 이 현격한 하객의 차이는 당시 두 사람의 처지와 차이를 보여주었다. 신혼여행을 다녀와 이희호는 김대중이 살던 서대문구 대신동 전셋집으로 들어갔다. 시어머니와 두 아들과 아픈 시누이가 있는 그 집이었다.

■결혼 후 가정사
이희호는 훗날 자서전에 “김대중과 나의 결혼은 모험이었다. 운명은 문밖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곧 거세게 노크했다”고 썼다. 첫 시련은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결혼한 지 열흘 만인 1962년 5월 20일 김대중은 반혁명 혐의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하지만 아무리 조사해도 나올 게 없어 한 달여를 갇혔다가 풀려났다. 아픈 시누이는 김대중이 풀려나 집에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죽어가는 여동생을 지켜보는 김대중의 모습은 처연했다. 김대중은 회한에 젖어 잘나가던 사업을 접고 정치로 방향을 바꾼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이희호가 대신동 집에 들어갔을 때, 두 아들은 중학생이었다. 둘 다 예민한 사춘기 소년이었다. 두 아들은 새어머니와 가까워지는 데 시간이 걸렸다. 친모는 품에 안기고 싶은 다감한 사람이었는데 새어머니는 세련된 지식인의 느낌이 강해서 응석을 부리기 어려웠다. 이희호 역시 두 아들의 환심을 얻기 위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교육자답게 원칙을 지키고 엄격하게 가르쳤다.
이희호는 결혼하고도 YWCA연합회 총무 일을 계속하다가 결혼 생활과 병행하기 어려워 1962년 12월에 후배 박영숙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사임했다. 총무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여성 운동을 모두 접은 것은 아니었다. 남편이 정치 활동을 재개한 뒤에도 1960년대 내내 여성 운동가로서 독자적인 활동을 계속했다. 1963년부터 1965년까지 2년 동안 이화여대에서 사회학을 가르치고 창립을 주도했던 여성문제연구회에서도 열심히 활동했다. 1964년부터 1971년 1월까지는 초대 황신덕 회장에 이어 두 번째 회장을 맡았다.

부부는 결혼 이듬해인 1963년 4월 마포구 동교동으로 이사했다. 미국 국제협력국의 협조를 받아 국내 은행이 투자해서 지은 단층에 방이 3개인 국민주택이었다. 처음에는 전세로 살다가 김대중이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이듬해 은행 융자를 얻어 그 집을 사들였다. 2~3년 후에는 옆집까지 구입해 확장한 뒤 김대중 이희호 이름의 문패를 따로 달았다. 남편이 집안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에 부부 문패가 걸린 대문은 낯선 풍경이었다. 부부는 김대중의 망명시절과 1990년 중반 일산에 살던 시절 그리고 청와대 시절을 빼고는 그 집을 떠나지 않았다. 그때 이후 동교동은 정치인 김대중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 됐다.

■대통령 선거 출마(1971년) 후 시련
김대중은 1963년 2월 17일 정치활동 금지에서 해제되자 정치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1963년 7월 서울에서 열린 민주당 창당대회에서 박순천이 당수로 선출되고 김대중은 다시 대변인에 뽑혔다. 제6대 국회의원 총선거는 1963년 10월 박정희와 윤보선이 맞붙은 제5대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한 달 남짓 지난 후인 11월 26일 실시되었다. 김대중은 고향 목포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 공화당의 검은손이 작동했으나 김대중은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됐다. 이로써 김대중은 정치적 도약의 발판을 얻었다. 그러나 전국의 선거 결과는 공화당의 압승이었다. 선거 보름 전인 11월 12일 막내 아들 홍걸이 태어났다. 41살의 노산이었다.
결혼 이후 10년 여간은 비교적 순탄했다. 김대중은 재선과 3선 의원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김대중이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3선을 위협한 뒤 정권의 최대 공적으로 떠오르면서 부부는 온갖 고초에 시달렸다. 김대중은 1972년 ‘10월 유신’ 이후 그야말로 생사를 넘나들었다. 납치·구금·연금이 이어졌다.

이희호는 남편의 안위가 걱정되어 기도로 밤을 세우면서도 남편이 독재자와 싸우기를 중단하라거나 민주주의 투쟁 일선에서 물러나라고 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투쟁을 지원하고 독려했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김대중은 일본에서 망명 아닌 망명생활을 했다. 이희호는 남편에게 쓴 편지에서 “한국을 대표해 더 강한 투쟁을 하라”고 독려했다. 상황이 너무도 위험하니 투쟁을 그만두고 타협하라고 할 법도 한데 이희호의 입에서는 끝내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1976년 김대중·문익환·윤보선·함세웅을 비롯한 재야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박정희 유신정권을 비판한 3·1민주구국선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희호는 김대중과 함께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려갔다. 이 사건으로 김대중은 재야인사들과 함께 투옥되어 2년 10개월 동안 격리 생활을 했다. 이희호는 지칠 줄 모르고 석방운동을 벌였다. 이희호에게 그 시기는 투쟁과 단련의 기간이었다.
1980년 5월 전두환 신군부가 김대중과 가족, 민주화 인사들을 잡아들여 모진 고문 끝에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을 조작·발표했다. 그때 큰아들 홍일은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시멘트 바닥에 몸을 던졌다가 영구장애를 얻어 평생을 고생했다. 이희호는 남편이 사형선고를 받아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군부세력과 타협하라는 말을 끝내 하지 않았다. 김대중은 미국·일본 망명 시절인 1972~1973년, 3·1구국선언문 사건으로 구속된 1976~1978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사형수가 된 1980~1982년 이희호와 떨어져 지냈는데, 당시 그에게 시련을 견딜 수 있는 큰 힘은 이희호와 주고 받은 편지에서 나왔다고 술회했다.
이희호는 김대중과 함께 기나긴 고난의 시간을 이겨내고 1997년 12월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희호는 2008년 발간한 자서전 ‘동행’에서 1998년 2월 김대중과 함께 청와대에 입성하면서 당선될 때의 소회를 이렇게 밝혔다. “이윽고 날이 밝아왔다. 미행이 경호로 바뀌었다. 기나긴 생활 동안 지속되던 미행이 떨어져나갔다는 감회는 깊었고 경호는 낯설었다.”(1997년 12월 19일) 이희호는 2009년 8월 김 전 대통령 서거 당시 47년 평생의 연인(戀人)이자 동지였던 김대중의 입관식 때도 편지를 썼다. “너무 쓰리고 아픈 고난의 생을 잘도 참고 견딘 당신을 나는 참으로 사랑하고 존경했습니다.” 그렇게 남편을 보낸 이희호는 10년 뒤인 2019년 6월 10일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