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연인과 부부 ⑲] 초혼인 이희호는 일찌감치 마음 열고 청혼을 기다렸으나 상처한 김대중은 처지가 못돼 오랫동안 머뭇거려… ‘영욕의 반세기’를 함께 한 부부의 사랑과 결혼과 연대

↑ 서울 체부동 외삼촌(이원순) 집에서 열린 결혼식(1962년 5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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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지

 

이희호는 흔히 ‘정치인 김대중의 부인’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삶의 궤적을 따라가 보면 민주화운동가이자 여성운동계 지도자로 존경받기에 손색 없는 삶을 살았다. 그렇기에 이희호의 한평생은 ‘김대중의 부인’이나 ‘퍼스트 레이디’라는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는다. 김대중은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다. 5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6년간 감옥에 있었으며 10년간 망명과 가택연금 생활을 했다. 두 사람은 ‘영욕의 반세기’를 함께한 반려자이자 정치적 동지였으나 그 전에 그들 역시 사랑의 꽃을 피우고 부부가 되고 자식을 낳아 길렀다. 신산했던 그들의 인생역정을 살펴본다.

 

■결혼 전 이희호의 삶

이희호(1922~2019)의 일생은 여성과 민주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가부장제 아래 신음하던 여성들의 권익 실현을 위한 싸움에 앞장선 1세대 여성운동가였고, 김대중과 함께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정치 동반자였다. 이희호는 김대중과 결혼하기 전부터 여성문제연구회 창립을 주도하고 대한YWCA연합회 총무로 여성운동을 이끌었던 사회운동가였다.

 

▲출생과 성장

이희호는 1922년 9월 21일 서울 종로구 수송동 외가에서 넷째로 태어났다. 위로는 오빠가 셋이었다. 밑으로 여동생과 3명의 남동생이 태어나 부모는 6남 2녀의 대가족을 이뤘다. 태어나서 며칠 안 돼 죽은 오빠와 어려서 세상을 떠난 동생까지 포함하면 부모는 8남 2녀를 낳았다. 형제들은 훗날 이희호의 삶이 정치 풍파에 휩쓸릴 때 함께 격랑에 휘말렸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집안이 대대로 서울 사대문 안에 살았던 서울토박이였다. 아버지는 친구 여동생인 어머니와 1913년 청계천 옆 수표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신식 혼레였다.

아버지는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를 나와 세브란스 의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종합병원 의사가 됐다. 덕분에 이희호는 유복한 가정에서 화목한 유년기를 보냈다. 남아 선호사상이 지배했던 시대에 아들 딸 차별하지 않는 부모 밑에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할아버지가 손녀 이름을 남자 아이들에게만 쓰는 돌림자를 넣어 ‘희호’라고 지을 정도로 집안은 개화의 공기로 가득했다.  부모는 독실한 감리교 신자였다. 따라서 이희호에게 감리교는 태어나기 전부터 이희호를 감싸고 있던 태반이었다. 이희호는 이후 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감리교에서 세운 여학교와 전문학교를 다녔으며 미국 감리교회에서 마련해준 장학금으로 미국 유학을 떠났다.

아버지는 이희호가 7살 때쯤 충청남도 서산으로 이사해 읍내에 개인병원을 열었다. 이희호는 서산공립보통학교에 다녔다. 어머니는 5학년 2학기부터 1학년 간 담임 선생님이 없는 것을 알고 6학년을 한 번 더 다니게 할 정도로 딸의 교육에 열심이었다. 이런 어머니의 관심 덕택으로 이희호는 14살이던 1936년 서울의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이화여고 전신)에 입학했다.

 

▲이화고녀와 서울대 시절

졸업반 무렵 이희호는 전문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나 평소에 그토록 딸의 공부를 독려했던 어머니가 병석에 누워 진학을 앞둔 딸에게 “졸업하고 1년만 내 곁에 있어주면 좋겠다”고 말해 전문학교 준비를 중단하고 어머니를 간병하러 서산 집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1년을 앓던 어머니는 딸이 집으로 내려간 지 사흘 만에 세상을 떠났다. 1940년 3월 24일이었다. 그해 가을 새어머니가 들어왔을 때 이희호는 아버지의 재혼이 원망스러웠다. 이희호는 1941년 입학시험을 준비하려고 서산에서 서울로 떠나면서 세 가지 다짐을 했다. 학업을 마칠 때까지 결혼하지 않는다, 건강을 지킨다, 공부를 많이 한다.

이희호는 1942년 봄 이화여전 문과에 입학했다. 보통학교 6학년을 두 번 다닌데다 어머니의 병환으로 2년의 공백이 생긴 터라 서너살 아래 후배들과 함께 학교를 다녔다. 그러던 중 1943년 12월 조선총독부가 전시교육임시조치령을 내려 이화여전은 기존 교육과정을 모두 중단하고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원 양성기관으로 바뀌었다. 이때 학생들의 과반수가 학교를 그만두었다. 이희호를 포함한 재학생들은 1944년 1월부터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3개월 과정의 지도원 양성 훈련을 받고 4월 강제 졸업했다. 이희호는 1944년 4월 충남 예산의 삽교공립학교 부설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원으로 내려갔다. 오전에는 여자 청소년들을 가르치고 오후에는 학생들과 함께 논밭에서 김을 매고 풀을 베었다.

이화고녀 4학년 때 이희호(맨 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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