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영화감독 장뤼크 고다르의 별세로 살펴본 ‘누벨바그’ 영화의 흐름과 트뤼포·고다르의 영화 인생

↑ 장뤼크 고다르

 

by 김지지

 

장뤼크 고다르 영화감독은 1960년대 ‘누벨바그(새로운 물결)’라는 영화계의 새로운 사조를 이끌었던 중심인물 중 한 명이다. 2022년 9월 13일 92세로 합법적인 안락사를 통해 세상과 작별한 그의 죽음과 함께 누벨바그는 종언을 고하고 영화계에 작가주의라는 말이 풍미했던 한 시대도 막을 내렸다.

 

 ‘누벨바그(Nouvelle Vague)’는 기존 영화와 차별화된 새로운 영화 흐름

‘누벨바그(Nouvelle Vague)’는 ‘새로운 물결’이라는 뜻의 프랑스어다. 1958년 프랑스의 한 영화 기자가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하면서 새로운 영화문법과 영화적 테크닉을 통해 기존 영화와 차별화된 새로운 영화 흐름을 지칭하게 되었다. 누벨바그가 등장하기 전, 기성 영화는 주로 스튜디오에서 촬영하고 판지로 장식한 소품을 이용하거나 얼굴이 잘 알려진 배우들을 기용했다. 그러나 누벨바그 감독들은 신속한 촬영, 새로운 젊은 배우를 통한 동시대의 이야기, 스튜디오가 아니라 자연광을 이용한 야외촬영, 적은 예산과 소규모 인원의 제작방식 등을 고수하며 기성 영화와 선을 그었다. 그들의 촬영현장은 스튜디오가 아니라 거리와 카페 그리고 값싼 방이었다.

프랑스 태생의 프랑수아 트뤼포(1932~1984)와 장뤼크 고다르(1930~2022)는 누벨바그를 태동시키고 흐름을 주도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1940년대 말, 10대였던 두 사람의 영화 갈증을 풀어준 곳은 파리의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였다. 시네마테크는 주로 클래식 영화를 상영하고 영화의 보존·복원과 전시를 하는 공간으로 1936년 설립되었다. 두 사람은 1951년 창간한 전설적 영화 비평지 ‘카이에 뒤 시네마’에도 평론을 쓰며 필명을 날렸다.

프랑수아 트뤼포

 

트뤼포의 반자전적 영화 ‘400번의 구타’는 누벨바그 영화의 신호탄

특히 트뤼포가 발군이었다. 그는 소년기에는 소년원을 들락거린 결손가정의 불량소년으로 지내고, 청소년기에는 학교를 그만둔 뒤 거리와 극장을 배회했다. 하루에 한 편의 영화를 보고 이틀에 한 편의 평론을 쓰던 ‘카이에 뒤 시네마’ 시절(1952~1958)에는 프랑스 영화계의 각종 도발적인 논쟁을 앞서 지휘하며 자신의 존재를 부각했다. 그의 글 중 당시 영화계를 발칵 뒤집어놓고 누벨바그의 출현을 알린 대표적인 글은 1954년 ‘카이에 뒤 시네마’ 1월호에 쓴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이라는 작가주의 글이다. 이 무명 평론가가 쓴 글의 파괴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기성 영화인들로부터 “아버지의 무덤을 파는 묘굴꾼”, “저널리즘의 불한당” 등 각종 악평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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