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벨기에 국왕의 ‘유감 표시’로 다시 불거진, 19세기 말 아프리카 콩고에서 자행한 레오폴드 2세의 야만과 광기

↑ 레오폴드2세

 

by 김지지

 

필리프 벨기에 국왕이 과거 식민지였던 콩고민주공화국(이하 콩고)의 수도 킨샤사의 콩고 의회를 2022년 6월 8일 방문해 과거 식민 지배(1885~1960년)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명했다. 그는 2020년에도 역대 벨기에 국왕 중 처음으로 콩고 식민 지배에 대해 유감의 뜻을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콩고 일각에서는 “잔혹한 식민 통치에 대한 반성으로는 부족하다”며 공식적인 사과와 배상이 나와야 한다며 반발했다. 벨기에는 과거 무엇을 잘못하고 왜 정부가 아닌 왕실이 사과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본다.

 

스탠리, 리빙스턴 찾아낸 후 기자에서 탐험가로 변신

데이비드 리빙스턴(1813~1873)은 의사이자 선교사였으나 1841년부터 1873년까지 아프리카 대륙을 육로로 횡단 종단한 탐험가이기도 하다. 1841년, 선교를 목적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에서 출발해 북쪽으로 1000㎞ 이상을 걸어 칼라하리 사막 근처로 간 게 첫 탐험이었다. 그곳은 그 때까지 백인 누구도 가 보지 못한 땅이었다. 리빙스턴은 이후 30여년간 아프리카를 탐험하면서 목격한 노예 제도를 비난하고 선교에 충실했다.

사자에게 물려 평생 왼팔을 들지 못하는데도 아프리카의 동서를 육로로 가로질러 대서양과 인도양을 모두 바라보고, 그 과정에서 발견한 거대한 폭포를 ‘빅토리아 폭포’로 이름지어 여왕의 이름을 후세에 알린 것도 리빙스턴이었다. 1866년 나일강의 발원지를 찾아 떠난 네 번째 탐험을 시작했는데 3년 째부터 연락이 두절되어 서양인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그러자 미국의 ‘뉴욕헤럴드’지가 리빙스턴을 찾아 나서는 기획물이 흥미를 끌 수 있다고 판단해 헨리 모턴 스탠리(1841~1904)를 특파원으로 파견했다.

데이비드 리빙스턴

 

스탠리는 영국 웨일스에서 태어나 구빈원과 친척 집을 전전하다가 18살이던 1859년 미국으로 건너가 남군과 북군으로 소속을 바꿔가며 남북전쟁에 참가했다. 종전 후에는 지역신문의 자유기고가로 활동했는데 내용을 부풀리거나 사실이 아닌 것을 보도하기도 했지만 나름 눈길을 끄는 문장을 구사해 1868년 뉴욕헤럴드의 순회 특파원으로 채용되었다. 그리고 1869년 아프리카로 건너가 리빙스턴을 찾아보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스탠리는 190명으로 구성된 원정대를 꾸려 1871년 봄, 리빙스턴을 찾아 아프리카 동해에서 내륙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8개월간의 고된 여행 끝에 1871년 11월 3일 바깥 세상과 수 년 간 단절된 채 살아온 리빙스턴을 탕가니카 호수 근처에서 만났다. 그가 “리빙스턴 박사님이시죠?”라고 인사했다는 첫 대화는 탐험사의 명장면이자 인류애의 귀감으로 기록되어 한동안 우리나라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소개되었다. 리빙스턴은 함께 돌아가자는 스탠리의 권유를 뿌리치고 아프리카에 2년 더 머무르다가 현지에서 눈을 감았다.

스탠리가 리빙스턴을 만나는 순간을 그린 삽화. 왼쪽이 스탠리, 오른쪽이 리빙스턴이다.

 

뉴욕헤럴드가 두 사람의 극적인 만남을 대서특필하면서 스탠리는 유명 인사가 되었다. 자신의 모험담을 과장하거나 각색해도 리빙스턴이 사망한 터라 아무도 스탠리의 말과 글에 토를 달지 못했다. 스탠리는 리빙스턴이 평생을 바쳐 제작한 지도를 활용하면 돈방석에 오를 것이라는 기대에서 기자직을 버리고 탐험가로 변신했다. 당시 아프리카는 해안가 중심으로 열강들이 지배하고 있을 뿐 아프리카의 약 80퍼센트에 해당하는 내륙은 여전히 원주민 족장들이 지배하는 무주공산의 땅이었다.

영국·네덜란드·스페인·프랑스 같은 열강들이 아프리카 분할 경쟁을 한창 벌이고 있을 때, 내심 식민지 구축에 관심을 가진 또 다른 왕이 있었으니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2세(1835~1909)였다. 다만 벨기에 의회는 국왕과 달리 식민지 개척에 시큰둥했다. 1831년 중립국 지위로 독립을 선언한 벨기에 군사력이 바다 건너 식민 영토를 확보할 만큼 강하지 않아 식민지 경영을 무모한 도박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오폴드2세는 아프리카 오지에서 리빙스턴을 찾아낸 스탠리를 잘만 활용하면 식민지를 구축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레오폴드2세, 1885년 새 나라 이름을 콩고자유국으로 정해

한편 탐험가로 변신한 스탠리는 1874년 대규모 아프리카 탐험을 준비했다. 미국의 ‘뉴욕헤럴드’와 영국의 ‘데일리 텔리그라프’가 재정 지원한 350여명의 대규모 탐험대는 1874년 아프리카 동해쪽 잔지바르를 출발해 내륙을 거처 서해쪽으로 이동했다. 스탠리는 탐험 중에 100여곳에 달하는 마을을 공격하고 파괴했다. 저항하는 원주민은 사살했다. 스탠리는 1만1000㎞ 이상을 탐험한 끝에 2년 반이 지난 1877년 8월 콩고강 하구에 도착했다. 이 탐험은 960페이지짜리 ‘검은 대륙 횡단기’로 나중에 발간되었다. 과장과 허위도 있었으나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열대지방을 탐험하기위해 자신이 고안한 ‘스탠리 모자’를 쓰고 있는 스탠리

 

레오폴드2세는 스탠리의 탐험 소식을 꼼꼼이 체크하는 한편 훗날 아프리카로 진출할 때 열강이 반대하지 않도록 노예무역 금지와 과학적 진보를 표방하는 인도주의자로 자신을 이미지화했다. 1876년 9월에는 유명 탐험가와 지리학자 등을 불러모아 벨기에 브뤼셀에서 지리학회의를 개최했다. 19세기 유럽 탐험계의 많은 저명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회의 중 국제아프리카협회(1879년 국제콩고협회로 개칭)가 창설되고 레오폴드2세가 초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레오폴드2세는 여세를 몰아 1878년 6월 스탠리를 벨기에로 초대해 스탠리가 콩고에서 5년 동안 레오폴드2세를 위해 근무한다는 계약에 합의했다.

계약에 따라 스탠리는 1879년 콩고로 떠나 콩고를 레오폴드2세 땅으로 만들기 위한 사전 작업을 벌였다. 식민지 건설을 위한 토목 사업도 벌였지만 특히 신경을 쓴 것은 원주민 추장들에게 술과 옷감 등을 선물하며 환심을 산 뒤 원주민 이름이 적힌 종이를 전달하는 일이었다. 종이는 원주민들의 영토소유권, 노동력, 자원 소유 이관 등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는 위임장이었으나 글을 알지 못하는 추장은 서명의 의미도 알지 못한 채 위임장에 서명했다. 그렇게 모은 500여 장의 위임장은 머지않아 레오폴드2세의 영토권을 주장하는 근거로 활용되어 벨기에 면적의 76배, 한반도 면적의 10배도 넘는 엄청난 땅이 레오폴드2세의 식민지로 편입되었다.

레오폴드2세는 콩고 땅이 자신의 영토가 되려면 무엇보다 열강의 승인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열강이 경계하지 않도록 자신의 아프리카 진출이 인도주의적이라는 사실을 홍보 선전한 덕에 미국, 프랑스, 영국으로부터 콩고 소유권을 인정받았다. 독일의 비스마르크 총리는 소유권을 승인하는 한편 차제에 아프리카 케이크를 분할하기 위한 기본 원칙을 수립하자며 베를린 회담을 제안했다. 1884년 11월 베를린에 모인 열강 대표들은 주로 아프리카 해안선 일대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내륙의 방대한 땅을 레오폴드2세에게 양보하는 데는 큰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베를린회담이 무사히 끝나자 레오폴드2세는 1885년 5월 29일 자신의 절대적 지배를 받는 새 나라 이름을 콩고자유국으로 정했다. 이로써 레오폴드2세는 오랫동안 꿈꿔온 식민지를 갖게 되었다. 다만 벨기에 의회가 식민지 경영에 반대해, 국가가 아닌 레오폴드2세 개인에게 귀속된 역사상 유례가 없는 개인소유 식민지였다. 당시 콩고 지역은 콩고강을 끼고 동서로 나뉘어 있었다. 벨기에는 1885년 프랑스와 콩고조약을 맺어 콩고강을 중심으로 동쪽은 벨기에령, 서쪽은 프랑스령으로 분리했다. 국제 사회는 이후 벨기에령인 동쪽을 ‘레오폴드빌 콩고’(현재는 콩고민주공화국), 프랑스령인 서쪽을 ‘브라자빌 콩고’(콩고공화국)로 구별했다. ‘레오폴드빌’에서 레오폴드는 레오폴드2세이고, ‘브라자빌’의 브라자는 1880년 콩고강 서쪽으로 들어와 프랑스 국기를 꽂은 프랑스 해군 장교 피에르 브라자의 이름이다.

콩고민주공화국 위치

 

인정사정없는 착취와 수탈, 극악무도한 살육으로 콩고는 생지옥

  레오폴드2세는 당초 스탠리를 총독으로 임명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다른 심복을 총독으로 파견했다. 다만 총독에게는 실권을 주지 않고 국왕이 직접 콩고자유국의 간부를 선발하고 관리했다. 주요 칙령 모두 벨기에 왕실에서 내려보냈다. 식민지에 필수적인 군대도 1888년 창설했다. 군대는 10여년 후 1만 9000명으로 늘어났는데 중앙아프리카에서는 가장 강력했다. 군대에는 흑인 병사도 많았다. 아프리카계 용병이거나 강제로 징발된 콩고 원주민이었다.

레오폴드2세가 처음 관심을 가진 품목은 상아였다. 콩고의 상아 무역을 독점하고 원주민들을 이용해 코끼리를 사냥하게 했다. 그러던 중 고무 타이어를 사용한 자전거가 발명되고 호스와 튜브 등이 개발되면서 1890년대 들어 전세계적으로 고무 수요가 폭발했다. 그러자 국토 절반을 고무나무가 덮고 있던 콩고는 잔혹하고 폭압적인 수탈의 대상이 되었다. 열대 우림의 습지에서 맨몸의 고무 채취는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보호 장비가 없어 나무에서 수시로 떨어져 다치는 경우도 허다했다. 원주민들이 거부하면 총독과 관리인이 원주민을 밀림으로 밀어 넣기 위해 온갖 악랄한 수법을 동원했다. 처음에는 원주민의 아내나 딸을 감금한 뒤 할당량을 가져오면 풀어주겠다고 협박했다. 거부하면 곧바로 가족을 강간하거나 죽였다. 단체로 노동을 거부하는 마을은 총칼을 앞세워 몰살시켰다.

영국 주간지 ‘펀치’에 실린, 온몸을 휘감고 있는 고무 고리에 괴로워하는 원주민. 고무 고리 끝은 레오폴드2세 얼굴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전세계적으로 악명을 떨친 것은 콩고인들의 손목을 자른 행위였다. 원주민들이 할댱량을 채우지 못하면 처음에는 손목을 잘랐다. 그런데도 채우지 못하면 팔 전체를 자르고 마지막으로 목을 잘랐다. 인정사정없는 착취와 수탈, 극악무도한 살육으로 콩고는 서서히 생지옥으로 바뀌었다. 대량 학살을 증거하는 일기나 기사에 따르면, 폭동을 일으킨 1300명 이상이 종족이 살해당하고 6개월 동안 6000발의 총알을 발사했다는 군인의 자랑도 있다. 이는 6000명을 죽이거나 다치게 했다는 뜻이다. 시체들이 산더미를 이뤘다는 기록도 있다. 한 선교사는 지류를 건널 때마다 작은 시내에서 떠내려오는 시체들을 보았다고 했다. 한 장교는 4개월 반만에 527명을 죽였다고 일기에 적어놓았고 마을을 방화했다는 기록도 많다. 어린이들은 굶어죽었다. 총탄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게 한 것은 원래는 없었으나 유럽인들 때문에 내륙에 퍼진 질병이었다.

손목이 잘린 콩고 여성들

 

콩고에서 이런 참상이 벌어졌으나 레오폴드2세는 학살의 피를 단 한 방울도 보지 못했다. 콩고에 발 한 번 들여놓지 않고 브뤼셀에서 노예 노동을 원격조정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벌어들인 피 묻은 돈은 레오폴드2세의 궁전과 기념비 등을 짓거나 개보수하는 데 쓰였다. 일부는 16세의 프랑스 콜걸에게 저택과 값비싼 드레스를 사주는데 들어갔다. 놀라운 것은 레오폴드2세가 유럽 전역에서 인자한 군주로 존경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새 식민지에 기독교 선교사들이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고 군대는 흑인들을 약탈해 온 아랍 노예상인들을 물리쳤다”고 선전했다. 이를 믿고 유럽 언론들은 “사재를 털어 아프리카 공익사업을 펼치는 계몽군주”로까지 칭송했다. 외국인 선교사들도 수많은 만행을 목격했을 터인데 대부분 침묵했다. 대중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야만과 광기’를 거치는 동안 인구가 1000만명이나 감소했다는 주장도 있어

이 전대미문의 참극이 점진적이면서 대대적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은 영국 해운회사 직원 에드먼드 모렐에 의해서였다. 물론 모렐의 폭로 전에도 콩고의 참상은 조금씩 세상에 알려졌다. 미국의 흑인 저널리스트이자 역사가인 조지 워싱턴 윌리엄스가 대표적 인물이었는데 그는 1890년 콩고에서 6개월간 체류하면서 알게된 참상을 레오폴드2세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형식으로 세상에 알렸다. 스탠리는 거짓과 욕설, 거친 성격과 주먹으로 일관된 독재자이고 레오폴드2세는 세상에 알려진 것과 완전히 다른 인물이라는 사실을 까발렸다. 당시 아프리카에서 활동한 선교사들도 손이 잘려나간 원주민 사진을 공개하는 식으로 레오폴드2세의 잔혹한 통치를 폭로했다.

에드워드 딘 모렐

 

그러나 조직적으로 레오폴드2세의 참상을 세상에 알린 것은 모렐이었다. 벨기에 앤트워프항에서 화물 하역을 감독하던 모렐은 콩고에 드나드는 무역 기록 등을 토대로, 레오폴드2세가 겉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콩고 원주민들을 상대로 끔찍한 행위를 저지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렐은 레오폴드 2세의 가면을 벗겨나가면서 저항운동을 조직했다. 1901년 직장을 그만두고 레오폴드를 비판하는 글을 쓰는데 전념했다. 책을 쓰고 주간지 ‘서아프리카 통신’도 창간했다.

모렐의 호소에 동참한 유명 인사 중에는 소설가인 마크 트웨인과 코넌 도일, 시인 아나톨 프랑스, 영국 성공회의 최고 성직자 등도 있었다. 아프리카의 이국적 풍광을 좇아 증기선 선원이 된 폴란드계 영국인 조지프 콘래드(1857~1924)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콘래드는 30대 초반이던 1890년, 유럽의 문명이 미개한 아프리카에 전파되는 현장을 콩고에서 직접 확인하고자 했다. 하지만 6개월간 체류하면서 그가 목격한 것은 끔찍한 광기와 만행이었다. 콘래드는 콩고 체험을 8년 동안 곱새긴 끝에 소설 ‘어둠의 심연’(1899년)에 담아냈다.

조지프 콘래드

 

훗날 이 소설을 베트남전에 맞게 각색한 영화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1979년)이다. 코폴라 감독은 ‘지옥의 묵시록’을 지배하는 공포와 광기의 원형이 콘래드의 책에 있다고 했다. ‘지옥의 묵시록’에는 입으로는 바이런의 시구를 읊으면서도 손으로는 사람의 목을 태연히 자르는 이중적 인물 커츠 대령(말론 브란도 분)이 등장한다. 커츠 대령이 스탠리를 지칭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레오폴드왕의 유령’의 저자인 아담 호크쉴드는 21개의 두개골로 화단을 장식한 당시 콩고 공안군의 레옹 롬 대위를 꼽는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서 커츠역으로 분한 말론 브란드

 

콩고의 실상이 하나둘 세상에 알려지자 레오폴드2세를 향해 거센 항의가 쏟아졌다. 이미 거대한 식민지를 착취·수탈한 영국 등 제국주의 열강조차 레오폴드2세의 잔혹성에 혀를 내두르며 비난에 가세했다. 결국 레오폴드2세는 1908년 콩고를 개인 사유지에서 벨기에 국가의 식민지로 바꾸어 비난을 피해갔다. 레오폴드2세는 콩고에서 벌어진 참상을 몰랐다고 끝까지 잡아뗐다.

그 ‘야만과 광기’의 20여 년을 거치는 동안 콩고 인구가 무려 1000만 명이나 감소했다는 주장도 있다. 너무 어마어마한 숫자여서 믿기지 않는데 이에 대해 아담 호크실드는 ‘레오폴드 왕의 유령’에서 ‘1000만 대학살’의 원인이 복합적이라고 설명한다. 피살자들뿐 아니라, 질병과 기아로 사망한 원주민도 이 숫자 안에 포함되고 가혹한 착취로 인해 출산율이 급감한 것 역시 콩고 인구를 급감시킨 원인이라는 것이다.

레오폴드2세는 콩고를 포기한 이듬해(1909년) 사망하고 콩고는 그로부터 50여 년이 더 흐른 1960년에야 벨기에에서 독립했다. 그런데도 벨기에 왕실은 오랫동안 레오폴드2세가 “콩고에 가본 적도 없기 때문에“ 잔학 행위에 책임이 없다고 강변해왔다. 국민들 사이에도 “정부가 개입하지 않은, 사유지에서 개인이 저지른 학살은 벨기에와 무관하다. 책임지거나 사과할 필요 없다”는 여론이 다수였다. 벨기에가 19세기 아르누보의 중심지가 되고 대대손손 자랑할만한 아름다운 유산을 갖게 된 것이 ‘건축왕’으로 불린 레오폴드2세 덕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2020년 벨기에에서 식민역사 청산 운동이 일어났다. 벨기에 시민 수만 명이 거리로 나와 레오폴드 2세의 동상을 없애고, 그의 이름을 딴 거리 이름을 없애자고 주장했다. 그 결과가 벨기에 왕실의 사과로 이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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