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발레의 전설’ 바츨라프 니진스키 ‘목신의 오후’ 초연 안무 맡아

↑ 바츨라프 니진스키

 

어려서는 ‘발레의 신동’, 살아서는 ‘발레의 신’, 죽어서는 ‘발레의 전설’

바츨라프 니진스키(1890~1950)는 어려서는 ‘발레의 신동’이었고 성인이 되어서는 ‘발레의 신’이었으며 죽어서는 ‘발레의 전설’이었다. 깃털처럼 가벼운 몸짓과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는 듯한 도약을 자유자재로 구사해 그의 춤동작은 언제나 불가사의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결국 그의 등장은 고전발레와 현대발레의 분기점이자 여성 무용수의 보조에 머물렀던 남성 무용수의 자리를 새롭게 확보한 전환점이었다.

니진스키는 러시아령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태어나 8세 때 러시아 최고 발레학교인 마린스키 황실 발레학교에 입학했다. 163㎝의 작은 키와 굵은 다리, 그리고 동양적인 누런 피부는 무용수로는 최악의 신체 조건이었는데도 경이적인 도약으로 어디서나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1907년 4월 발레학교를 졸업하고 마린스키 황실극장(현 상트페테르부르크 발레단) 무용수로 입단했다.

당시 러시아의 귀족이나 재력가들이 남녀를 불문하고 자기 취향에 맞는 젊은 가수나 무용수를 애인으로 삼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마린스키 황실극장 소속의 무용수 중에도 이런 스폰서를 남몰래 숨겨둔 무용수가 적지 않았다. 니진스키 역시 동성애자 귀족이 아낌없이 제공하는 재정적 도움에 기꺼이 몸을 의탁했다. ‘발레 뤼스’ 단장 세르게이 댜길레프(1872~1929)가 손짓했을 때도 니진스키는 17살의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요구를 받아들였다.

니진스키는 1911년 6월 ‘페트루슈카’ 공연에 출연하고 ‘발레 뤼스’가 1912년 공연할 ‘목신의 오후’ 안무를 맡았다. 당시 안무는 약속된 틀을 정하는 요즘과 달리 무용수들에게 지침만을 제공할 뿐 실제 공연에서는 즉흥적인 춤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니진스키는 음악가가 악보에 적힌 대로 연주하는 것처럼 사전에 약속된 동작을 춤추도록 안무의 틀을 짰다. 고전발레의 전통에 사로잡혀 있던 단원들은 이런 안무를 이해하지 못해 한동안 새로운 테크닉을 익히느라 호된 시련을 겪었다.

 

‘봄의 제전’, 당대에는 소란스러웠으나 무용 혁신을 이룬 대표 공연으로 평가받아

클로드 드뷔시가 작곡하고 니진스키가 안무와 주역 무용수를 담당한 ‘목신의 오후’는 1912년 5월 29일 초연되었다. 댜길레프는 ‘목신의 오후’가 성공한 것에 고무되어 스트라빈스키가 작곡한 ‘봄의 제전’까지 니진스키에게 안무를 맡겼다. 니진스키는 이번에도 고전적인 훈련 방식을 버리고 팔과 자세 그리고 몸동작을 재구성할 것을 단원들에게 요구했다. 무용수들은 니진스키의 안무와 구성이 인간의 무용이라기보다는 야만스러운 동물의 춤 같다며 항의했다.

결국 1913년 5월 29일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초연한 ‘봄의 제전’은 관객들로부터 온갖 비명과 욕설과 야유를 들었다. 원시적이고 불규칙적인 리듬, 긴장과 신경질을 강요하는 스트라빈스키의 불협화음도 한 이유였지만 관객이 짜증을 낸 가장 큰 이유는 무용수들이 아름답기는커녕 사납고 공격적인 모습으로 춤을 추었기 때문이다. ‘봄의 초연’은 이처럼 당대에는 소란이 부각되었으나 오늘날에는 무용 혁신을 이룬 대표적인 공연으로 인정받고 있다. 무엇보다 무용을 음악의 종속물에서 해방시켜 대등한 위치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라는 평가를 듣고 있다.

댜길레프와 니진스키 간의 파국이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온 것은 1913년 8월 니진스키가 ‘발레 뤼스’의 남미 순회공연을 떠나면서였다. 댜길레프는 선박 여행을 무서워해 동행하지 않았다. 그런데 순회공연단에 로몰라 드 풀츠키라는 헝가리 귀족 출신의 신참 여성 단원이 있었다. 사실 그의 입단 목적은 연극이나 발레가 아니라 니진스키와의 사랑이었다. 니진스키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고도 충격을 받기는커녕 여자 애인이 없다며 오히려 반가워할 정도였다.

두 사람은 20여 일간의 선박 여행 중 결국 사랑에 빠져 1913년 9월 19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결혼했다. 유럽에서 전보를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댜길레프는 배신과 분노에 몸을 떨었고 곧 니진스키에게 해고 전보를 쳤다. 댜길레프는 니진스키가 파리로 돌아온 뒤에도 니진스키의 앞길을 가로막는 온갖 방법으로 보복을 가했다.

 

“10년은 자라고 10년은 배우고 10년은 춤추고 30년은 암흑에 가려진 60 평생”

그런 상황에서 니진스키가 선택한 길은 자신의 발레단 창설이었다. 1914년 여동생과 처남을 비롯해 10여 명의 무명 무용수를 끌어모아 발레단을 만들었으나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 니진스키가 없는 ‘발레 뤼스’ 역시 침체 일로를 걸었다. 댜길레프는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레 뤼스’의 1915년 미국 공연에 동행할 것을 니진스키에게 제의했고 니진스키는 4개월에 걸친 미국 공연에 동참했다.

그 무렵 니진스키의 정신 상태는 정상 궤도를 벗어나고 있었다. 결국 1917년 9월 30일,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서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과 함께 적십자를 위한 자선공연 ‘페트루슈카’를 공연한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공식 무대에 서지 않았다. 다만 1919년 1월 스위스의 장크트 모리츠에서 수백 명의 지역 주민을 위한 공연을 열었는데 관객은 미친 사람의 공연을 본 것인지 정말 미친 사람을 본 것인지 혼란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니진스키는 1919년 1월 19일부터 3월 4일까지 자신이 살아온 과정을 일기로 정리했다.

1919년 3월 6일 니진스키를 진찰한 의사가 “불치의 정신분열증에 걸렸으니 요양소로 보내야 한다”고 조언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10여 년 동안 세계 최고의 정신과 의사들이 니진스키를 치료했으나 결국 암흑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정신분열증’이란 용어를 처음 조어한 오이겐 블로일러를 비롯해 카를 구스타프 융, 지그문트 프로이트까지 진찰했으나 누구도 니진스키의 상태를 되돌리진 못했다.

결국 니진스키는 30년간을 정신병동에서 지내다 1950년 4월 8일 영국 런던의 한 사설 진료소에서 생을 마감했다. 니진스키의 전기작가 리처드 버클의 표현대로 “10년은 자라고 10년은 배우고 10년은 춤추고 30년은 암흑에 가려진 60 평생”이었다.

 

☞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 초연 상황이 궁금하다면 클릭!!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