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이고리 스트라빈스키 작곡 ‘봄의 제전’ 초연

↑ 1913년 ‘봄의 제전’ 초연 사진

 

스트라빈스키의 독창성을 의심하는 사람 아무도 없어

1913년 5월 29일, 이고리 스트라빈스키(1882~1971)가 작곡하고 ‘발레 뤼스’ 발레단이 안무와 춤을 담당한 ‘봄의 제전’이 프랑스 파리의 상젤리제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관객은 무용수들이 감미로운 음악에 토슈즈를 신고 튀튀(발레 치마) 자락을 허공으로 날리면서 인간의 한계를 넘는 고난도 기술을 기대하며 무대를 응시했다. 그런데 관객의 기대와는 달리 으스스한 불협화음과 폭발적인 리듬의 음악이 극장 안에 울려 퍼지더니 러시아의 전원 풍경이 나타나고 고대 러시아 원시 부족의 헐렁한 옷차림을 한 40여 명의 남녀 무용수들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게 아닌가.

결국 2분 정도 지났을 무렵 갑자기 객석에서 비난과 욕설, 야유가 터져 나왔다. 무용수들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기보다 발작적으로 몸을 떨거나 발을 구르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관객의 야유를 비난하는 또 다른 관객의 고성까지 겹치면서 극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반대파와 지지파가 한데 엉켜 내지르는 고성으로 가뜩이나 원시적이고 불규칙적인 리듬에다 끊임없이 긴장과 신경질을 강요하는 오케스트라 연주마저 들리지 않았다.

혼란스럽기는 무대 뒤도 마찬가지였다. 안무를 담당한 바츨라프 니진스키(1890~1950)는 관객의 태도에 화가 나 무대 위로 뛰쳐 올라가려고 하고 스트라빈스키는 그런 니진스키를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더구나 ‘발레 뤼스’ 단장 세르게이 댜길레프(1872~1929)가 소동을 진정시킨다고 객석의 조명을 켰다 껐다를 반복하면서 관객의 심리를 자극해 소란을 더욱 증폭시켰다. 다행히 피에르 몽퇴의 지휘에 맞춰 오케스트라 연주가 계속되고, 무용수들이 무대 주변에서 니진스키가 내지르는 고함과 몸짓에 따라 춤을 춰 공연은 겨우 마칠 수 있었다. 음악적 구질서를 뒤집고 현대음악의 문을 연 35분짜리 ‘봄의 제전’은 이렇게 소란과 혼돈으로 막을 내렸다.

사실 관객은 막이 오르고 2분 만에 객석에서 일어난 엄청난 소음으로 음악에 제대로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날의 소동은 스트라빈스키의 혁신적인 음악에 대한 반감이 원인이라기보다는 기존의 통념을 송두리째 뒤엎은 니진스키의 파격적인 안무, 그러한 결과를 뻔히 예상하고도 공연을 강행한 댜길레프의 흥행 전략이 빚어낸 해프닝이었다.

 

니진스키의 파격적인 안무와 댜길레프의 흥행 전략이 빚어낸 해프닝

공연이 끝난 뒤 평론가들은 ‘봄의 제전’이 아니라 ‘봄의 학살’이라고 비아냥댔다.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두고는 “우리 시대의 음악 가운데 가장 우스꽝스러운 사기”라는 신랄한 비판이 쏟아졌다. 그 시대의 좋은 음악이란 바흐의 바로크음악이나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고전음악, 또는 그전에 스트라빈스키에게 명성을 가져다 준 ‘불새’와 ‘페트루슈카’ 같은 낭만파음악을 뜻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봄의 제전’에는 듣고 기억할 만한 멜로디는 없고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하거나 위압적인 리듬만이 있었다. 그런데도 댜길레프는 “내가 원하던 바야”라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소란하면 소란할수록 관객의 관심이 커질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인데 요즘 말로 하면 ‘노이즈 마케팅’이었던 셈이다.

결국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은 니진스키의 치기 어린 야망과 댜길레프의 속물적인 이익에 이용당한 꼴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고 모든 게 부정적이지만 않았다. 스트라빈스키 역시 이날의 소동 덕에 혁신적인 음악가의 이미지를 굳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봄의 제전’도 역설적으로 이 사건 이후 더 유명해졌고, 후대 음악가들에게 새로운 물결을 불러일으킨 20세기 클래식 작품으로 꼽혔다. 연주가 어려워 지휘자나 오케스트라 실력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는 곡이라는 평가도 받았다.

스트라빈스키는 ‘봄의 제전’을 춤이 없는 연주회 버전으로 수정했고 이 곡은 1914년 4월 몽퇴의 지휘로 다시 한 번 연주되어 관객으로부터 열띤 호응을 얻었다. 일정한 속도의 전통적인 리듬 체계를 버리고 속도가 수시로 변화하는 독자적인 리듬 체계를 창안하고자 했던 스트라빈스키의 의도를 그제야 관객들이 이해한 것이다. 스트라빈스키는 이후에도 ‘봄의 제전’을 세 차례 개작해 1920년, 1926년, 1943년 연주회를 열었다. 이후 ‘봄의 제전’은 20세기의 가장 혁신적인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현대음악의 이정표이자 고전으로 자리를 잡았고 스트라빈스키는 아방가르드 음악의 선구자로 추앙받았다.

 

‘봄의 제전’ 초연 후 아방가르드 음악의 선구자로 추앙받아

스트라빈스키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부근의 휴양도시 오라니엔바움(지금의 로모노소프)에서 폴란드계 후손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당대의 유명 성악가였으나 아들이 음악을 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 때문에 스트라빈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대 법학과에 입학했다가 대학에 재학 중이던 1902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때서야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이자 당시 러시아 음악계를 대표하는 작곡가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서 화성법과 관현악법을 배웠다. 스트라빈스키는 자신이 열렬히 지지하는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추구했으나 스승은 “차이콥스키는 서구 음악으로 민족정신을 흐리는 매국노”라며 차이콥스키를 싫어했다. 이 때문에 스트라빈스키는 자신이 열망하는 음악을 숨기고 스승의 음악적 색채를 따라야 했다.

그러던 중 1908년 관현악곡 ‘꽃불’, ‘환상적 스케르초’를 작곡·초연했는데 객석에 당대 최고 흥행사 댜길레프가 있었다. 당시 댜길레프는 발레단 창단을 꿈꾸며 바츨라프 니진스키, 미하일 포킨, 안나 파블로바 등 뛰어난 무용수와 안무가들을 끌어모았지만 함께 일할 작곡가가 마땅치 않아 상트페테르부르크대 법대 후배인 스트라빈스키의 연주회장을 찾아간 것이다. 귀가 번쩍 뜨인 댜길레프는 1909년 러시아인 무용수들로 구성된 ‘발레 뤼스’를 창단하면서 스트라빈스키에게 쇼팽의 피아노곡을 발레 음악에 맞게 편곡해 줄 것을 요청했다.

스트라빈스키는 시각적인 발레가 청각적인 음악과 함께 무대 위에서 어떻게 융합되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춤과 음악은 종속 관계가 아니라 협력 관계였다. 그래서 완성된 ‘레실피드’ 곡에 포킨이 안무하고 니진스키와 파블로바가 주역 무용수로 춤을 춘 작품은 1909년 5월 17일 파리의 샤틀레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발레 뤼스의 창단 첫 공연 후 댜길레프는 포킨이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안무한 ‘불새’를 차기작으로 기획해 스트라빈스키에게 또다시 작곡을 의뢰했다. 1910년 6월 25일 파리 오페라하우스에서 초연된 ‘불새’에 관객의 열광적인 반응이 쏟아지면서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무명 작곡가이던 스트라빈스키는 일약 예술의 중심 파리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최고 신예 작곡가로 떠올랐다. 스트라빈스키는 1911년 6월 13일 발레 뤼스의 포킨이 안무하고 파리의 샤틀레 극장에 올려져 또다시 열광적인 반응을 얻은 어릿광대의 짝사랑 이야기를 다룬 ‘페트루슈카’(1막 4장)도 작곡했다.

 

시각적인 발레와 청각적인 음악이 무대에서 어떻게 융합되는 지 알아

1914년 1차대전이 발발했다. 스트라빈스키는 병든 아내와 유모, 아이들을 데리고 스위스에 정착했다. 전쟁으로 인해 ‘봄의 제전’과 같은 관현악곡을 더 이상 작곡할 수 없게 되자 몇 대의 악기로 연주할 수 있는 소규모 실내음악을 작곡했다. 이에 따라 음악 스타일이 좀더 고전적이고 간결하게 변모했다. 이른바 스트라빈스키의 신고전주의 시대가 도래한 것인데, 신고전주의는 이미 고전이 된 것을 작품의 소재로 패러디하는 것을 말한다. 과격한 미래주의, 혼란한 다다이즘, 독단적인 표현주의에 대한 반발로 객관적이고 감상하기 편한 예술로 돌아가자는 음악적 사조다.

스트라빈스키는 1918년 1차대전이 끝났는데도 1917년 발생한 러시아혁명 때문에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자 스위스 생활을 청산하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위해 프랑스에 정착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은 스트라빈스키에게 가브리엘 샤넬은 자신의 집을 제공했고, 이는 영화 ‘샤넬과 스트라빈스키’의 모티프가 되어 두 사람의 연인 관계에 대한 진위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1920년 5월 15일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초연된 ‘풀치넬라’는 러시아 민족주의와 완전히 결별한 신고전주의의 대표곡이다. 하지만 당시 평론가들은 그 음악을 이해하지 못해 표절자로 몰아세우며 위대한 러시아의 유산을 포기했다고 비난했다.

스트라빈스키는 이후에도 차이콥스키의 작품을 소재로 한 ‘요정의 입맞춤’을 비롯해 ‘뮤즈를 거느린 아폴로’와 같은 발레곡, 베르디풍의 웅장하고 드라마틱한 비극을 담고 있는 ‘오이디푸스왕’ 등 오페라곡, 피아노 협주를 위한 곡, ‘시편 교향곡’ 등을 작곡했다. 그러던 중 1920년대 중반 들어 댜길레프와 금전과 작품 노선 문제로 불화를 겪기 시작해 1929년 댜길레프가 사망할 때까지 화해하지 않았다.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을 적극적으로 계승·발전시켜

스트라빈스키는 1939년 2차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재즈 등 다양한 스타일의 작품을 발표했다. 1951년 자신과 함께 현대음악의 물과 기름이었던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죽음을 접한 뒤에는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을 받아들이는 등 새로운 음악 스타일로 전환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동안 쇤베르크는 스트라빈스키를 격렬하게 비난하고 그의 작품을 싸구려 유행곡으로 매도했다. 스트라빈스키 역시 쇤베르크의 음악을 일관되게 무시하고 외면했다. 두 사람은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도피해 같은 지역에서 거주했지만 전혀 왕래가 없었다.

하지만 막상 쇤베르크가 눈을 감자 1953년 쇤베르크 추모 음악회 준비위원으로 활동하고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을 적극적으로 계승·발전시켰다. 12음 기법은 종래의 7음 체계에서 벗어나 한 옥타브 안의 12개 반음에 모두 똑같은 중요성을 두고 이를 재배열해 음열을 만든 뒤 이를 토대로 음악을 전개해 나가는 것이다. 이후 12음 기법, 원시주의 발레음악, 신고전주의와 재즈 등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자 카멜레온 같은 변신과 상업적 성향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면서도 스트라빈스키의 독창성만큼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스트라빈스키는 예술적 이력과 명성만큼 까다로운 인물이었다. 자존심이 강하고 주변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았으며 자신만의 독자적인 노선을 걸었다. 비사교적인 성격 탓에 골방에 틀어박혀 예술 세계에 골몰하면서도 당대 최고 인사들과는 돈독한 친분을 이어가며 입지를 다졌다.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스트라빈스키의 80회 생일 파티를 열어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케네디가 암살당했을 때 스트라빈스키는 합창곡 ‘케네디의 추억을 위해’를 작곡해 케네디의 영전에 바치기도 했다. 1971년 4월 6일 뉴욕에서 눈을 감은 그의 유해는 그에게 음악 날개를 달아준 댜길레프가 안치된 이탈리아 베네치아 산 미켈레 섬의 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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