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출간

↑ 한나 아렌트

 

20세기 지성사에 우뚝 솟아 있는 여성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는 20세기 지성사에 우뚝 솟아 있는 여성 정치철학자다. 독일의 부유한 유대인 가정의 외동딸로 태어난 그녀가 어린 시절 관심을 보인 분야는 철학이었다. 16세에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을 정도로 철학적 소양도 뛰어났다. 18세에 입학한 마르부르크대에서 그녀를 압도하고 매료시킨 것은 35세의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 교수였다. 그녀에게 하이데거는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이자 권력이었다. 하이데거에게도, 수줍어하면서 고독한 눈길을 하고 있는 18세의 아렌트는 군계일학의 제자였다. 이듬해 비밀스러우면서도 열렬한 둘의 연애가 시작되었으나 현실적 장벽이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하이데거는 8년 전 결혼한 유부남이었고 아이도 둘이나 있었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교수직과 결혼생활이 위태로워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결국 아렌트는 하이데거와 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음을 깨닫고 1928년 하이데거의 동의하에 하이데거의 친구인 실존철학자 카를 야스퍼스가 있는 하이델베르크대로 적을 옮겨 1929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해 아렌트는 하이델베르크대 동급생인 저널리스트와 결혼했다. 그때까지 그녀에게 정치적인 것은 철학의 뒷전에 있었으나 나치의 유대인 탄압을 피해 1933년 파리로 도피하면서 정치에도 관심을 가졌다. 아렌트가 파리에서 시오니즘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동안 하이데거는 히틀러 치하에서 나치당에 입당하고, 프라이부르크대의 총장으로 활동하는 등 친나치 행각을 보였다.

아렌트 개인에게도 큰 변화가 있었다. 1937년 첫 남편과 이혼하고 1940년 파리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독일인 남성과 재혼했다. 두 사람은 이후 30년 가까이 지적 동반자이자 생의 반려자로 지냈다. 1940년 파리가 독일군에 함락되었을 때 아렌트는 잠시 비시 정부에서 수용소에 갇혔다가 풀려나 1941년 4월 미국으로 건너갔다.

 

‘전체주의의 기원’(1951), 세계적 명성 안겨줘

아렌트는 미국에서 나치 문제를 연구하고 전체주의를 세심하게 분석했다. 그래서 나온 저서가 아렌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다준 ‘전체주의의 기원’(1951)이다. 책에 따르면 나치즘, 파시즘, 볼셰비즘 등의 전체주의는 과거 역사에 있었던 단순한 폭정 및 전제정치와 분명히 구분되는 20세기의 새로운 정치 현상이었다. 아렌트는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와 스탈린의 공산주의 체제를 우파와 좌파의 대립된 철학의 결과라기보다는 동전의 앞뒷면과도 같은 현상임을 갈파했다. 그때 미국은 매카시즘의 광기가 절정이던 시점이었다. 따라서 책이 스탈린의 체제에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아렌트의 저서는 학계의 주목을 끌었다. 냉전의 반공 이데올로기 기류 속에서 전혀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이름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2차대전 후 하이데거는 친나치 경력 때문에 교수직을 박탈당하고도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지 않아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런데도 아렌트는 하이데거를 옹호했다. 1952년엔 하이데거를 몰래 만나고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렇듯 하이데거가 나치 협력자라는 사실을 알고도 변함없이 사랑과 존경을 바쳤다.

 

인간은 정치행위를 통해서만 인간답게 살 수 있다고 역설

‘전체주의의 기원’ 출판 후 정치적 공동체 확립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그것을 이루는 개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개인적·집단적으로 의미 있는 삶을 유지하며 인간답게 살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귀결되었다. 아렌트는 1958년 ‘인간의 조건’에서 해답을 제시했다. 그는 인간의 행위를 행동, 작업, 노동으로 분류했다. 그중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삶만이, 인간 실존의 완전한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는 공동체의 밑바탕이 된다고 믿었다.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은 정치행위를 통해서만 인간답게 살 수 있다고 역설했다. ‘인간의 조건’은 아렌트를 20세기를 대표하는 정치철학자로 자리 잡게 하는 데 기여했다.

1961년 4월에 시작된 ‘유대인 절멸의 마지막 해결사’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은 아렌트의 이름을 대중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 ‘뉴요커’ 잡지의 특파원 자격으로 재판을 참관한 그는 아이히만이 사형을 당한 뒤 1963년 2월부터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방청기를 ‘뉴요커’에 5회 연재해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재판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아이히만이 악마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명령을 충실히 수행했을 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하지 않은 아이히만의 행동이 대량 학살을 가져왔다는 게 그의 결론이다.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악의 근원임을 주장함으로써 아렌트는 사유의 중요성을 환기시켰다.

신좌파 학생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파고를 높이던 1960년대 말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강의한 내용을 정리해 펴낸 ‘폭력에 대하여’(1970)에서는 폭력과 권력의 관계를 분명히 했다. 아렌트는 책에서 모든 폭력을 부정하지 않았다. 인민의 정당한 분노가 일으키는 폭력은 합리적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폭력의 위험성은 항상 수단이 목적을 압도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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