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마지막 해결사’ 아이히만의 사형 집행과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기사

↑ 재판을 받고 있는 아돌프 아이히만

 

아이히만, 종전 후 아르헨티나로 잠적해 이름 바꿔

1960년 5월 11일 저녁 8시쯤, 귀가 중이던 한 사내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근교의 집 부근에서 수 명의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 요원에게 체포된다. 사내는 지난 10년간 리카르도 클레멘트로 행세해 온 나치의 ‘마지막 해결사’ 아돌프 아이히만(1906~1962)이었다. 그는 2차대전 중 독일은 물론 독일의 점령지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 등지의 유대인을 체포, 고문, 강제이주, 살육하는 데 실무를 맡았던 나치의 친위대(게슈타포) 장교였다.

하지만 직급으로만 따지면 보잘것없는 인물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오른 최고 계급은 친위대 중령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00만 명의 유대인 희생자 가운데 어떤 방식으로든 그의 손을 거친 사람이 절반에 달한다고 할 만큼 그가 유대인 학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컸다. 아이히만은 폴란드 동부 지역에 홀로코스트로 악명이 높은 유대인의 절멸수용소를 세우는 아이디어를 내고 유대인 희생자가 몇 명인지 알고 있었던 소수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다.

2차대전이 끝난 후 미군에 체포되었으나 가명을 대고 풀려나 이탈리아와 중동 등지를 전전하다 1950년 7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정착했다. 그는 나치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리카르도 클레멘트로 이름을 바꾸고 나치 친위대원 표지인 겨드랑이 안쪽의 ‘SS’ 문신도 지웠다. 1952년 그의 뒤를 이어 아르헨티나에 도착한 아내, 자녀와 함께 부에노스아이레스 교외에 은신하며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그의 정체는 뜻하지 않게도 그의 장남 때문에 탄로가 났다. 1957년 아들이 여자 친구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유럽에서 ‘유대인 제거’에 앞장섰다고 자랑스럽게 떠벌린 것이다. 아들은 독일인의 외모를 지닌 여자 친구가 유대계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여자 친구의 아버지는 2차 대전 당시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유대계 독일인이었다. 그의 부모는 유대인 수용소에서 희생되었다. 딸에게서 남자 친구 아버지의 얘기를 전해들은 그는 즉각 유대인 수용소에서 함께 지내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계 독일인 프리츠 바워 독일 헤센주 검찰총장에게 편지를 보내 이 사실을 알렸다.

 

이스라엘 모사드, 2년에 걸친 추적과 조사 끝에 아이히만 신원을 밝혀

편지는 이스라엘 정부에 전달되었고 모사드가 사실 확인에 나섰다. 2년에 걸친 추적과 조사 끝에 모사드는 아이히만의 신원을 확인했다. 모사드는 아르헨티나 독립 150주년 축하 사절로 공식 방문하는 이스라엘 외무장관 여객기에 모사드 요원을 승무원으로 가장시켜 극비리에 급파했다. 그리고 아이히만을 체포해 대기하고 있던 차 안으로 밀어넣자 아이히만은 체념한 듯 독일어로 “운명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신음하듯 말했다. 아이히만은 모처에서 9일 동안 신문을 받은 후 “자의에 의해 이송된다”는 각서를 쓰고 5월 21일 약물 주사로 인해 병자처럼 보이는 상태에서 승무원 복장 차림으로 이스라엘 외무장관이 타고 왔던 같은 비행기에 태워져 이스라엘로 송환되었다.

체포 사실은 5월 23일 벤구리온 총리의 공식 발표로 세상에 알려졌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르헨티나의 항의로 양국 간 외교문제로까지 비화되었으나 곧 이스라엘 정부의 공식 사과와 인도적 범죄자 납치에 대한 국제 여론의 이해 분위기 등으로 주권 침해 논란은 흐지부지되었다.

아이히만이 15개 죄목으로 기소된 재판은 1961년 4월 11일 시작되었다. 그러나 재판은 첫날부터 이스라엘 측 검사와 아이히만의 독일인 변호사 간의 불꽃 튀는 논전으로 뜨거웠다. 독일 변호사는 “납치는 국제법 위반이고 나치 전범 처벌을 위해 1950년에 제정된 법은 사후 입법이므로 형벌 불소급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그의 변론으로 아이히만 재판은 “법률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드라마의 하나”로 평가될 만큼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

 

“나는 나치라는 거대한 기계의 한 도구였을 뿐”(아이히만)

방탄유리에 둘러싸여 재판을 받은 아이히만은 “나의 전 생애는 칸트의 실천이성에 따라 살아왔다”며 “나의 행위는 칸트의 인식, 즉 ‘범주적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고 강변했다. 그러면서 줄곧 자신은 살인범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유대인을 죽이는 일에 나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나는 유대인을 죽이라고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 그는 오로지 행정적 업무를 수행한 것이고, 법과 명령을 준수한 공무원에 불과하다고 강변했다. 정신과 전문가들이 그의 정신상태를 감정했으나, 한결같이 ‘정상’이라는 소견이었다. 최후 진술에서는 “나에 대한 단죄는 사기상조”라며 “나는 나치라는 거대한 기계의 한 도구였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재판은 114회나 열렸다. 판결문을 읽는 데만 3일이 걸린 끝에 1961년 12월 15일 마침내 1심에서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1962년 5월 29일 대법원이 사형을 확정함에 따라 아이히만은 5월 31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올가미가 목에 걸리기 전 “독일 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를 외친 아이히만은 사형 참관자들에게 “우리들은 얼마 안 있어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말로 여운을 남기고 이승을 떠났다.

아이히만은 수감 중 1300쪽에 달하는 자서전을 집필했다. 그 중 주요 내용은 2000년 2월 이스라엘 정부에 의해 공개되었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죽은 후 화장해서 유골을 바다에 버려 달라고 유언했지만 이스라엘 정부는 “유대인의 공적인 아이히만의 유골을 이스라엘 영내에 버리는 것은 홀로코스트로 희생된 유대인에 대한 모독”이라는 이유로 그의 유골을 공해상에 뿌렸다.

재판이 열리는 동안 예루살렘의 법원은 세계에서 몰려든 수백 명의 기자들로 북적거렸다. 그 가운데는 미국 ‘뉴요커’ 잡지의 특파원 자격으로 재판을 참관한 한나 아렌트(1906~1975)도 있었다. 유대인으로 독일에서 태어난 그녀는 1933년 히틀러의 유대인 탄압을 피해 프랑스로 망명했다가 1940년 파리가 독일군에 점령되자 1941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1951년 자신의 개인적, 시대적 경험을 토대로 쓴 ‘전체주의의 기원’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고 1958년 ‘인간의 조건’으로 20세기를 대표하는 정치사상가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이미 ‘전체주의의 기원’을 통해 파시즘의 실체를 파헤친 바 있는 아렌트는 이처럼 흥미진진한 사건을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아이히만은 유리상자 속의 허깨비”(아렌트)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사형이 집행된 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라는 방청기를 1963년 2월부터 뉴요커에 5회 연재했다.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에 정착한 유대인 여성 정치철학자가 유대인 학살자 아이히만 재판을 현장 취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무엇보다 글의 내용이 충격적이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무시무시한 전체주의의 괴수”가 아닌 “유리상자 속의 허깨비”라고 표현했다. 아렌트의 눈에 비친 아이히만은 희대의 악마가 아니라 너무 범속한 인물이었다. 몰락한 중산계급 가정에서 태어나 실업학교를 다녔고 실업자를 전전하다 지인의 주선으로 군에 입대했던 평범한 사람이었다. 거기서 우연히 유대인 관련 업무를 맡았다가 능력을 인정받았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조차 읽지 않았고 나치의 강령도 알지 못했으며 열렬한 나치 광신자도 아니었다. 계급도 중령급에 불과했다. 그저 거대한 관료조직의 톱니바퀴 같은 일원이었다.

아렌트는 이런 아이히만을 홀로코스트 범죄의 책임자라기보다는 희생자에 가까운 사람으로 그렸다. 또한 사악하거나 유대인을 증오해서가 아니라 단지 국가의 명령을 기계적으로 수행했을 뿐이라고 했다. 글의 마지막에 나오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도 지성계의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훗날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에 대해 “아이히만의 행위가 아무리 괴물 같다고 해도 그 행위자는 괴물 같지도 또 악마적이지도 않았다. 그의 유일한 특징은 어리석음이 아니라, 사유의 진정한 불능성이었다”고 설명했다.

아렌트는 홀로코스트에 유대인 사회가 어떻게 협력했는지도 글에서 밝혔다. 또한 독일인들이 전체주의에 빠져 유대인을 학살하는 비이성적인 악행을 저질렀다면 그것을 비판하는 이스라엘인들 역시 아이히만을 불법적으로 잡아와 자신들이 듣고 싶은 얘기를 강요하는 무대를 마련했다며 비판했다. 이 때문에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으로 대중적 명성을 얻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유대계 사회의 거친 분노의 표적이 되었다. 이유는 아렌트가 홀로코스트라는 참극의 희생자인 유대인의 고통에 동참하지 않고 있으며, 마치 자신은 유대인이 아니라는 듯 국외자처럼 사건을 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그를 가리켜 사람들은 “버림받은 동족으로부터 또 버림받은 사람”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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