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땅 구석구석

[안동 어데 가봤니껴 6-②] 도산권(동북권) : 안동선비순례길, 선성수상길, 퇴계예던길, 청량산과 퇴계, 농암종택, 이현보, 고산정

↑ 하늘에서 내려다 본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일대. 왼쪽 아래에 고산정이 있고 가운데 너른 평지가 농암종택 일대다. 오른쪽 아래는 맹개마을. (출처 안동시)

 

by 김지지

 

■안동선비순례길

안동선비순례길은 안동호 수변을 따라 장장 91㎞ 거리를 9개 코스로 나눠 걷는 걷기여행길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서당, 서원, 향교, 고택 등 옛 선비의 발자취를 더듬는 명품길이다. 수려한 자연풍광까지 더해지니 금상첨화다. 안동선비순례길은 퇴계가 걸었던 길과 안동이 품고 있는 역사 이야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제1코스 선성현길(13.7㎞)은 퇴계가 선정한 도산구곡 중 첫 번째 물굽이인 운암곡 주변을 둘러보는 길이다. 아쉽게도 도산구곡 중 제1곡 운암부터 제5곡 탁영까지는 안동댐 건설로 수몰된 상태다. 길은 광산김씨 후손들이 선비 정신을 지키며 살았던 오천군자마을에서 출발한다. 중간에 수상데크길을 거쳐 월천서당에 닿는다. 제2코스 도산서원길(11.3㎞)은 월천서당에서 도산서원을 거쳐 퇴계종택까지 이어지는 퇴계의 숨결이 깃든 곳이다. 제3코스 청포도길(6.3㎞)은 퇴계종택에서 이육사문학관을 거쳐 단천교까지 이어진다. 중간에 이육사의 고향 원촌마을과 퇴계 이황의 묘소를 지난다.

안동선비순례길 중 제1코스 선성현길

 

제4코스 퇴계예던길(10.7㎞)은 퇴계가 청량산을 향해 걷던 그림같은 길이다. 제5코스 왕모산성길(12㎞)은 고려 공민왕의 어머니가 홍건적의 난을 피해 숨어 있었다는 왕모산의 중턱을 가른다. 단천마을의 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제6코스 역동길(11.5㎞)은 역동서원을 지난다. 역동서원은 고려 말기 학자 우탁(1263~1342)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570년 퇴계의 발의로 건립된 안동 지역 최초 서원이다. 1684년 사액서원으로 승격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훼철되었다가, 1969년 현 위치에 이건 복원되었다. 제7코스 산림문학길(7.8㎞), 제8코스 마의태자길(10.6㎞), 제9코스 서도길(7.4㎞)도 있다.

안동시민이라면 모를까 외지인이 90㎞가 넘는 길을 다 걸을 수는 없다. 이런 외지인을 위해 안동시가 추천하는 알짜배기 코스가 있다. 첫 번째가 제1코스 선성현문화단지 인근의 종합안내소를 출발해 호반자연휴양림~전망대~월천서당~전망대를 거쳐 다시 종합안내소로 원점회귀하는 코스다. 거리는 12.9㎞다. 제1코스와 상당부분 겹친다. 두 번째는 4코스와 5코스를 합친 길로 단천교에서 출발해 청량산조망대~농암종택~고산정입구~맹개마을~백운지를 거쳐 다시 단천교로 원점회귀한다. 거리는 16.1㎞다.

 

▲선성현길(제1코스) 중 선성수상길

선성현길은 안동선비순례길의 제1코스다. 전체 거리는 13.7㎞. 외지 여행객이 한정된 시간에 전체를 다 걸을 수 없어 나는 가장 인기있고 호젓한 선성수상길만 걸어보았다. 시작점은 제1코스 출발점인 오천군자마을에서 8㎞ 떨어진 도산면 서부리다. 내비게이션으로 ‘선성현문화단지’나 ‘안동예끼마을’을 검색하면 된다. 거리는 선성현문화단지에서 월천서당까지 5.4㎞다.

선성수상길은 수상데크길을 지나 안동호 수변을 따라 걷는 데크길이다. 선성현문화단지 입구에서 호수 쪽으로 내려가면 부교(浮橋)로 만들어진 수상데크가 호수 위로 길게 뻗어있다. 길이가 1.1㎞, 폭이 2.7m다. 부교는 안동호의 수위 변동에 상관없이 상하로 뜨고 가라앉는 구조다. 수상데크 중간에 풍금과 책걸상, 간이 칠판 등이 추억의 조형물로 놓여 있다. 과거 안동댐 건설로 수몰된 예안국민학교를 기념하기 위한 조형물이다. 비가 오는 날 수상데크를 걸으니 운치가 배가 된다.

제1코스 선성현길의 일부인 선성수상길의 수상데크길

 

수상데크가 끝나자 호수를 내려다보며 걸을 수 있는 데크길이 산 허리에 길게 이어진다. 튼튼하고 세련되고 깔끔하다. 데크길을 걷다보면 산 위 100m 지점에 현대식 건물로 지어진 자연휴양림(호반하우스) 5개동이 보인다. 궁금해서 올라가보았다. 세련되고 멋지다. 주변 자연과도 잘 어울린다. 데크길로 다시 내려와 월천서당까지 계속 가는데 빗줄기가 굵어진다. 결국 포기했지만 이 자체만으로도 멋진 걷기길이었다.

참고로 이곳 서부리의 최근 변화를 간단히 살펴본다. 서부리는 뒤로는 선성산이 자리하고 앞으로는 낙동강이 흐르는 전원마을이었다. 그러다 1970년대 안동댐을 만들면서 마을 일부가 물에 잠겼다. 예안면에 속해있던 마을은 도산면으로 편입되었다. 예안 사람들 대부분은 뿔뿔이 흩어졌다. 떠나지 못한 사람들은 산 언덕에 터를 잡았다. 그러다가 2014년 ‘도산 서부리 이야기가 있는 마을 조성사업’이 시작되었고 2018년 ‘예술의 끼’라는 의미의 ‘예끼’라는 이름을 새로 얻었다. 빈집들은 갤러리, 공방, 식당, 카페 등으로 바뀌었다. 골목길은 그림을 입체적이고 실감 나게 표현하는 트릭아트와 벽화로 채워졌다. 안동호가 훤히 내다보이는 자리에는 ‘선성현문화단지’와 숙박시설인 한옥체험관이 조성되었다. 객사·동헌·관청 등 옛 관아가 복원되었고 선성현 전반을 알 수 있는 역사관이 들어섰다.

안동 예끼마을의 벽화

 

▲퇴계예던길(제4코스)

 

퇴계가 청량산을 향해 낙동강 물길 따라 걸었던 그림같은 길

안동선비순례길 중 자연 풍광이 가장 빼어난 곳은 제4코스 퇴계예던길(10.7㎞)이다. 퇴계가 청량산을 향해 낙동강 물길 따라 걸었던 그림같은 길이다. 퇴계가 이 길을 처음 걸어간 것은 숙부(송재 이우)를 따라 청량산에 들어갔던 10대 초반이다. 이후 퇴계는 스스로 ‘청량산인(淸凉山人)’이라고 칭할 정도로 청량산을 사랑했고 60대 중반까지 이 길을 걸었다. 길을 걸으며 절경에 반해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

안동시가 이 길을 ‘예던길’로 정한 것은 과거 안동 사람들이 이 길을 ‘가던’ ‘다니던’ 뜻의 ‘녀던길’이라고 부른데서 연유한다. ‘녀던’ 표현은 퇴계가 64살에 지은 ‘도산십이곡’의 제9곡과 제10곡에도 등장한다. 봉화 청량산 쪽에도 예던길이 있으나 안동의 퇴계예던길과는 다르다. 봉화쪽 이름은 ‘청량산 예던길’이다. 35번 국도를 타고 봉화를 지나다보면 강 건너로 보인다.

퇴계가 예던길을 걷기 전부터 안동 사람들은 낙동강과 청량산의 풍광에 반해 알음알음 이 길을 다녔다. 그래서 안동시가 강변길에 선비순례길을 만들었는데 예던길이 통과하는 일부 산자락의 주인이 사유지라며 길을 막았다. 안동시는 고심 끝에 산자락 위 건지산으로 올라가 삽재를 지나 농암종택으로 이어지는 새 길을 조성했다. 단천교 ↔ 청량산조망대 ↔ 건지산 ↔ 삽재 ↔ 농암종택 ↔ 축융봉 코스다. 이후 강변길(청량산조망대~농암종택)은 사람이 다니지 못해 황량해지고 흔적은 지워졌다.

안동 퇴계예던길

 

퇴계예던길은 도산면 원촌리 단천교 서쪽에서 시작한다. 이후 청량산조망대와 건지산을 지나 삽재에서 수변(水邊)탐방로와 수림(樹林)탐방로로 갈라진다. 수변탐방로는 삽재에서 강변으로 내려가 농암종택으로 이어지고, 수림탐방로는 학소대와 농암종택 윗길을 거쳐 올미재를 지나 농암종택이나 고산정입구로 연결된다. 두 길 모두 얼추 6㎞ 쯤 된다. 여기에 농암종택~고산정입구~축융봉까지 거리 4㎞를 더한 게 퇴계예던길이다. 안동시에 따르면 전체 시간은 5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문제는 호젓한 길을 걸으려는 사람들에게 건지산(559m)과 축융봉(849m)의 높이가 버겁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건지산 아래 청량산조망대에서 낙동강과 학소대 그리고 저 멀리 청량산 장인봉을 감상한 뒤, 차편을 이용해 농암종택으로 이동해 강변의 학소대 아래까지 걸어보고 고산정입구까지는 강변을 따라 걷는 길을 소개한다.

 

안동시 제작 지도는 훌륭하나 현장 안내는 부실

퇴계예던길 출발지인 단천교에서 청량산조망대까지는 2㎞ 정도의 포장길이다. 차를 타고 이동할 수도, 걸어갈 수도 있다. 다만 운치나 호젓함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청량산조망대에 올라서면 가까이는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물줄기와 학소대 절벽이 바라보이고 멀리는 청량산의 장인봉·선학봉·자란봉 3개봉이 나란하다.

청량산조망대에서 바라본 낙동강과 학소대 그리고 청량산

 

농암종택은 부속건물들과 함께 도산면 가송리의 너른 평지에 자리잡고 있다. 그곳에서 바라보이는 학소대는 강변을 따라 다녀올 수 있다. 학소대는 거대한 수직절벽으로 과거 천연기념물인 먹황새가 서식해 학소대라는 이름을 얻었다. 학소대 부근 강변에 경암과 미천장담이 있다. 경암은 여러명이 앉을 수 있는 평평한 바위이고 미천장담은 낙동강이 S자를 그리며 돌아가는 곳의 깊은 못이다. 그런데 경암은 숲에 가려 일부만 보이고 미천장담은 어느 곳인지 알 수 없다. 과거 퇴계는 이 바위를 ‘경암’이라 이름짓고 ‘경암’ 시를 썼다. S자 못은 ‘미천장담(彌川長潭)’이라 이름 짓고 같은 제목의 시를 지었다. 이처럼 경암과 미천장담에는 퇴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으나 안내판도 없고 가까이 다가가는 길도 없다. 안동시가 나서야 한다.

사유지여서 끊어진 퇴계예던길. 저 위가 건지산 능선이다.

 

안동시 제작 지도에 따르면 농암종택 부근에 예던길의 일부 구간이면서 안동 최고의 풍광을 자랑한다는 올미재가 있다. 농암종택을 둘러본 후 올미재에 올라가 예던길을 종주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려고 했으나 도무지 입구를 찾을 수 없다. 마을 주민에게 물어도 대답이 시원치 않다. 안내문도 없어 결국 포기했다.

끊어졌던 퇴계예던길은 학소대~농암종택에서 다시 시작해 동쪽의 고산정입구를 지나 청량산의 축융봉으로 이어진다. 청량산을 목적지로 삼은 퇴계야 축융봉을 넘어갔겠지만 우리는 산행이 목적이 아니므로 높이가 849m나 되는 축융봉에 오를 수 없다. 나중에 따로 일정을 잡아 청량산 쪽에서 축융봉에 올랐을 때 살펴보니 축융봉 정상 아래 평평한 곳에 퇴계가 지나간 길이라며 안내판으로 표시해놓았다.

농암종택 앞 백사장에서 바라본 벽력암(왼쪽)과 학소대

   

▲청량산과 퇴계

청량산(870m)은 경북 봉화 땅이지만 퇴계의 고향인 예안현 온계리(현재는 도산면 온혜리)에서 40여 리로 한나절이면 갈 수 있어 퇴계권으로 분류한다. 퇴계는 청량산을 ‘우리 집안의 산’이라는 뜻의 ‘오가산(吾家山)’이라 칭하며 누구보다 청량산을 사랑하고 아꼈다. 퇴계가 청량산을 오가산이라고 말한 데는 이유가 있다. 퇴계의 5대 고조부 이자수가 고려말 홍건적을 토벌한 공로를 인정받아 송안군으로 봉군되면서 나라에서 하사받은 봉산(封山)이 청량산이기 때문이다.

퇴계는 주세붕의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 발문에서 청량산을 이렇게 적고 있다. “안동부 청량산은 예안현에서 동북쪽으로 수십리 거리에 있다. 나의 고장은 그 거리의 반쯤 된다. 새벽에 떠나서 산에 오를 것 같으면 5시가 되기 전에 산 중턱에 다다를 수 있다. 비록 지경은 다른 고을이지만, 이 산은 실지로 내 집의 산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부형을 따라 괴나리 봇짐을 메고 이 산에 왕래하면서 독서하였던 것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축융봉에서 바라본 청량산 봉우리들

 

퇴계와 청량산의 인연은 13살 때이던 1513년 2월, 숙부인 이우를 따라 청량산에 들어가 독서를 하면서 시작된다. 그 후 청량산은 젊은 퇴계에게 학문과 수양의 공간이었다. 퇴계는 서울에서의 짧은 벼슬생활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생을 청량산 자락에서 보냈다. 50대 초반부터는 스스로를 ‘청량산인’으로 불렀다.

50대 중반이던 1555년 겨울에는 청량산에 한 달간 머무르며 눈내린 청량산의 천변만화를 만끽하면서 ‘십일월입청량산(十一月入淸凉山)’ 시 40구를 지었다. 60대 중반에도 10여명의 제자들과 노구를 이끌고 청량산을 유람했다. 퇴계는 도산서당을 지을 때 이곳 청량산과 지금의 도산서원 자리를 두고 끝까지 망설였을 만큼 청량산에 대한 애착과 사랑이 컸다.

 

☞ 청량산이 궁금하다면 클릭!!

 

▲왕모산성길(제5코스)
왕모산성길(제5코스) 지도

 

고산정입구~벽력암전망대, 걷기 편하고 오솔길처럼 호젓한 길

왕모산성길(제5코스)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퇴계예던길 건너편에 있다. 고산정입구 →(3.4㎞)← 맹개마을 →(2.5㎞)← 백운지 →(4.6㎞)← 칼선대 →(1.5㎞)← 원천교로 구분한다. 그런데 총길이가 12㎞나 되어 대부분 고산정입구에서 산허리를 지나 맹개마을까지 갔다가 강을 건너 농암종택에서 고산정입구로 되돌아온다. 거리는 5㎞ 정도다.

고산정입구는 퇴계예던길 끝 지점에서 만나는 1차선 시멘트 다리 건너편이다. 왼쪽 200m 지점에 고산정이 있고 오른쪽으로 왕모산성길이 이어진다. 오른쪽 시멘트길을 따라가면 마을이 나오는데 600년 수령의 은행나무가 마을의 수호신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른쪽 길을 따라 좀더 진행하면 팔각정과 카페가 나오고 그곳부터 맹개마을까지 강변을 걷거나 산허리를 오르내리는 산길이 시작된다.

사람들의 왕래가 드문 덕분에 길이 다져지지 않아 걷기에 편하다. 다만 산허리를 깎은 길이어서 급경사에는 미끄럽다. 이런 곳은 철도 침목처럼 굵은 각목이나 통나무로 계단을 만들고 강변 쪽으로는 통나무와 동아줄로 경계를 만들어 산 아래로 굴러 내려가는 것을 막아주고 있다. 전반적으로 오솔길처럼 호젓하지만 응달이어서 음습한 곳도 있다. 초입에서 15분 정도 오르고 내리니 강을 내려다보며 쉬라고 설치한 2개의 벤치가 있다. 나무에 가려 조망은 별로다.

왕모산성길 중 고산정입구~벽력암 코스

 

출발지에서 1시간 10분 정도 지나니 건너편 농암종택 앞 백사장에서 바라보이던 벽력암 전망대다. 조망은 부근에서 최고다. 발 아래로는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고 그 건너에는 농암종택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오른쪽으로는 낙타등처럼 오르고 내리는 축융붕 능선이 병풍처럼 길게 뻗어있다.

벽력암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농암종택과 백사장

 

벽력암 전망대에서 강변으로 내려가면 왼쪽에 맹개마을이, 강 건너편에 농암종택이 있다. 문제는 강이 가로막고 있어서 차를 주차해놓은 고산정입구로 돌아가려면 왔던 산길을 다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학소대가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맹개마을 입구 강변에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강 건너 농암종택 백사장에서 이쪽 맹개마을로 트랙터가 강을 건너온다. 알고보니 맹개마을 손님들을 태워 강을 오가는 트랙터다. 운전자에게 언제 다시 강을 건너가느냐고 물으니 맹개마을을 떠나는 손님이 있어야 한다며 트랙터가 지나온 강 바닥에 강물이 흐르는 관(管)을 매설해놓았으니 그 관 위로 건너가면 된다는 반가운 정보를 알려준다.

살펴보니 관 위를 지나는 강물이 무릎까지만 차고 물살도 다른 곳보다 느려 건널만 했다. 보통은 트랙터나 SUV 개조 차량으로 맹개마을 손님의 이동을 돕지만 수량이 많을 때는 배를 이용하는데 이처럼 물이 많을 때 강을 건너는 것은 위험하다. 강을 건너면 농암종택에서 고산정입구까지 1.2㎞다. 낙동강을 바라보고 조금전 걸었던 산길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어가니 어느덧 고산정입구다.

건너편 농암종택 백사장에서 맹개마을로 다가오는 트랙터. 그 아래에 관을 매설해 깊지 않다.

 

맹개마을은 낙동강이 크게 S자로 휘돌아 내려가는 곳에 자리잡아

맹개마을은 낙동강이 크게 S자로 휘돌아 내려가는 곳에 있다. 건너편 학소대에서 내려다보면 이런 지형적 특징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맹개마을은 과거 퇴계가 청량산을 오가며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감탄한 곳이기도 하다. 맹개마을 사람들은 이곳에서 밀과 메밀 농사를 짓고, 게스트하우스를 지어 손님을 받는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등장하는 홍파주막이 이곳에 있다. 방문하거나 숙박을 하고 싶으면 전화(010-7604-0065)로 문의하면 된다.

학소대에서 내려다본 맹개마을

 

사실 고산정입구에서 왕모산성길(제5코스) 답사를 시작하기 전, 퇴계예던길의 시작점인 단천교에서 맹개마을로 가보려다가 실패해 길이 있는지 없는지 긴가민가했는데 트랜터 운전자가 ‘길없음’을 학실히 알려주어 반가웠다. 지도상으로 단천교에서 청량산조망대 건너편의 강변을 따라가면 맹개마을로 연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차를 갖고 단천교를 건너 낙동강변 시멘트 길을 따라 가는데 끝지점에서부터 길이 산으로 나 있다. 그래도 산길이 맹개마을로 이어지려니 생각하고 진행하는데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길이 점점 좁아진다. 이러다가 차를 돌리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결국에는 포기하고 산 중턱에서 차를 돌려 빠져나왔다. 그때만 해도 맹개마을로 연결된 길이 없다는 사실은 알지 못하고 길을 잘못 든 것으로 이해하고 다음을 기약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단천교에서 맹개마을로 연결되는 길은 없고 농암종택에서만 접근할 수 있었다.

 

■농암종택과 부속건물

농암종택은 단천교를 떠난 선비순례길이 건지산을 거쳐 낙동강변으로 내려가면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선비순례길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550m 높이의 건지산을 지나기 보다는 승용차를 이용해 농암종택으로 간다. 농암종택은 35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오른쪽 계곡을 낀 아스팔트길로 꺾어져 그 길 끝에 있다. 내비로 ‘농암종택’을 검색하면 된다. 주차장이 종택 가까이 있고 공터도 넓어 접근성이 좋다. 종택 뒤로는 건지산 능선이 방패막이 되어주고 종택 앞으로는 낙동강 물줄기가 굽이쳐 흐른다. 강 건너편에는 벽력암이 깎아지른 듯 서 있다. 강변에 넓게 펼쳐진 백사장 모래는 고운 은가루를 뿌려놓은 듯 부드럽다. 강바람이 불 때는 봄철의 황사처럼 흩날린다.

농암종택을 지은 이는 농암 이현보(1467~1555)의 고조부인 이헌이다. 그가 1370년 처음 종택을 지었을 때 자리는 도산서원 인근 분천리였다. 이후 농암이 종택을 중수하고 편액을 붙여 농암종택 이름으로 불렸다. 이현보는 분천 강가 큰바위 이름인 농암(聾巖)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농암은 생전에 부속 건물을 여러 채 지었다. 농사를 지으며 살겠다고 지은 ‘명농당’, 부모님을 위해 지은 정자 ‘애일당’, 풍류를 즐기려고 강가에 지은 누각 ‘강각’ 등이다.

그런데 분천리에 있던 농암종택과 부속 건물들은 현재 분천마을에서 3㎞ 정도 떨어진 가송리에 있다. 사연이 있다. 1970년대 안동댐이 건설되고 마을이 수몰지에 편입되면서 농암종택과 부속 건물들이 안동의 이곳저곳으로 흩어졌다. 1990년대 농암의 후손들이 이 건물들을 한 곳으로 이건(移建)할 계획을 세우고 안동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적당한 장소를 물색했다. 그러다가 가송리에서 좋은 땅을 발견하자 조금씩 땅을 매입했다. 부족한 자금은 정부가 지원해주었다. 그 결과 2003년 농암종택의 안채와 사랑채, 긍구당을 먼저 이전하고 2005년 도산면 운곡리에 있던 분강서원을 이곳으로 이전했다. 2006년에는 애일당, 농암각자 등을 이전하고 명농당과 강각을 복원했다.

농암종택 입구

 

▲농암종택

농암종택은 안채, 사랑채, 문간채 등의 본채와 긍구당·명농당 등의 별채로 구성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너른 마당 오른쪽으로 사랑채가 있고, 정면에 별당인 긍구당이 있다. 긍구당을 지난 오른쪽에 명농당이 있다. 종택을 지나면 분강서원이, 더 지나면 애일당과 각자가 있다. 애일당 앞 강변에 강각이 있다. 긍구당은 농암이 태어나고 눈을 감은 곳으로 농암종택의 상징적인 건물이다. 고려말인 1370년 농암의 고조부인 이헌이 처음 건립한 뒤 손님을 맞는 별당으로 사용하던 것을 농암이 중수하고 긍구당((肯構堂) 편액을 붙였다. 편액 글씨는 상주목사를 지낸 신잠(1491~1554)이 썼다. ‘긍구’는 조상의 유업을 길이 이어가라는 뜻이다.

농암은 영천군수로 나가 있던 1510년 틈틈이 시간을 내어 긍구당 남쪽에 명농당 정자를 지었다. 명농의 뜻이 ‘농사에 힘쓴다’라는 점에서 농암이 낙향을 생각하며 지은 정자인 것을 알 수 있다. 벽에는 귀거래도를 그려붙여 언젠가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낙향을 다짐했다.

농암종택 별당인 긍구당

 

▲분강서원과 농암 영정

농암종택을 지나면 농암의 위패를 모신 분강서원이다. 광해군 때인 1613년 농암을 추모하기 위한 향현사로 창건되었다가 숙종 때인 1700년 서원으로 개편되었다. 정문인 유도문, 강학공간인 전교당, 제사공간인 향현사, 숙박공간인 동서재로 이뤄져 있다. 분강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7년 옛터에 복원되었다. 그러다가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이 지역이 수몰되자 1975년 도산면 운곡리로 이전되었다가 2006년 농암유적지 정비사업을 통해 현재 위치인 가송리로 이전 복원되었다.

분강서원

 

이곳에는 책상 앞에 앉아있는 농암의 영정이 있었다. 1537년(중종 32년) 대구 동화사 승려 옥준이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 비단에 채색한 초상화로 크기는 가로 105㎝, 세로 126㎝다. 높은 모자와 허리띠 장식, 벼루갑과 서책이 놓인 경상, 손에 쥔 불자 등 16세기 고위 지방관 복식과 소도구 특징을 보여줘 자료 가치가 높다는 평가다. 문화재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 제872호로 지정 되었다. 현재는 이곳에 없고 한국국학진흥원에서 보관하고 있다. 농암 영정은 별본도 있다. 1827년 소당 이재관이 원래 영정을 모사한 그림이다. ‘영정개모일기’(보물 1202호)에 그림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기록에 따르면, 순조 27년(1827) 농암의 초상화가 망가질 것을 우려한 후손들이 이를 본 떠 다시 그려놓은 것이다.

 

▲애일당, 강각, 농암각자

분당서원을 지나 한 울타리에 있는 애일당과 강각으로 간다. 애일당은 농암이 46세 되던 1512년, 고향집 옆 분강 기슭의 농암 바위 위에 지은 정자다. 부친과 노인들이 함께 지낼 수 있는 경로당 개념의 정자다. 다만 현재 건물은 조선 후기에 지은 것이다. 1970년대 안동댐 건설에 따라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가 2006년 현재 장소로 다시 이건되었다. 농암은 ‘부모님의 살아계신 나날을 아낀다’는 뜻의 애일(愛日)을 당호로 사용했다. 우리나라에 많은 정자가 지어졌지만, 이렇게 효를 실천하기 위한 정자를 지은 것은 드물다.

오른쪽이 애일당이고 멀리 왼쪽이 강각이다. 그 뒤 절벽이 학소대다.

 

농암은 애일당에서 명절 때가 되면 부친과 이웃 노인을 모시고 어린아이처럼 때때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 안동부사로 재직하던 1519년 9월에도 남녀귀천을 막론하고 안동부내 80세 이상 노인을 초청해 축하연을 열고 장수를 축하했다. 이때 자신의 부친을 포함해 동네 노인 9명을 애일당으로 초청해 그 앞에서 색동옷을 입고 흰머리를 휘날리며 춤을 추었다. 그때 경로잔치를 열었던 모습은 보물(1202호)로 지정된 시화첩 ‘애일당구경첩(愛日堂具慶帖)’에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잔치에 여자와 천민을 가리지 않고 초청했다는 점에서, 당시 엄격한 신분사회였음을 생각할 때 농암의 열린 사고와 차별없는 인간애를 잘 보여준다는 평가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당대 명현 47명이 축하 시를 보냈다. 선조는 선행을 쌓는다는 뜻의 ‘적선(積善)’이란 글씨를 하사했다. 적선(積善) 글씨는 양각으로 새겨진 현판으로 만들어져 현재 농암종택 사랑채 마루벽에 걸려 있다. 농암은 1533년 67세에도 94세 아버지를 포함한 아홉 노인들을 모시고 어린아이처럼 때때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 효도 행사는 이후 아들 손자들에게도 계승되었다.

이현보가 경로잔치를 벌이는 그림 ‘화산양로연도’. 시화첩 ‘애일당구경첩(愛日堂具慶帖)’에 수록되어 있다.

 

애일당은 부친과 노인들이 함께 지낼 수 있는 경로당 개념의 정자
강각은 자연을 벗하기 위해 강가에 지은 누각

애일당 아래 ‘강각’은 1544년 농암이 자연을 벗하기 위해 강가에 지은 누각이다. 강각 앞을 흐르는 낙동강 건너편에는 한속담과 벽력암이 있다. 한속담은 물이 차가워 소름이 끼칠 정도의 못이라는 뜻이고, 벽력암은 벼락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는 바위라는 뜻이다. 강각은 주변 경관과 어울리며 농암이 이끄는 영남가단의 본거지로 쓰였다. 이황, 이언적, 주세붕 등이 이곳에 모여 풍류를 즐겼다. 풍류는 나중에 농암의 ‘어부가’로 표출되었다. 어부가는 퇴계의 도산12곡에 영향을 주고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로 이어졌다.

강각의 강가 쪽 아래에는 ‘壟巖(농암)’ ‘先生(선생)’ ‘亭臺(정대)’ ‘舊庄(구장)’이라고 두 자씩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 4개의 커다란 바위가 있다. 이른바 농암각자(聾巖刻字)인데 이 바위가 이곳에 있게 된 연원은 예안~도산 간 지방도로가 개설되었던 일제강점기로 올라간다. 당시 분천동에 있던 애일당 옆으로 도로가 나, 애일당을 분천리 마을 뒷산으로 옮겨야 했다. 마을에서는 옛 자리를 기념해 강변 바위에 ‘농암선생정대구장(壟巖先生亭臺舊庄)’이라는 여덟 글자를 새겼다. 정대는 정자와 누대의 준말이고, 구장은 옛터라는 뜻이다. 글자하나 크기는 대략 75㎝ 정도로 비교적 큰 편이다. 그 중 농암 두 자를 새긴 바위가 가장 커 길이가 5m나 된다. 나머지는 길이가 4m다. 1970년대 안동댐 건설로 농암각자가 물속에 잠기게 되자 이를 막기 위해 1975년 바위에서 글자만 떼어내 마을 뒷산으로 옮겼다. 그후 2006년 농암유적지 정비사업을 통해 도산면 가송리 현 위치로 다시 옮겨지게 되었다.

강각 아래 있는 농암각자

 

■농암 이현보의 삶

농암 이현보(1467~1555)는 도산면 분천리에서 태어났다. 32세이던 1498년 문과 병과에 합격해 벼슬길에 올랐다. 사간원 정언(1504년)과 사헌부 지평(1507년)을 거쳐 1508년 부모 봉양을 위해 영천군수를 자청하면서 한양을 떠난 지방 외직 생활을 시작했다. 농암은 시골의 양친을 모시기 위해 늘 지방근무를 자청했다. 그후 밀양, 충주, 안동, 성주, 대구, 영주, 경주, 경상도관찰사 등 여덟 고을을 전전하면서 30여년을 주로 안동에서 멀지 않은 지역에서 근무했다.

대부분의 관료생활을 외직으로 근무하는 동안 농암은 청백리의 모범을 보였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기록이 다수 남아있다. ‘농암은 일찍이 늙은 어버이를 위해 외직을 요청해 여덟 고을을 다스렸는데 모든 곳에서 명성과 치적이 있었다.’(중종실록), ‘경상도 관찰사 김당이 아뢰기를 “…신이 이 고을(성주)을 살피러 가니, 고을사람들이 길을 막고 이현보를 유임시켜주도록 지성스럽게 청했습니다.”’(중종실록), ‘충주 목사에 임명됐다.… 번거롭고 가혹한 세금을 개선했다. 잘 다스려 백성들이 기뻐했고, 이곳(충주)을 떠나던 날 쫓아와 붙잡고 눈물 흘리는 사람들이 길을 메웠다.’(퇴계의 ‘농암 행장’)

농암 영정. 보물 제872호다.

 

농암은 1542년 가을, 고향에 정착하겠다며 은퇴의 뜻을 조정에 알렸다. 중종을 비롯한 대신이 만류했으나 고집을 굽히지 않자 중종이 친히 농암을 불러 관복 띠인 ‘금서대’와 ‘금포’를 하사했다. 그리고 모든 대신이 참석하는 조선조 유일의 정계은퇴식을 열어주었다. 사화의 시대였는데도 사림과 훈구의 실력자들이 모두 참석했다. 궁궐에서 한강까지 전별 인사들의 행차가 이어졌다. 이언적은 장문의 전별시를 짓고 김안국과 권벌은 한강까지 나왔으며 주세붕은 죽령에서 농암을 맞이했다. 이황은 배를 타고 따라가면서 시를 바쳤다. 그런데도 임금은 낙향한 농암에게 벼슬과 선물을 내리며 다시 올라올 것을 종용했다. 거듭되는 상경 명령에도 올라가지 않자 1품인 숭정대부의 품계를 내려 예우했다. 그 덕에 눈을 감는 순간까지 직책을 갖게 되었다.

은퇴 후 농암은 고향에서 농부를 자임하며 퇴계 등 후배 문인들과 어울리며 안빈낙도의 삶을 살았다. 어느날 귀먹바위 ‘농암’에 올라 감격적인 시조 한 수를 읊었으니 유명한 ‘농암가’다. 1549년에는 농부와 어부로 살아가는 즐거움을 가사로 표현했다. 유명한 ‘어부가’다. 어부가는 고려 말부터 불려오던 시가로 농암에 의해 개작되었고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로 이어져 문학성이 더 풍부해졌다. 농암은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고기를 잡으며 살다 1555년 6월 89세로 세상을 떠났다. 나라에서는 효와 절개의 정신을 기려 ‘효절공’이란 시호를 내렸다. 문화관광부의 ‘2001년도 문화인물’로 선정되어 국가적 차원의 추모행사가 있었고, 2007년에는 ‘때때옷의 선비-농암 이현보 특별전’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되었다.

 

■고산정

안동에서 출발한 35번 국도는 청량산에 못미쳐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를 관통한다. 퇴계가 이곳을 지나면서 “소나무가 아름답다”고 감탄했다고 해서 가송리(佳松里)다. 35번 국도에서 오른쪽 소도로(가송길)로 꺾어져 몇 분 지나면 하천(낙동강 상류) 건너편으로 고산정이 보인다. 농암종택은 길을 따라 더 안쪽으로 들어간 곳에 있다. 가송길에서 고산정으로 차를 타고 가려면 하천을 건너야 하는데 1차선 시멘트 다리여서 건너편 상황을 살핀 후 건너가야 한다. 건너가서도 왼쪽 밭 사이 좁은 길을 200~300m 정도 또 조심조심 지나가야 한다. 고산정 바로 앞에 10대 정도 주차 공간이 있다.

고산정 모습

 

고산정은 강폭이 좁아지고 양편이 절벽인 가송협에 자리잡고 있다. 고산정 앞으로는 낙동강이 흐르고 뒤로는 안동팔경의 하나인 가송협의 절벽이 버티고 있다. 정자 주위로 축융봉에서 뻗어내려온 산줄기가 병풍처럼 둘러쳐 있고, 강 건너에는 송림과 함께 절벽이 움푹 솟아있어 마치 산수화 한 폭을 그려놓은 듯한 모습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에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아담하다. 3m가량의 축대를 쌓아 대지를 조성한 후 얕은 기단 위에 자연석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

고산정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였던 금란수(1530~1604)가 지었는데 그의 행장(行狀·죽은 사람이 평생 살아온 일을 적은 글)에 따르면 1564년(명종 19년)에 정자를 지은 뒤 일동정사라 부르며 늘 경전을 가까이 지냈다. 퇴계도 다른 문인들과 함께 여러번 찾아와 풍류를 즐기다 돌아갔다.

고산정에 주차하지 않고 농암종택에 주차한 뒤 걸어서 고산정을 다녀올 수도 있다. 반대로도 가능하다. 두 고택 사잇길이 시멘트길인게 다소 아쉽긴 하지만 퇴계예던길의 일부이고 청량산 축융봉과 낙동강을 바라보며 걷는 것이니만큼 충분히 걸을만한 가치가 있다. 왕복 1시간 정도 걸린다. 고산정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2018년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한 장면이 이곳에서 촬영되면서였다. 주인공 애신(김태리 분)과 유진(이병헌 분)이 배를 타고 오가던 아름다운 나루터 장면이 바로 고산정 앞 전경이다.

드라마 ‘미스터 션사인’의 한 장면. 건너편이 고산정이다.

 

☞ [안동 어데 가봤니껴] 6회 시리즈 모두 보고싶다면 클릭!!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