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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오름 가봐수까 ⑫] 어승생악 올라보지 않고 윗세오름 모두 안다고 자신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윗세오름 감상의 화룡점정이 어승생악이기 때문이지요

↑ 어승생악 정상에서 바라본 윗세오름

 

☞ 내맘대로 평점(★5개 만점). 등산요소 ★★ 관광요소 ★★★★

 

by 김지지

 

■오르기 까지

 

윗세오름은 제주도 전체 오름 중 단연 으뜸이다. 그 어떤 오름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오름의 지존이다. 윗세오름의 들머리는 어리목과 영실이다. 그중 어리목에서 오르거나 내려오는 사람은 주차장 바로 뒤에 어승생악 오름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도 어승생악의 진면목을 알지 못해 지나치기 십상이다. “윗세오름에 올라갔다가 내려와 시간이나 힘이 남으면 어승생악에도 올라가봐야지”라고 생각한 사람조차도 어승생악과 인연이 없을 때가 많다. 윗세오름이 힘든 것도 있지만 윗세오름 1500m 고지에 넓게 펼쳐진 평원길을 걸으며 최고의 조망에 감탄사를 연발했던 터라 상대적으로 호기심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나 역시 수년 전 늦가을, 고교 동창들과 영실로 올라가 어리목으로 내려올 때 시간이 나면 어승생악에 올라가야지 생각했다가 힘이 들고 해가 빨리 져 포기한 적이 있다. 해서 이번에는 해가 긴 4월말을 택하고 “반드시 다녀오겠다”며 각오를 단단히 했다.

어리목 주차장에서 바라본 어승생악 전경

 

같은날 ,윗세오름과 어승생악을 패키지로 오른 것은 2021년 4월 27일이다. 동반자는 뒤늦게 산행맛을 알게된 아내다. 영실에서 올라가 어리목으로 내려와 어승생악에 올랐다. 보통 윗세오름 코스는 4~5시간이면 족하나 우리는 6시간 걸렸다. 그만큼 놀며쉬며 구경하며 올랐다는 것인데 요즘 나와 아내의 산행 스타일이 이렇다. 그래도 50대 중후반의 마나님이 윗세오름을 6시간이나 걷고 내려와 곧바로 어승생악에 오르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사실 1년 전 4월, 아내에게 윗세오름의 진수를 보여주기 위해 영실로 올라가다가 장염 때문에 중간에 포기한 적이 있다. 아내도 나 때문에 포기해야 해서 이번에는 반드시 모시고 올라가야 했다. 어승생악은 나도 처음이어서 기대가 컸다. 다행히 해가 길고 천천히 걸어 우리 둘 다 어승생악에 오를 정도의 힘과 시간은 남아있었다.

 

■이런 곳

 

어승생악(御乘生岳)은 임금이 타는 어승마(御乘馬)가 태어난 곳이라고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 해발고도는 1169m이지만 비고(순수 높이)는 350m에 불과하다. 비고를 기준하면 제주에서 산방산(395m)과 영실 오백나한(389m)에 이어 세 번째 높은 화산체다. 정상 부근에 지름 200여m의 분화구가 있다. 단일 분화구를 가진 오름 중에선 가장 높은 곳이다. 참고로 한라산은 오름이 아니다. 면적을 기준하면 제주도 오름 중 군산오름 다음으로 넓다.

어승생악은 독립된 발광체라기보다 윗세오름의 반사체 특성을 갖고 있다. 즉 윗세오름이 있기 때문에 어승생악도 빛을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윗세오름이 얼마나 멋진 곳인지를 한눈에 알 수 있는 곳이 어승생악이라는 점에서 윗세오름에게 어승생악의 존재는 각별하다. 물론 어승생악은 윗세오름과 연관짓지 않고서도 자체 매력을 갖고 있다. 따라서 체력적으로 본격 등산은 엄두가 나지 않고, 일정이 빠듯해 긴 시간을 내기 어려운 사람에게 어승생악이야말로 최고의 조망 코스다.

어승생악 오름길

 

■직접 올라보니

 

산행 출발점은 어리목 주차장 뒤 어승생악 탐방안내소 옆이다. 정상까지 거리는 1.3㎞에 시간은 30~40분쯤 걸린다. 일부 급경사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경사가 완만해 가족 단위의 나들이에도 좋다. 데크계단이 많아 악천후가 아닌 이상 사계절 언제나 오를 수 있다. 어승생악은 오름길 내내 온통 숲이다. 중간중간 이색적인 나무들도 많다. 바위 위에 뿌리를 내린 나무, 바위를 감싼 나무 등도 있다. 그것을 본 마나님이 “곶자왈 같다”, “정글 같다” “밀림 같다”고 하신다.

바위와 공존하며 사는 이색적인 나무들

 

어승생악은 자연학습장으로도 잘 꾸며져 있다. 중간중간에 ‘새들은 어떻게 생활할까요’ ‘숲의 변화’ ‘어승생악의 야생화’ ‘어승생악의 동물들’ 식의 테마를 정해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다. 식생이 다른 수종의 나무들마다 친절하게 이름을 붙여놨다. 이왕이면 알고 가라는 뜻일진대 사실 나에게 나무 이름 공부는 부질없다. 그렇지 않아도 외울 거 많은 세상에 일일이 기억할 수도 없고 잠시 기억했다 해도 곧 잊어버리기 일쑤여서 그렇다.

어승생악 오름길

 

가파른 계단길과 평평한 데크길을 30분 정도 오르면 어느 순간 숲이 벗겨지면서 하늘이 보이고 한라산이 웅자를 드러낸다. 먼저 눈길을 끄는 건 너른 데크광장이다. 아무데나 앉거나 누워 석양 노을을 바라보면 어떨까를 상상해본다. 어승생악 정상 조망은 예상을 뛰어넘는다. 탁트인 사방이 광활하고 웅장하다. 윗세오름을 걸을 때는 알지 못했던 윗세오름의 전모가 한 눈에 들어와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소 잔등처럼 펑퍼짐한 구릉지 위로 한라산 백록담 화구벽이 봉긋 솟아있고 그 오른쪽으로 윗세오름의 대평원이 길게 펼쳐져 있다. 대평원 위로는 우리가 오전에 지나면서 살펴보았던 윗세오름, 만세동산, 사제비동산, 민대가리오름 등이 사이사이 자리잡고 있다. 전체적으로 편안한 윗세오름 지형에서 강렬하게 보이는 것은 한라산 서쪽 한 가운데를 굵고 깊게 파고든 뒤 급격하게 내려가면서 세력을 키우는 Y자 계곡길이다. 유일하게 회색인 어리목 주차장이 초록의 산 속에서 홀로 선명하다.

어승생악 정상에서 바라본 윗세오름 능선과 Y자 계곡

 

정상에서 북쪽과 서쪽을 바라보면 제주시와 애월읍이 낮게 깔려있고 그 너머에 제주 바다가 푸른 빛을 띄고 있다. 남쪽으로는 윗세오름에서 바다까지 완만한 경사로 흘러내린 용암이 만들어놓은 대평원이다. 사이사이에 하루 전 올라갔던 노꼬메오름과 바리메오름이 형제처럼 사이좋게 붙어있다. 어승생악 정상에서 그 모습을 바라본 한 기자는 “황제인 한라산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필하며 섬의 북쪽을 관장하고 있는 듯하다”고 썼다.

어승생악 정상의 데크 광장

 

정상에는 원뿔형 화구호(산정호수)도 있다. 둘레는 250m, 깊이는 20m가량 된다. 다만 어승생악 화구호는 큰비가 와야 물이 고인다. 과거에는 꽤 많은 물이 고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내륙화가 진행되어 물 고인 화구호를 보기 어렵다.

어승생악 정상의 분화구. 물이 없다.

 

■일본군 진지

 

어승생악 정상부엔 아픈 역사의 현장이 있다.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일본군이 제주시와 조천·애월·한림 등 서부지역이 손에 잡힐 듯 내려다보여 전략적 요충지인 이곳에서 최후까지 지구전을 펼치기 위해 구축한 토치카 진지다. 토치카는 현재 정상부에 2개, 3부와 8부 능선에 3개가 남아 있다. 정상부 토치카는 감시 초소와 방어시설물 역할을 하도록 두꺼운 철근과 시멘트로 견고히 구축했다.

정상부 동북쪽과 서북쪽에 30여m 거리를 두고 있는 2개의 콘크리트 벙커는 내부에서 밖을 관측할 수 있는 구조다. 구축 당시에는 서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함몰된 상태라 확인할 수 없다. 어승생악 남동사면 허리에는 일직선으로 되어 있는 지하 갱도진지가 숨겨져 있다. 총길이는 35m 정도 규모다. 정상부의 토치카 시설이 이 지하 갱도진지와도 연결되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이 당시 동원되었던 사람들의 증언이다.

일본군 진지 안에서 밖을 관측하면 이런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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