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땅 구석구석

[보길도 여행] 명승지(名勝地)로 사랑받게 된 것은 윤선도가 조성한 부용동원림(園林), 낙서재, 동천석실 덕분이지요

↑ 동천석실 앞 용두암에 앉아 있는 순호씨. 저 아래는 부용리 마을이고 구름에 가린 격자봉 아래에 낙서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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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지

 

☞ 내맘대로 평점(★5개 만점). 등산요소 ★★  관광요소 ★★★★

 

고교 동창인 순호 영석 영일 정형 넷이서 2박 3일 남도 여행의 일환으로 2021년 5월 28일 처음 다녀온 보길도는 기대 그 이상이었다. 구석구석을 둘러보는데 하루로는 부족했다. 아쉬움이 계속 남아 1년 뒤인 2022년 4월 30일 대학친구인 희용 부부와 우리 부부 넷이서 또다시 보길도를 다녀왔다.

보길도 지도

 

■보길도 여행 가이드

 

▲여객선

전남 완도의 보길도는 비교적 큰 섬인데도 직항 여객선이 없어 이웃 섬인 노화도에서 내려 두 섬을 잇는 보길대교를 건너야 한다. 노화도행 여객선은 전남 완도와 해남 두 곳에서 출항한다. 완도에서는 화흥포항에서 출항해 노화도 동천항에 내리고 해남에서는 땅끝마을 선착장인 갈두항에서 출항해 노화도 산양진항에 내린다. 화흥포항이든 갈두항이든 노화도를 오가는 여객선은 대략 1시간 단위로 하루 10여 편 운행한다. 운행 시간은 30분 정도이고 요금(승객·승용자 모두)은 갈두항이 화흥포항보다 살짝 저렴하다. 거리는 완도에서 18㎞, 해남군 땅끝에서 12㎞ 떨어져 있다.

우리는 완도 화흥포항에서 배를 탔다. 보길도 여행을 효율적으로 하려면 여객선에 승용차를 싣고 가는 것이 좋다. 화흥포항 기준 승용차 요금은 2만원이다. 물론 승용차 없이 떠나는 여행자들도 있다. 마을버스와 택시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마을버스의 운행 횟수가 적고 택시요금이 만만치 않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완도를 떠난 여객선이 노화도 동천항 가까이 다가가니 날렵하게 생긴 흰색 다리가 여객선 머리 위에서 우리를 맞는다. 동천항 앞 작은 섬 구도와 노화도를 잇는 소안1교다. 여객선이 소안1교 아래를 지나 동천항에 다다랐을 즈음, 뱃길 좌우 너른 바다에 전복 양식장 부표가 마치 연꽃처럼 바다 위에 펼쳐 있다. 사월 초파일, 절 마당에 내건 연등처럼 컬러풀하다. 동천항에 내린 후 구도(섬)가 궁금해 승용차로 소안1교를 건너가 봤으나 딱히 볼 게 없는 작은 섬이다. 그런데도 바다를 가로지르는 780m 길이의 대형 교각(소화1교)을 세운 것으로 미루어 장차 이웃 섬인 소안도까지 확장할 계획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노화도 동천항에서 보길도로 이동하려면 장사도라는 작은 섬을 징검다리 삼아 세운 주황색 보길대교를 건너야 한다. 동천항에서 보길대교까지는 승용차로 10분 거리다.

보길대교. 다리 오른쪽이 보길도이고 가운데 섬이 장사도이고 왼쪽이 노화도다. (출처 보길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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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객선에서 바라본 소안1교와 구도(왼쪽)

 

▲보길도 개요

보길도(甫吉島)는 전남 완도군 보길면에 속하는 여러 섬 가운데 가장 크다. 동서 길이 12㎞, 남북 길이 8㎞다. 섬 중앙에 거대 분지가 있고, 분지 한가운데에 보길도 주민들의 식수원인 보길저수지가 자리하고 있다. 섬의 가장자리를 도는 일주도로는 비교적 잘 깔려 있다. 다만 섬의 남쪽(보옥리~예송리) 5~6㎞ 구간은 험한 바위 지형이어서 도로가 없다. 2019년 일주도로가 완성되기 전 울릉도와 흡사한 도로 구조다.

보길대교를 건너 보길도 동쪽에 닿으면 가운데 길이 윤선도 원림(혹은 부용동 원림)이 자리잡고 있는 부용리 방향이다. 우측(북쪽) 길은 섬을 180도 돌아가야 만나는 보옥리의 보죽산과 공룡알해변 방향이고, 좌측(남쪽) 길은 예송리 상록수림 방향이다. 예송리로 가는 중간에 동쪽으로 빠지면 절경 지대인 도치미끝과 송시열의 글씐바위로 이어진다.

보길도는 크지 않은 섬인데도 격자봉, 수리봉, 광대봉, 망월봉, 뾰족산, 도치미 비단결 같은 능선과 깎아지른 절벽을 가진 명산 절승이 많아 산행과 트레킹도 즐길 수 있다. 대표적인 봉우리는 남쪽 격자봉(433m), 동쪽 광대봉(313m), 서쪽 망월봉(364m)이다. 그런 점에서 보길도를 섬이라 하지 않고 산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크지는 않지만 특색 있는 해수욕장을 두어군데 갖추었다는 것도 보길도의 자랑이다.

 

■보길도와 윤선도

 

▲윤선도가 보길도에 터 잡은 사연

보길도가 우리나라 대표 명승지로 유명해진 것은 윤선도(1587~1671) 덕분이다. 보길도의 얼굴 격인 부용동 원림(園林), 낙서재, 동천석실 등을 윤선도가 직접 조성했기 때문이다. 보길도를 윤선도의 유배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지만 보길도는 윤선도의 유배지가 아니라 별장지(別莊地)에 가깝다. 윤선도가 보길도에 터를 잡은 것은 50살이던 병자호란(1636.12~1637.1) 때다. 윤선도의 입도(入島) 과정과 터를 잡은 기록이 윤선도의 5대 손인 윤위(1725∼1756)가 24세 때 보길도를 답사하고 쓴 기행문 ‘보길도지’에 남아있다.

윤선도 정보센터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봉림대군(후에 효종)과 인평대군 두 왕자를 강화도로 피란시키고 자신도 강화도로 가려 했으나 이미 청나라 군에 의해 길이 막히자 소현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전남 해남에 칩거하던 윤선도는 비통한 마음에 가노(家奴)와 주민들을 이끌고 뱃길로 강화도를 향해 떠났다. 그런데 항해 도중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전남 영광으로 돌아왔다. 머지않아 인조가 송파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윤선도는 절망한 마음에 육지에 오르지 않고 뱃머리를 돌려 제주도로 향했다. 굴욕적인 패배와 강화를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어 청나라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제주도에 은거할 생각이었다.

윤선도 일행은 제주도를 향해 남하하던 중 바람 길이 바뀌자 해남에서 멀지 않은 보길도 황원포에 닻을 내리고 범선을 날라줄 바람을 기다렸다. 그 사이 보길도 자연을 둘러보다가 보길도의 때묻지 않은 비경과 수려한 산세에 매료되어 제주에 은둔하려던 꿈을 접고 보길도에 정착하기로 했다. ‘보길도지’에는 당시 윤선도가 “하늘이 나를 기다려 이곳에 멈추게 한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윤선도는 분지로 된 보길도의 가운데 지역이 마치 연꽃 봉오리가 피어오르는 것 같다며 이름을 부용동(芙蓉洞)으로 지었다.

윤선도 표준영정

 

“하늘이 나를 기다려 이곳에 멈추게 한 것”

윤선도는 험난했던 정치인 생활과는 달리 보길도에서는 풍유를 즐기는 풍족한 은거생활을 했다. ‘보길도지’에는 이 시절 윤선도의 근황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병자년 이후부터 세상에 뜻이 없었다. 인간사를 사절한 채 산을 찾고 바다로 들어가 천석의 뛰어난 곳을 택하여 그곳에 살았다. 흐르는 물을 끌어들이고 나무를 심고 그 위에 정자를 수축하여 산수의 즐거움을 누렸다.”

윤선도는 보길도에 터를 잡은지 얼마 안되어 13세였던 설씨녀를 만나 셋째 부인으로 삼고 보길도에 살림을 차렸다. 현재 보길도의 윤씨들은 그 후손들이다. 윤선도의 주된 주거지는 본처와 자식들이 있는 해남의 녹우당이었고 보길도의 집들은 첩실과 그 자식들이 기거하는 집이자 별장이었다. 윤선도는 보길도에 부용동 원림을 조성하면서 25채의 부속건물을 지었다. 세연지를 조성하고 세연정, 낙서재, 동천석실을 지었다. 거느린 가노(家奴)만 수백 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그런데도 자신의 막대한 부를 임진·병자 양대 전쟁 이후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위해 사용하기 보다는 자기 왕국이나 낙원을 꾸미는데 허비했다는 지적을 오늘날 받고 있다.

윤선도는 64세 되던 해인 1651년 보길도를 배경으로 연시조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짓는 등 다수 시가를 창작해 부용동을 국문학의 산실로 만들었다. 윤선도는 해남과 한양, 유배지였던 함경도 삼수, 경상도 영덕 등을 들락거리며 보길도에서만 13년의 세월을 보내다 보길도에서 84세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윤선도원림(부용동원림) 혹은 세연지

윤선도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한눈에 알려주는 곳이 보길도 관광정보센터다. 윤선도 관련 유적지와 관광지를 자세히 소개하고 안내팜플렛도 나눠준다. 보길도에 산재한 윤선도 유적지 중 백미는 부용동 원림이다. 이곳에 들어가려면 관광정보센터를 거쳐야 한다. 센터를 둘러보고 밖으로 나가 100~200미터 쯤 진행하면 윤선도가 부용동 일대에 대규모로 조성한 세연지, 세연정, 회수담 등이 나타난다.

부용동 원림은 이곳 부용리 세연정 일대의 위락공간, 위쪽 부황리에 조성한 낙서재 등의 주거공간, 동천석실 일대의 선계공간을 합쳐 말하기도 하고 세연정 정원만 한정해 말하기도 한다. 그러다 위 3개 공간 전부가 대한민국 명승 제34호로 지정되면서 공식 명칭이 ‘윤선도 원림’으로 바뀌었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5대 정원을 꼽을 때 세연정 일대 부용동 정원을 포함시킨다. 다른 네 곳 정원은 경주 안압지, 창덕궁 비원, 서울 성락원, 담양 소쇄원이다. 양산보의 담양 소쇄원, 정영방의 영양 서석지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별서(별장) 정원’으로 손꼽는 전문가들도 있다.

세연정과 세연지

 

부용동 정원의 백미는 윤선도의 조형 감각이 두드러지게 발휘된 세연지다. 보길도 최고봉인 격자봉에서 흘러내린 계곡물이 지하로 흐르다가 샘물처럼 솟아올라 다른 골짜기에서 내려온 지류들과 합쳐 못을 이룬 곳이다. 윤선도는 물에 씻은 듯이 맑고 깨끗한 풍경이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라는 뜻에서 이름을 세연지(洗然池)로 지었다. 윤선도는 세연지의 저수를 위해 판석보(板石洑)를 먼저 만들었다. 우리나라 정원 중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물막이 석축이면서 수중보(水中洑)다. 건기에는 돌다리가 되어 아름다운 조형을 이루고, 개울의 물이 넘치는 우기에는 폭포가 되어 수면이 일정량을 유지하도록 설계했다. 활처럼 굽은 판석보 규모는 높이 1m, 폭 2.5m, 길이 11m다.

 

명승 제34호로 지정되면서 공식 명칭 ‘윤선도 원림’으로 바뀌어

판석보로 물이 고인 곳이 계담(溪潭)이다. 계담 옆에는 3칸짜리 정자인 세연정(洗然亭)을 짓고 세연정 뒤에는 계담의 물을 이용한 인공연못을 만들었는데 회수담(回水潭)이다. 윤선도는, 계담은 자연그대로의 경관을 살리고, 인공적으로 조성한 회수담은 물의 속도를 최대한 떨어뜨려 정적인 공간으로 연출할 생각이었다. 그러러면 계담의 물이 세연정 동쪽 축단 밑에 만든 터널식 수입구(水入口)를 통해 회수담으로 일정하게 흘러들어가야 한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이른바 ‘5입3출(五入三出)’과 ‘고입저출(高入底出)’이다.

‘5입3출(五入三出)’은 수구(水口)에 다섯 곳의 흡수구를 만들어 흐르는 물을 받아들이되 배출구는 세 곳만 만들어 들고 나가는 수량을 일정하게 조절할 수 있도록 만든 구조다. ‘고입저출(高入底出)’은 흡수구와 배출구에 30㎝의 낙차를 두고 이 수압 차이로 물이 잘 흘러들어가고, 물이 수심 아래 바닥 쪽으로 유입되도록 함으로써 인공연못의 수면을 고요하게 유지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윤선도는 이러한 장치를 통해 회수담의 수면을 잠잠하게 유지시킨 후 그곳에 투영되는 그림자를 즐겼다. 윤선도는 또한 계담 곳곳에 기암괴석을 배치해 자연적인 조화를 이루게 하고 회수담에는 연꽃을 심어 운치를 더하게 했다. 세연정 양 옆으로는 큼직한 너럭바위로 단을 쌓은 동대와 서대를 만들어 무희들이 춤을 추도록 했다.

세연정 조감도

 

세연정 앞 계담에는 7개 바위를 칭하는 칠암(七岩)이 있다. 힘차게 뛰어갈 것 같은 황소 모습의 혹약암(或躍岩)도 있고, 윤선도가 건너편 산 중턱의 거대 바위를 향해 활을 쏠 때 발받침 역할을 하는데 이용했다는 사투암(射投岩)도 있다. 활이 닿는 건너편 거대 바위에는 ‘옥소대’라는 이름이 붙었다. 세연지에서 산 중턱의 옥소대로 가려면 80m를 올라가야 하는데 사전 정보가 없으면 지나치기 쉬운데 반드시 올라가보아야 할 곳이다. 옥소대에 올라가려면 거대 바위의 틈인 ‘석문’을 지나는데 석문 옆 작은 안내판에 ‘石文’으로 되어 있어 ‘石門’이 맞다고 2021년 처음 이 글을 쓸 때 지적했다. 이 글 때문은 아니겠지만 1년 뒤인 2022년 4월 다시 가보니 ‘石文’ 한자를 아예 없애버렸다.

옥소대에 오르니 절로 탄성이 터져나온다. 바위 자체가 널찍한데다 옆에서 바라보면 꽤나 높아보이는 거대 바위이기 때문이다. 멀리 윤선도가 수백년 전 닻을 내린 황원포 앞바다가 손에 잡힐 듯하고 발 아래로 세연정이 내려다보인다. 바람까지 좋아 그곳에서 한참을 쉬었다.

왼쪽은 옥소대 올라갈 때 지나는 석문이고 오른쪽은 옥소대다. 그 뒤는 황원포 앞 바다다.

 

▲낙서재(樂書齋)

부용동 정원을 둘러본 뒤, 도로를 따라 산쪽으로 2㎞ 정도 올라가면 부용리 마을회관 앞에서 낙서재와 동천석실 양 방향으로 갈라진다. 낙서재는 윤선도가 1637년 보길도에 들어와 1671년 눈을 감을 때까지 살았던 살림집이자 서재다. 이곳에서 시문도 창작하고 강론도 했다. 동천석실은 윤선도가 차를 마시고 시문을 즐긴 산 중턱의 정자다. 두 곳은 부용리 마을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서 마주보고 있다. 거리는 0.7㎞이고 중간 지점에 대형 주차장이 있다.

낙서재는 격자봉 밑자락에 있다. 이 집에서 평생 ‘글을 읽는 즐거움’을 만끽하겠다는 윤선도의 생각이 낙서재(樂書齋) 이름에 담겨있다. 주차장에서 낙서재를 향해 걷다 보면 말끔하게 복원한 곡수당(曲水堂)이 보인다. 윤선도와 설씨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학관이 휴식을 취할 목적으로 조성한 공간이다. 낙서재 골짜기에서 흐른 물이 이곳 인근에 이르러 곡수를 이룬다. 낙서재는 곡수당에서 지척이다. 낙서재 건물은 오래전 소실되었다가 최근 복원했다.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복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고풍스럽고 운치가 있다. 앞은 탁 트여있다.

곡수당

 

낙서재 앞 안내판을 보자. <윤위의 ‘보길도지’에 따르면 처음 이곳에 집을 지을 때는 수목이 울창해서 산맥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사람을 시켜 장대에 깃발을 들고 격자봉을 오르내리게 하면서 높낮이와 향배를 헤아려 집터를 잡았다. 입지는 보길도 안에서 가장 좋은 양택지다. 강학하고 독서하면서 소요하고 은둔하고자 하는 선비의 생활공간이었다. 처음에는 모옥(茅屋)으로 지어 살다가 그 뒤에 잡목을 베어 거실을 만들었는데 후손들에 의해 와가(瓦家)로 바뀌었다.> ‘모옥(茅屋)’ ‘와가(瓦家)’를 그냥 ‘초가집’ ‘기와집’이라고 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윤선도는 낙서재에서 자연과 산수를 노래하다가 84세(1671년)에 생을 마쳤다. 윤선도는 시문에서 낙서재를 이렇게 노래했다. ‘한 발 되는 초가집 비록 나지막하나 / 다섯 수레의 책은 많기도 하네 / 어찌 한갓 나의 근심만 푸는 것일 뿐이랴 / 바라건데 나의 허물도 수선할 수 있기를’

낙서재

 

당시 낙서재 앞에는 귀암(거북바위)이 있었다. 화강암을 쪼아 거북형상을 만든 것인데 윤선도가 거북바위에서 달을 감상하곤 했다는 당시 기록이 있다. 윤선도가 지은 한시 ‘귀암’도 있다. 그런데 있어야 할 귀암이 언젠가부터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2011년 낙서재 14m 앞 땅속에서 발굴되어 비로소 실물이 세상에 알려졌다. 길이 370㎝, 너비 270㎝, 높이 95㎝의 큰 화강암이다. 거북바위 발견으로 ‘보길도지’에 기록된 소은병, 낙서재, 귀암의 축선이 확인되었고 이는 낙서재를 복원하는데 중요한 지표로 활용되었다. 소은병(小銀甁)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낙서재 뒤에 있는 2.5m 크기의 병풍바위인데 병풍 느낌은 약하다.

낙서재 앞은 탁 트여있다. 저 멀리 산 능선 중턱에 동천석실이 앉아있다. 아래 바위는 2011년 발굴된 거북바위

 

▲동천석실(洞天石室)

낙서재를 등지고 서서 맞은편 산 중턱을 바라보면 멀리 산자락에 조그만 정자가 외롭게 앉아 있다. 자연 바위들을 이용해 만든 바위 정원인 동천석실(洞天石室)이다. 윤선도는 절벽 위에 한 칸짜리 정자를 세우고 바위에서 솟아나는 석간수를 받아 작은 연지(蓮池)를 만들었다. 틈 날 때마다 이곳에 올라가 차를 마시고 시문을 즐겼다. 동천석실이 명승이 된 것은 절벽의 정자도, 바위 위의 연못도 아니다. 격자봉이 품어안은 부용리 마을의 안온함 덕에 비로소 명승이 되었다. 요즘은 전국 어딜가나 ‘동천(洞天)’이 들어간 지명이 많다. 동천석실에서 ‘동천’은 도교의 신선들이 사는 명승지를 뜻하는 ‘동천복지(洞天福地)’에서 따온 이름이다. 국어사전에서는 동천을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이라는 뜻으로 설명하고 있다.

동천석실

 

개울 위 돌다리를 건너가면 시작되는 동천석실 초입은 온통 꼬불꼬불한 동백나무숲이다. 하늘을 가릴 정도로 우거지다. 동백나무가 한창인 3월 모습이 궁금하다. 좁다란 산길을 따라 중턱쯤 올라가면 한칸짜리 침실이 있고 그곳에서 20m 위에 자연석을 이용해 조성한 동천석실이 속세를 내려다보고 있다. 동천석실은 기암괴석, 연못, 나무들과 절묘한 배치를 이루고 있다. 동천석실 자체 경관도 경관이지만 그곳에서 내려다보는 부용동 골짜기의 원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산자락과 상수원 저수지, 농토와 아담한 촌락 등 마을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윤선도가 연꽃 한 송이가 피어나는 것 같다는 의미의 부용동이라 이름지은 이유를 새삼 알게 된다.

윤선도 생존 시, 동천석실에서 산 아래까지는 도르래로 줄을 연결해 음식 등 필요한 물건을 날라다 실었다. 당시 도르래를 설치한 바위 2개가 동천석실 앞을 지키고 있다. 동천석실 앞에는 윤선도가 차를 마시던 차바위도 있다. 바위에 차 상다리를 고정 할 수 있도록 파놓은 몇 개 구멍이 지금도 남아있다. 윤선도는 이곳에서 격자봉, 곡수당, 낙서재 등을 바라보면서 다도를 즐겼을 것이다. 윤선도는 ‘동천석실’에 대해서도 시문을 남겼다. ‘수레에는 소동파의 시 / 집에는 주문공의 글을 / 어찌 여섯 겹의 문이 있으리 / 뜰에는 샘물과 정자, 연못이 고루 갖춰져 있네’

부용동 원림, 낙서재, 동천석실을 다 둘러보면 여행 포만감에 사로잡힌다. 그런데도 아쉬움이 남아있는 것은 현판 글씨 때문이다. 윤선도 글씨를 집자해 현판을 달았으면 의미도 있고 보기에도 좋으련만 어쩌다 흔하디 흔한 몰개성의 글씨로 현판을 만들었을꼬.

동천석실 올라가는 동백나무숲과 동천석실 안에서 쉬고 있는 친구들

 

■예송리 상록수림과 천연기념물

 

전남 완도군에는 천연기념물이 7개나 된다. 이 가운데 보길도와 주변 섬들에만 3개다. 예송리 상록수림(제40호), 예작도 감탕나무(제338호), 정자리 황칠나무(제479호)다. 예송리 상록수림은 보길도 남서쪽 해안도로를 타고 가다가 맨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오랫동안 울릉도의 해안도로 일부가 막혔던 것처럼 보길도 역시 해안가 절벽으로 인해 예송리에서 길이 막힌다. 예송리 해변은 활처럼 부드럽게 휘었다. 1.5㎞ 해변이 검푸른 조약돌이다. 바다가 깎고 저희들끼리 비벼대 모가 없다. 마을 사람들은 ‘깻돌’이라고 부른다. 공룡알해변의 갯돌과 깻돌은 다르다. 국어사전으로 말하면 ‘갯돌’은 개천에 있는 큼지막한 둥근 돌을 말하고 ‘깻돌’은 오랫동안 갈리고 물에 씻겨 반질반질하게 된 잔돌을 뜻하는 자갈의 방언이다.

예송리 상록수림은 약 300년 전 태풍 피해를 막기 위해 이곳 주민들이 만든 반달 모양의 방풍림이다. 애초에는 바닷가를 따라 1.5㎞ 길이로 늘어서 있었으나 지금은 약 740m로 줄어든 상태다. 그나마 생태탐방로는 150m 정도다. 이름을 알지 못하는 온갖 상록활엽수가 서로 어깨를 겯고 서서 300년째 방풍림 역할을 해내고 있다. 설명에 따르면 후박나무·구실잣밤나무·붉가시나무·생달나무·감탕나무 등이란다. 상록침엽수림인 곰솔(해송)과 낙엽활엽수인 팽나무 작살나무 누리장나무 등도 있다.

예송리 해변 (출처 완도군청)

 

기대를 한껏 하고 갔으나 해안은 물론 수림 안에도 쓰레기가 많고 어수선해 살짝 감상을 방해한다. 침엽수림 안을 관통하는 데크길도 짧아 수림 속을 거니는 맛도 떨어진다. 쓰레기야 비용이 많이 들어 치우기 어렵겠으나 데크는 한번 길게 만들어놓으면 그 자체로 경쟁력을 갖춘 관광상품이 될 터이니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유인책이 될 것 같다. 또한 예송리 해수욕장은 침엽수림 때문에 유명하지만 수심이 깊고 가팔라 앉아서 놀기에 좋은 곳일 뿐 물놀이에는 적당치 않아 보인다. 보길도에서 해수욕장으로 적당한 곳은 경사가 완만하고 깊지 않은 중리와 통리 백사장이다. 특히 중리해수욕장은 수백 미터를 바다로 나가도 어른 가슴까지밖에 차지 않는 천혜의 물 놀이터이다.

보길도 천연기념물 중 정자리 황칠나무는 우리나라 황칠나무 중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다. 나이는 약 150살이고 키는 15m다. 예송리해수욕장 앞 바다에 예작도가 있다. 이곳엔 감탕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는데 그중 가장 큰 감탕나무가 천연기념물 제338호로 지정되어 있다. 나이는 약 300살 정도이고 키는 15m다. 예작도 뒤에는 풍란자생지로 유명한 무인도인 복생도가 있다.

예송리 상록수림

 

■송시열 끌씐바위

 

보길도에는 송시열의 유적도 있다. 암각시문(巖刻詩文)인 ‘송시열의 글씐바위’다. 보길대교에서 예송리 상록수림 방향으로 가다가 삼거리에서 동쪽 해안도로 방향 끝 지점에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송시열은 윤선도와 정치적으로 앙숙인 서인에 속하지 않는가. 윤선도가 오랜 세월 유배 생활을 한 것도 서인 때문인데 송시열의 유적이 ‘윤선도의 정원’이나 다름없는 보길도에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무슨 연유일까.

안내문에 따르면, 윤선도가 죽고 18년 뒤인 1689년 송시열이 숙종에게 왕세자 책봉 반대 상소를 올렸다가 83세 나이로 제주도로 유배가던 중 폭풍을 만나 보길도 보길면 백도리에 잠시 머물렀다. 그때 오언절구 시를 남겼는데 이것을 누군가 바위에 새긴 것이다. 송시열은 바다를 바라보며 임금에 대한 서운함과 그리움을 표현하며 신세를 이렇게 한탄했다. ‘여든셋 늙은 몸이 / 푸른 바다 한 가운데 떠 있구나 / 한마디 말이 무슨 큰 죄일까 / 세 번이나 쫓겨난 이도 또한 힘들었을 것이다 / 대궐에 계신 님을 속절없이 우러르며 / 남녘 바다의 순풍만 믿을 수밖에 / 담비 갖옷 내리신 옛 은혜 있으니 / 감격하여 외로운 충정으로 흐느끼네’ 소안도와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임금에 대한 서운함과 그리움을 표현하고 신세를 한탄하는 글이다.

다만 글자 크기가 작고 해풍에 마모되어 뚜렷하지 않다. 송시열의 친필도 아니니 특별한 의미도 없다. 송시열은 결국 그해 6월 국문(鞫問)을 받기 위해 올라가던 중 정북 정읍에서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났다.

송시열 글씐바위가 새겨있는 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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