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두륜산]은 소잔등처럼 부드러운 능선과 대형암릉·기암이 조화를 이룬 대한민국 66번째 명승(名勝)이자 100대 명산(名山)
2021년 6월 25일 · zznz

↑ 두륜봉에서 바라본 고계봉, 노승봉, 가련봉(왼쪽부터)
by 김지지
☞ 내맘대로 평점(★5개 만점). 등산요소 ★★★ 관광요소 ★★★★
☞ 코스와 거리 : 총 6.0㎞
대흥사(표충사) → 북미륵암 → 오심재 → 노승봉 → 가련봉 → 두륜봉 → 진불암 →대흥사(원점회귀)
☞ 산행 시간(휴식 포함) : 4시간~4시간 30분
남도 여행을 위해 고교 동창생 넷이서 다시 뭉쳤다. 2020년 4월 전남 영암·해남·진도의 산을 오르고 유적지를 찾았던 2박 3일간의 남도 여행에 이어 1년 만이다. 이번 산행지는 전남 해남의 두륜산과 장흥의 천관산 그리고 완도의 보길도다. 동행 친구들은 순호 영석 영일 정형 이렇게 넷이고 일자는 2021년 5월 27일이다. 두륜산은 1년 전 촉박한 일정 때문에 대흥사만 둘러보았던 아쉬움을 해소하기 위한 재도전이다.

■두륜산은
▲이런 山
전남 해남의 두륜산과 대흥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한몸이다. 두륜산의 8개 봉이 사방에서 대흥사를 포근히 감싸고 있는 모양새다. 전남의 도립공원이자 대한민국 명승 제66호로 함께 지정된 것도 그래서 당연하다. 대흥사 주변의 자연풍광은 두륜산 덕분에 전국 어느 사찰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다.
대흥사에서 바라보는 두륜산은 두 얼굴을 하고 있다. 왼쪽에서 고계봉으로 순하게 올라가는 능선이 소잔등처럼 부드럽게 오심재까지 흘러내려가 두루뭉술하게 보이는 모습이 한 얼굴이라면, 오심재에서 오른쪽으로 노승봉~가련봉~두륜봉으로 이어진 대형 암릉과 기암절벽은 또 다른 얼굴이다.
두륜산도립공원 측은 대흥사에서 두륜산 능선을 바라보면 누워 있는 비로자나불의 형상과 비슷하다고 소개한다. 비로자나불은 진리를 상징하는 법신불로, 손 모양이 주먹 쥔 왼손의 검지를 오른손으로 쥔 모습이다. 이를 두륜산에 대입하면 가장 오른쪽의 두륜봉이 부처의 머리이고, 가련봉은 오른손, 노승봉은 검지를 든 왼손이라는 것이다. 왼쪽으로 멀리 떨어진 왼쪽의 고계봉은 발이다.

두륜산은 산림청, 블랙야크, 월간산이 지정한 100대 명산이다. 소백산맥의 최남단에 위치해 있고 남해를 굽어보며 우뚝 솟아 있다. 두륜산의 8개봉은 주봉인 가련봉(703m)을 비롯, 노승봉(685m), 두륜봉(630m), 고계봉(638m), 도솔봉(672m), 혈망봉(379m), 향로봉(469m), 연화봉(613m)이다. 이 가운데 등산객들이 주로 찾는 봉우리는 노승봉, 가련봉, 두륜봉이다.
▲산행 출발지는 두 곳
두륜산 산행 출발지는 두 곳이다. 하나는 대흥사 경내에서 바로 시작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대흥사에서 멀리 떨어진 매표소에서 시작해 경내를 거치는 산행길이다. 어느 길이든 대흥사 경내를 지나야 하고 그래서 문화재 관람료를 피할 수 없다. 매표소에서 출발할 경우, 대흥사까지 이어진 2㎞ 거리의 장춘숲길을 거쳐야 한다. 따라서 대흥사 경내에서 출발하는 것보다는 거리가 멀고 시간도 1시간 길어진다. 그럼에도 장춘숲길이 워낙에 명품길이어서 일부러라도 장춘숲길을 거쳐가는 것이 좋다.
대흥사는 해남군 구림리(九林里) 장춘동(長春洞)에 있다. 아홉 굽이 숲길이라서 구림리이고 봄이 오래 머문다고 해서 장춘동이다. 땅끝천년숲옛길로도 이어져 달마산의 미황사와 연결된다. 그곳까지 거리는 20㎞이고 소요 시간은 9시간 정도다.
매표소를 지나면 바로 일주문이다. ‘두륜산 대둔산’으로 쓰여있는 것은 일제 강점기 전까지는 대둔산으로 불렸기 때문이다. 가운데 차로를 중심으로 양쪽의 산책로로 나뉜다. 왼쪽이 동백길, 오른쪽이 물소리길이다. 이름그대로 동백길은 동백나무숲길이고 물소리길은 두륜산에서 흘러내리는 시원한 계곡을 따라 걷는 길이다. 차로도 아스팔트만 깔려 있을 뿐 사실상 터널을 이루고 있는 숲길이다. 봄이면 연초록의 향연이 펼쳐지고 가을이면 노랗고 빨간 단풍으로 물든다.
그 유명한 유선여관을 지나 ‘두륜산 대흥사’로 쓰여 있는 두 번째 일주문을 지나면 곧바로 대둔사 부도전이다. 서산대사와 초의선사 부도 등 모두 56기의 부도와 탑비가 있다. 서산대사 부도가 왜 이곳에 있을까 궁금했으나 하산 후 살펴보기로 하고 갈길을 재촉한다.

■우리 산행은
당초 계획은 매표소 앞에 주차하고 장춘숲길을 걷는 것이었으나 운전대를 잡은 영석이 대흥사 경내까지 들어간다. 1년 전 장춘숲길을 걷고 대흥사도 충분히 감상했으니 이번에는 대흥사 경내에 주차 후 출발하자는 것이다.
이제 본격적인 산행의 시작이다. 산행 코스는 대흥사 내 표충사 앞길로 올라가 표충사 뒤로 하산하는 부챗살 원점회귀다. 가장 일반적인 산행 코스다. 두륜산 지도상 거리는 표충사 →(1.4㎞)← 북미륵암 →(0.6㎞)← 오심재 →(0.8㎞)← 노승봉 →(0.2㎞)← 가련봉 →(0.5㎞)← 만일재 →(0.3㎞)← 두륜봉 →(0.8㎞)← 진불암 →(1.25㎞)← 표충사다. 거리를 합산하면 5.85㎞다. 산행 시간은 쉬엄쉬엄 올라가 4시간 30분 걸렸다. 부지런히 오르면 1시간 정도는 단축하겠지만 우리는 여유롭게 올라가는 것을 좋아하므로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들머리는 표충사
표충사는 두륜산 산행의 들머리와 날머리의 기준점이다. 표충사는 사찰일 것 같지만 사실은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인 사명대사 그리고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운 처영대사를 배향하는 사당이다. 사찰 경내에 유교형식의 사당을 겸한 예는 우리나라에서 보기드문 독특한 경우다. 서산대사의 위국충정을 기리고 그의 선풍이 대흥사에 뿌리 내리게 한 은덕을 추모하여 제자들이 1669년에 건립했다. 표충사 옆에는 초의선사 동상도 있다. 초의선사에 대해서도 이 글 아래에서 따로 소개한다.

표충사를 지나면 바로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은 우리가 오를 북미륵암이고, 오른쪽은 일지암 방향 길이다. 표충사에서 북미륵암까지는 1㎞, 일지암까지는 0.8㎞다. 일지암 방향으로 오르면 일지암을 거쳐 만일암터와 천년수에 이어 만일재로 연결된다. 이 세 곳도 이 글 아래에서 따로 소개한다.
북미륵암 길은 전국 어디서나 만나는 흔한 길이다. 고도만 조금씩 높이면 된다. 막판에 약간의 경사가 있으나 돌로 계단을 만들어 힘들지 않다. 40분 정도 걸린 북미륵암 바로 아래에 갈림길이 있다. 한 길은 천년수와 만일재로 가는 길이고 다른 한 길은 오른쪽 진불암으로 연결된다. 이곳에서 작년 가을 허벅지에 큰 부상을 당해 무리하면 안되는 영일과 헤어졌다. 영일은 진불암 방향으로 가다가 일지암으로 하산하겠다고 했으나 심심했던지 천년수와 만일재를 거쳐 두륜봉으로 직행했다.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을 못보다니…
북미륵암은 대흥사의 부속 암자다. 외관이 전통적 사찰 형태가 아니라 현대식 살림집 구조다. 북미륵암은 1754년(영조 30년)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창건 연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북미륵암이 유명한 것은 거대 자연 암벽에 새겨진 마애여래좌상이 북미륵암의 부속 전각인 용화전에 안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화재 전문가들은 이 좌상이 고려시대 초기(11세기)나 신라 말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한다.

산행을 떠나기 전 마애여래좌상이 북미륵암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직접 눈으로 확인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마애여래좌상을 보지 못했다. 마애여래좌상이 안치된 용화전 문이 닫혔기 때문이다. 영일이가 문을 열어보려 했으나 삐걱소리만 요란할 뿐 열리지 않는다. 결국 대흥사 측에서 일반 공개를 막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포기했다. 뿔이 나 산행을 다녀와 대흥사에 전화를 걸어 연유를 알아보니 나의 오해란다. 평소 새나 짐승이 들어갈까봐 문을 닫아놓고 있을 뿐 잠근 것은 아니란다. 낮에만 문을 여는데 혹 닫혀있어 열리지 않으면 북미륵암 측에 요청하면 도움을 준다고 한다. 그것도 모르고 혼자 뿔이 났으니 경솔했다.
용화전 옆에 보물 제301호인 북미륵암 삼층석탑도 있으나 용화전 건물에 눌려 옹색해보인다. 북미륵암에서 오심재로 올라가는 길 오른쪽에 ‘길없음’ 표시가 있다. 궁금해 50m를 올라가니 자연석을 기단삼아 세운 동삼층석탑이 낙락장송과 함께 대흥사를 내려다보고 있다.
▲오심재~노승봉
북미륵암에서 오심재까지는 흙길, 숲길에 오솔길이다. 급경사도 없어 전반적으로 편안하다. 그렇게 20분 정도 연초록 숲길을 걸어 올라가니 너른 풀밭의 오심재다. 이곳은 과거 주민들이 동쪽 오소재 약수터에서 서쪽 대흥사로 넘어가기 위해 이용해오던 고개다. 오심재에서 바라보면 동쪽으로 주작산과 강진만, 북쪽으로 고계봉(638m), 남쪽으로 노승봉(685m)의 웅장한 모습이 보인다.
오심재 안내판을 보니 오심재(悟心峙)로 쓰여 있다. 그런데 ‘峙’는 재가 아니라 언덕 치다. 순수 한글 ‘재’를 한자 ‘峙’로 치환한 것 같다. 오심재에서 우뚝한 고계봉을 바라보니 3년 전 아내와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고계봉에서 노승봉과 가련봉을 바라보았던 때가 생각난다. 예전엔 오심재에서 고계봉으로 곧장 오르는 산길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비법정탐방로로 막혀있다.

오심재에서 노승봉을 향해 10분 정도 오르니 흔들바위다. 높이 5m, 둘레 13m의 크기다. 흔들바위는 ‘대둔사지’(1823년)와 ‘죽미기’(1638년)에도 등장하는 역사가 오래된 바위다. ‘대둔사지’는 과거 대둔사 시절의 역사와 사적을 기록한 책이고 ‘죽미기’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대둔사(지금은 대흥사)가 불타버리자 절에서 떠도는 구문을 바탕으로 정리한 대흥사의 첫 사지(寺誌)다. ‘죽미기’에 움직이는 바위 즉 동석대로 기록되어 있다.
흔들바위는 2017년에 세워놓은 큰 받침대 위에 올려져 있어 마치 받침대에 올려진 수석처럼 보인다. 흔들바위는 사실 흔들리진 않는다. 마치 대흥사를 향해 굴러내려 갈듯한 모습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흔들바위에서 대흥사 쪽을 바라보니 장대한 초록 숲이다. 노승봉 바로 아래로 다가가니 부드럽던 육산이 거친 암봉으로 바뀐다. 다행히 정상까지 데크계단이 있어 험하지는 않다. 오심재에서 바라볼 때 노승봉 정상이 무척 높아보였으나 막상 올라가니 힘들지도 험하지도 않다.

▲노승봉~가련봉~만일재
순호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노승봉(685m) 정상에 오르니 영석이 기다린다. 영석은 늘 먼저 치고 올라가 우리를 맞는다. 피 끓는 환갑 청년이다. 곧 가련봉과 두륜봉에도 오를테지만 노승봉은 두륜산행에서 처음 오른 정상이니만큼 감흥이 다르다. 대흥사에서 올려다본 거친 모습과는 달리 정상은 넓은 마당바위다.

노승봉에서 가련봉은 지척이다. 한 번 쭉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야 하는 수고는 어쩔 수 없으나 이곳에도 데크계단이 잘 깔린 덕에 그다지 힘들지는 않다. 노승봉에서 바라보는 가련봉의 봉우리가 4개여서 마치 작은 바위 병풍을 두른 듯하다. 4개 봉우리 중 어느 봉우리가 가련봉인지 헷갈린다. 관련 사진을 여러 장 살펴본 결과 왼쪽에서 두 번째 봉우리가 가련봉인 것을 알 수 있다. 가련봉 오른쪽(남쪽)으로 두륜봉이 보이고, 두륜봉 왼쪽으로 투구봉(주봉)으로 연결된 능선이 길게 이어져있다. 동쪽으로는 해남군 북일면의 너른 벌판이 펼쳐지고 그 너머에 강진만이 있다.
노승봉을 떠나 10여분만에 두륜산의 최고봉 가련봉(703m)에 올라선다. 부처 이름 가(迦)에 연꽃 련(蓮)자를 합쳤다.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부처와 연꽃을 나타내는 봉우리’란 뜻이다. 불가에서는 연꽃을 부처의 손바닥에 비유한다. 가련봉에서 노승봉 쪽을 바라보니 방금 전 내려왔던 갈색 계열의 데크계단 길이 아래로 길게 이어져있다. 회색의 바위 색과 대비되어 뚜렷하다. 운무가 대흥사에서 올라와 오심재와 노승봉을 넘어가는 것이 보인다.

가련봉에서 두륜봉으로 가려면 중간의 만일재로 내려갔다가 올라가야 한다. 하산길 역시 데크계단의 연속이어서 어렵지도 힘들지도 않다. 데크계단을 설치하기 전 바위마다 박아놓은 흰색의 쇠발굽과 쇠고리가 과거에는 쉽지 않은 길이었음을 알려준다. 가련봉에서 만일재로 내려가는데 북미륵암에서 헤어졌던 영일이 홀로 두륜봉에 올라 우리를 향해 손짓하는 모습이 개미 크기로 보인다. 영일의 오늘 산행은 작년의 부상 후 가장 강도 높은 산행이다. 그만큼 건강도 좋아질 것이다. 만일재로 내려갈 때 커다란 바위 위에 새 모양의 바위가 앉아있다. 영락없는 비둘기 모양이다.
가련봉에서 20분 정도 내려가니 너른 풀밭의 만일재다. 바로 위가 두륜봉이다. 만일재에서 뒤돌아 바라보는 가련봉 능선이 장관이다. 중년 남성이 근육질을 자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두륜산 홍보물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진도 만일재에서 바라본 가련봉 모습이다. 만일재는 전라도 지역에서 무등산, 천관산, 월출산과 함께 손꼽히는 억새 명소다. 만일재에는 대흥사 방향으로 길이 나 있다. 0.2㎞를 내려가면 만일암터와 천년수가 있다. 아래에서 따로 소개한다.

▲두륜봉과 구름다리
두륜봉(630m)은 만일재 바로 위에 있다. 20분 정도면 정상에 올라선다. 정상 아래에서 두륜산의 명물 구름다리가 우리를 맞는다. 양쪽의 거대한 두 바위 사이에 놓여있는 길다란 자연석 가운데가 뻥 뚫려 구름다리 모양을 하고 있다. 흰 구름이 바위 틈사이로 넘나든다 하여 ‘대둔사지’에는 백운대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잠깐. 구름다리라고 하니까 요즘 전국적으로 유행하는 인공적 구름다리나 출렁다리로 생각하기 십상이다. 돌구름다리, 돌문, 통천문이 좋겠다.
두륜봉 정상에 서면 장흥의 천관산 능선이 보이고 발아래로는 다도해 일대의 경관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는데 오늘은 운무가 끼어 보이지 않는다. 다음에 또 오라는 뜻일게다. 두륜봉에서 하산하는데 이번에는 거북바위가 등에 잔뜩 짐을 진 모습을 하고 있다. 이처럼 두륜산에는 바위가 빚어낸 온갖 형상의 바위들이 많다.

▲하산
두륜봉 하산길에서 내려다보이는 대흥사 주변의 숲이 장관이다. 깊고 장대하다. 초록의 바다처럼 보여 몸을 던지면 푹신푹신할 것 같다. 하산길은 한동안 급경사 너덜길이 이어지다가 곧 숲이 우거진 호젓한 내리막길이다. 온통 하늘을 가려 과장하면 밀림 같은 곳도 있다. 그렇게 40분을 내려가니 아스팔트길이다. 오른쪽은 진불암과 북미륵암 방향이고 왼쪽은 표충사 하산길이다. 100m 앞에 있는 진불암은 북미륵암처럼 전통적 암자 형태가 아니라 살림집 모습이다.
진불암에서 북미륵암 방향으로 진행하면 사거리가 나온다. 오른쪽이 천년수, 만일재 방향이고 왼쪽이 일지암 하산길이다. 직진하면 북미륵암이다. 우리는 당초 계획대로 표충사 하산길을 택했다. 진불암에서 나와 다시 아스팔트길로 걸어 내려가면 0.4㎞ 지난 곳에서 물텅거리골을 만난다. 편안한 숲길이다. 쭉 내려가면 표충사 뒤로 이어진다. 진불암에서 표충사까지는 30분 거리다.
진불암~표충사길은 평범한 산길이므로 진불암에서 표충사로 내려가지 않고 일지암으로 내려가 일지암을 둘러보는 것도 방법이다. 진불암에서 0.6㎞ 거리의 만일암터와 천년수를 살펴보고 내려와 일지암으로 하산하는 것은 더 좋은 방법이다. 일지암에는 수십년 전 복원한 본당과 초가집이 있다. 초가집은 가운데에 방 한 칸을 두고 사면에 툇마루를 두른 4평 규모의 띠집이다. 본당은 윗연못에 평석을 쌓아올린 4개의 돌기둥이 누마루를 받치게 하여 독특한 운치를 자아내게 한다.
■산행 외 ‘알쓸신잡’
▲마애여래좌상
마애여래좌상이 도하 각 신문에 소개된 것은 2004년이었다. 낡은 용화전을 수리하다가 오랫동안 가려져 보이지 않던 나머지 모습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동안 마애여래좌상은 높이 4.2m의 본존물 모습만 드러나고 나머지 부분은 용화전의 기둥과 천장 뒤에 숨바꼭질하듯 가려 있었다. 그래도 한국 마애불상 중 뛰어난 불상으로 인정받아 1963년 보물 제48호로 지정되었다.
2004년 낡은 용화전을 수리할 때만 해도 아무도 마애여래좌상의 실제 크기를 짐작하지 못했다. 그런데 용화전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기둥과 천장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부분이 드러났다. 실측해보니 본존불의 높이는 4.85m였고 전체높이는 8m, 너비는 12m였다. 그동안 볼 수 없었던 4구의 비천상과 불꽃이 활활 타오르면서 하늘로 치솟는 모습의 광배(후광)가 드러나자 전문가들은 단단한 화강석을 무른 비누처럼 깎아낸 듯한 솜씨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바위에 새겨놓은 선 하나하나도 뚜렷하고 입체적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용화전은 북미륵암과 함께 1754년에 중수되었다. 1929년에도 보수 작업을 했는데 이때 본존불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용화전의 천장과 기둥에 가려진 것으로 추정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말이다.
이게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산행을 다녀와 과거 신문을 검색했다. 1963년 1월 31일자 경향신문 ‘호남 고적답사기’에 “마애좌불의 광배 좌우로 있는 비천상 넷은 퍽 흥미있는 것이었다”는 문장이 보인다. 2004년 용화전 해체 때 보였다는 비천상을 1963년 보았다는 것이다. 1971년 7월 31일자 동아일보 기사 ‘여름 비경을 가다’에는 마애여래좌상이 북미륵암 용화전 안에 안치된 것으로 나온다. 1920년 창간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과거 기사에서 ‘대흥사 용화전’을 검색해도 동아일보의 1971년 기사가 최초다. 이로 미루어 1963년부터 1971년 사이 마애여래좌상을 보호하기 위해 용화전을 세운게 아닌가 하는 개인적인 추측을 해본다. 어쨌든, 2004년 용화전을 해체·보수하는 과정에서 가려져 있던 전모가 드러나자 문화재청이 2005년 보물 제48호에서 국보 제308호로 승격했다.

▲만일암터와 천년수
만일암터와 천년수는 표충사에서 일지암을 거쳐 만일재로 오를 때와, 북미륵암에서 만일재로 오를 때 만나게 된다. 지금은 덩그러니 빈터와 우물만 남아있지만 한때는 두륜산 불법의 중심이었다. 산 아래 큰 절인 대흥사의 시작도 만일암이었다. 대흥사의 부속 암자를 가르는 기준이기도 했다. 만일암의 북쪽에 있어 북미륵암, 남쪽에 있어 남암(남미륵암)이다.
만일암은 1940년 간행된 ‘조선의 차와 선’이라는 책에 사진이 실린 것으로 미루어 일제강점기 무렵까지도 유지된 것을 알 수 있다. 정약용은 ‘만일암지’와 ‘만일암중수기’를 통해 만일암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겼다. 만일암터에는 지금도 5층석탑이 날렵하게 솟아있다. 기록에 따르면 본래는 7층이었다.
석탑 아래쪽에는 거대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높이 22m, 흉고(1.2m 높이에서 잰 나무둘레) 9.6m에 이르는 이 느티나무는 천 년을 살았다고 해 ‘천년수’다. 천년수는 전라남도가 공식 지정한 ‘천년나무’이기도 하다.
전라남도는 2018년 ‘전라도’라는 지명이 처음 역사에 등장한 지 1000년이 되는 해를 기념해 ‘전라도 천년나무’를 지정했다. 전남도 전역의 보호수와 천연기념물 4100여 그루의 나무 중 전문가 의견을 물어 세 그루의 후보 나무를 선정했다. 강진의 푸조나무, 진도의 비자나무, 그리고 해남 두륜산의 천년수다. 이들 후보를 대상으로 도민 대상 설문조사를 벌인 끝에 천년수가 전라도 천년나무로 선정됐다.

▲일지암과 초의선사
일지암이 유명해진 것은 조선 후기 다성(茶聖)으로 추앙 받는 초의선사(1786~1866) 덕분이다. 초의선사는 대흥사에서 정진하다가 39세 때 대흥사 동쪽계곡으로 들어가 일지암을 짓고 40여 년간 은거하며 ‘다선일여(茶禪一如)’ 사상을 확립하고 52세 때 차생활의 멋과 우리 차의 우수성을 기리는 불후의 명저 ‘동다송(東茶頌)’을 집필했다. 이후 동다송은 ‘한국의 다경(茶經)’으로 불렸다. 다선일여 사상이란 차 한 잔 속에 부처님의 진리와 명상에서 얻는 기쁨이 모두 녹아들어 있다는 것이다. 덕분에 일지암은 지금까지 한국 차문화 성지로 주목을 받고 있다.

초의는 쇠퇴해 가는 차문화의 중흥을 도모하면서도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소치 허련 등 당대 최고의 석학, 예술인들과 찻잔을 기울였다. 23살이던 1809년, 자신보다 24살 위의 정약용(1762~1836년)을 처음 만난 것을 계기로 정약용에게서 유학과 시문을 배우며 평생의 스승으로 모셨다. 당시 정약용은 이웃한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24살의 나이 차가 있었으나 사제의 정이 들어 7㎞ 떨어진 강진의 다산초당과 해남의 대흥사를 왕래했다.
일지암에서 초의선사와 정약용이 맺은 인연은 정약용이 강진의 유배생활을 끝내고 고향인 남양주 두물머리로 귀향했을 때에도 계속 이어졌다. 스승이 두물머리로 돌아가니 초의도 스승을 따라 이곳 남양주까지 왔다. 그러나 머리를 깎은 승려가 속가 마을에 머물 수는 없어 운길산 수종사에서 머물렀다. 수종사에서 정약용이 살던 집까지는 20리(약 8㎞) 거리였다. 수종사에서 내려다보면 정약용이 살았던 동네인 두물머리가 바라다 보인다.
초의가 교유했던 수많은 문인과 예술가 중 가장 가깝게 지낸 인물은 동갑내기 추사 김정희(1786~1856)다. 초의는 30살 되던 해 처음으로 한양에 올라가 김정희를 만났다. 김정희가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제주도로 유배갔을 때는 김정희가 좋아했던 차와 서신을 보내 위로했다. 세 차례나 제주도로 직접 건너가 차와 학문을 논하며 우정을 쌓았다. 대흥사에 추사가 쓴 편액이 여럿 있는 것도 추사와 초의선사와의 인연 덕분이다. 초의가 50세였을 때 진도에 살고 있는 소치 허유가 초의를 찾아와 그림을 배웠다.

▲서산대사 부도
두륜산에 올라갈 때 스쳐 지나갔던 부도전(부도밭)에 대해 알아본다. 부도전이란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한 부도가 모여 있는 곳이다. 따라서 이곳 부도전은 1000년 넘게 대흥사를 지탱해온 고승들의 흔적이다. 부도전에서 눈여겨봐야 할 부도는 2개다. 임진왜란 때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왜적에 맞서 공을 세운 승병장 서산대사의 부도와 초의선사의 부도다.
대흥사 성보박물관에는 서산대사의 의발(衣鉢), 즉 가사(옷)와 발우(공양 그릇)도 있다. 그렇다면 북한 땅인 묘향산 원적암에서 세상을 떠난 서산대사의 의발과 부도가 왜 이곳에 있는 것일까. 서산대사는 1604년(선조 37년) 1월,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을 앞두고 제자인 사명당 유정과 뇌묵당 처영에게 자신의 가사와 발우를 해남 두륜산에 두라고 부탁했다. 제자들이 이유를 묻자 “전쟁을 비롯한 삼재(三災)가 미치지 못할 곳으로 만년 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이후 서산대사의 의발이 대흥사로 옮겨지고 법맥이 대흥사로 이어졌다.
서산대사의 부도는 크지 않지만, 형태가 날렵하고 문양이 선명하다. 부도밭의 여러 부도 중에서 중앙 뒤쪽에 가장 화려하게 치장된 것이 서산대사의 부도이므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서산대사의 의발은 그가 예견했던 바와 같이 아무 탈 없이 그대로 남아 표충사에 전한다. 초의선사의 부도는 서산대사 부도 바로 앞쪽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