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땅 구석구석

경남 의령의 ‘宜寧’은 ‘마땅히 편안한 땅’이라는 뜻… 유명 관광지나 산행지는 적어도 산세 부드럽고 햇빛 따사로운 곳

↑ 하늘에서 내려다본 정암루, 정암철교, 솥바위(출처 의령문화원)

 

by 김지지

 

■의령은 이런 곳

 

▲친구의 구순 노모를 찾아뵙기 위해 떠난 의령 여행

2020년 9월 어느날이었다. 고교 동창끼리 가진 저녁자리에서 서로 어머니의 안부를 주고받다가 경남 의령에 홀로 계시는 기림의 구순 노모를 찾아뵙기로 했다.  당초 정했던 의령 방문 날자가 한차례 연기된 끝에 최종적으로 정해진 일자는 2020년 10월 30일과 31일 이틀이었다. 일행은 기림 남수 순호 영석 정형 5명. 이왕 가는 김에 서울에서 일찍 출발해 당일 가야산에 오르고 다음날 경남 의령 땅을 두루 돌아다니는 일정이다. 의령은 다들 처음이었다. 전국적으로 알려진 관광지나 등산지가 없으니 일부러 찾아갈 일이 없어서다.

기림이는 의령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로 올라와 지금까지 줄곧 서울에 살고 있다. 태를 묻은 곳은 의령군 부림면 신반리다. 기림의 형제도 모두 고향을 떠났으나 모친만이 홀로 의령 집을 지키고 계신다.

가야산 칠불봉에 오른 친구들

 

▲친구의 고향은 부림변 신반리

우리는 10월 30일 서울을 떠나 가야산에 오른 후 해인사 부근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 아침 숙소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기림의 고향 신반리로 향했다. 신반리 한자는 ‘新反’이다. 기림에 따르면 원래는 신번이었는데 언제부턴가 신반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새롭게 번창하고 부흥한다’는 뜻의 ‘신번(新繁)’이 어쩌다 ‘새로운 것을 반대한다’는 뜻의 ‘신반(新反)’으로 바뀌었을까. 의령을 다녀와 알아보니 일제 때 항일사상 유배지역으로 낙인찍어 신반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의령의 향토사학자들은 ‘신번’으로 다시 이름이 바뀌길 바라지만 이미 고착화된 행정명을 바꾸려면 전국적으로 손을 대야하므로 진척이 없다. 다만 10여 년전 새로 정한 길이름에는 ‘신번로’가 살아있다. 2020년 12월 현재 부림면의 인구는 2850명이고 신반리 인구는 1530명이다.

신반리에는 서울 직행 시외버스 터미널도 있다. 시외버스 이용자가 줄어들면 노선이 사라질지 몰라 신반리 주민들은 일부러 시외버스를 타기도 한다. 전국의 시외버스 터미널 주변에는 다방이 많다. 신반리도 마찬가지다. 기림이 말로는 전성기 때는 다방이 15개나 성업했다고 하는데 지금도 고개를 돌려보면 사방이 다방이다. 우리도 아침을 해결한 후 모처럼 다방에 둘러 앉아 달걀이 들어간 쌍화탕을 시켜먹었다. 10가지 곡물이 들어가서인지 마시는 게 아니라 씹는 쌍화탕이다. 우리의 의령 탐방이 시작된 것은 서울 일정 때문에 순호가 먼저 서울로 떠난 후였다. 기림이가 가이드로 나섰으니 이제 의령은 우리의 손바닥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부림면 신반리 전경(출처 부림면)

 

▲경남 의령의 뜻은 ‘마땅히 편안한 땅’

의령의 한자는 ‘마땅히 편안한 땅’이라는 ‘宜寧’이다. 마땅히 편안하다니… 전국에 이보다 멋진 지명이 또 있을까 싶다. 과거 의령은 외지인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깊고 외진 곳이었다. 남쪽으로 남강이, 동쪽으로 낙동강이, 북쪽으로 자굴산이 가로막고 있어 드나듦이 쉽지 않았다. 의령이 얼마나 외진 곳인지를 알려주는 사례가 있다. 고려 때 벼슬아치들이 숙소로 삼거나 말을 빌리는 역(驛)을 전국의 주요 도로 30리마다 525개를 두었는데 의령에는 한 곳뿐이었다. 지금도 의령 부근을 거쳐가는 고속도로나 기찻길이 없다. 전국적으로 알려진 관광지나 등산지가 없으니 외지인들이 일부러 찾아갈 일도 없다.

이번에 의령을 둘러보니 산이 죄다 순하고 부드럽다. 기암절벽이 없어 능선은 곡선이다. 산자락의 야트막한 양지바른 곳에는 잘 꾸며놓은 묘지들이 자리잡고 있다. 산과 산 사이로 하천이 흐르고 그 옆에는 제법 길고 넓직한 평지가 펼쳐있다. 그곳에 마을과 논밭이 자리잡고 있다. 가을이어서 그렇겠지만 햇살이 따사롭다. 기림이 말로는 겨울에도 칼바람이나 한파 추위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본인도 추운 겨울 고향에만 오면 그렇게 몸과 마음이 편안하다고 한다. 가을 어느날 하룻동안 의령을 둘러본 나로서도 공감하는 대목이다.

의령은 지리적으로는 경남 한가운데에 있다. 동북쪽으로는 창녕군, 서쪽으로는 산청군, 북쪽으로는 합천군, 남쪽으로는 진주시·함안군에 둘러싸여 있다. 남강은 의령·함안군 사람들의 삶을 일궈온 터전이었다. 한때 인구가 10만 가까이나 되었던 ‘호시절’을 누린 적도 있으나 산업화와 고령화, 저출산 등으로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어 현재 군민은 3만명에 불과하다. 경남의 18개 시·군 가운데 인구가 가장 적다.

경상남도 지도(왼쪽)와 의령군 지도

 

▲의령 한지

의령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한지와 관련된 설화가 전해지는 곳이다.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영남읍지, 경상남도지리지에도 기록이 있을 만큼 한지생산지로 역사가 깊다. 조선시대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을 보면 1000년 전 고려시대 봉수면 소재 국사봉 중턱에 대동사라는 큰 절이 있었는데 그곳 주지 스님이 야생 닥나무 껍질을 가공해 얻은 섬유질로 한지를 만든 게 의령 한지의 시초다.

한지 한 장을 만들려면 닥나무를 삶아 일일이 껍질을 벗겨 티를 고르고, 종이의 틀을 갖추는 이른바 ‘뜨는’ 작업을 한다. 무려 99번의 손을 거친 후 100여 번째에 비로소 한지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해서 ‘백지(百紙)’라고도 불린다. 한지가 발달하려면 좋은 물과 질좋은 닥나무가 기본이다.

의령에서도 특히 한지가 발달한 곳은 신반천이다. 신반천은 경남 합천군 대양면의 무월봉(612m)에서 발원해 의령군의 봉수면과 부림면을 지나 낙서면 아근리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들어 간다. 그래서 예로부터 봉수면과 부림면에 한지 공장이 많았다. 질좋은 닥나무가 많은데다 물이 깨끗하고 겨울에도 얼지 않기 때문이다.

닥나무는 줄기를 꺾으면 “딱”하는 소리가 나서 붙여진 이름이다. 주로 산기슭 볕 잘 드는 곳에서 자라는데, 이곳 신반 지역은 한반도 땅에서 생육 조건이 가장 알맞다고 알려져 있다. 봉수면과 부림면 지역에서는 한때 200여 가구가 한지 생산을 했다. 하지만 한지의 경쟁력 약화 등으로 한지 생산에 몸담았던 사람들이 도시로 떠나고 지금은 몇 안되는 사람이 남아 전통한지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로마 가톨릭 유물 복원에 의령 한지 사용돼

의령 한지의 명맥을 이어가는 이가 있으니 봉수면의 신현세 장인이다. 그의 공방에서 만든 한지는 2016년 가톨릭 성인인 성 프란치스코(1182~1226년)의 친필 기도문을 담은 ‘카르툴라’ 손상 부위를 완벽하게 보강해 원형을 되살릴 때 활용되었다. 한지가 서양유물을 복원한 첫 사례다.

2017년 교황 요한 23세의 대형 지구본을 복원할 때도 신현세 공방의 전통한지가 사용되었다. 둘레 4m짜리 이 지구본은 교황 요한 23세(재위 1958∼1963년)의 주문으로 제작된 것인데, 교황 23세의 순례지를 포함해 당시 세계 가톨릭 교구가 표기되어 있어 가톨릭사에서는 중요한 가치가 있다. 2019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18쪽짜리 자필 노트를 복원할 때도 신현세 공방의 의령 한지가 사용되었다.

교황 지구본. 복원 전(왼쪽)과 의령 한지로 복원한 후 모습(출처 교황 요한 23세 재단)

 

그러고 보니 기림이 집안도 한지와 관련이 깊다. 부친이 한지를 생산하는 공장을 설립·운영하시고 부친의 작고 후에는 어머니와 장남이 뒤를 이어받아 명맥을 유지했다. 기림이는 한지 생산에 직접 뛰어들지는 않았지만 주로 종이와 관련된 사업을 지금까지 하고 있으니 고향의 기를 그대로 물려받은 셈이다. 신현세 장인도 기림이 어렸을 때 기림이 부친의 한지 공장에서 일을 했다고 기림이 귀띔을 한다.

 

▲의령 우순경 사건

의령을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하고 지금도 의령하면 떠올리게 하는 사건이 있으니 ‘의령 우순경 사건’이다. 사건은 1982년 4월 26일 100가구가 채 살지 않는 의령의 작은 산골 마을에서 발생했다. 당시 그 마을의 치안을 담당했던 우범곤 순경은 동거녀와 다툼을 벌이다 화를 참지 못하고 자신이 근무하던 경찰서 무기고에서 카빈소총 두 자루와 실탄 180발, 수류탄 7개를 훔쳐 광기 어린 난동을 부렸다. 외부와 통신을 두절시키기 위해 먼저 우체국 집배원과 전화교환원을 살해한 뒤 윗마을에서 총을 난사하며 아랫마을까지 4개 마을의 주민 56명을 사살하고 35명에게 총상을 입힌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사건을 기록한 몇몇 신문을 보면 우 순경은 1981년 4월부터 서울의 청와대에서 근무하다 주벽이 심하고 성격이 난폭해 8개월 만에 연고지가 아닌 의령경찰서 궁류지서로 전출되었다. 이 사건으로 우범곤은 최단시간, 최다살상으로 2011년 노르웨이에서 기록이 경신되기 전까지 기네스북에 올라 있었다.

 

■의령 9경

 

의령에는 9경이 있다. 제1경 충익사, 제2경 자굴산, 제3경 봉황대, 제4경 벽계관광지, 제5경 정암루, 제6경 탑바위, 제7경 수도사, 제8경 안희제 생가, 제9경 이병철 생가다. 이 가운데 이번에 다녀온 곳은 정암루, 봉황대, 탑바위, 수도사, 안희제 생가, 이병철 생가이니 9경 중 6경을 둘러본 것이다. 9경이 아닌 곳도 다녀왔는데 곽재우 생가, 솥바위, 일붕사 등이다.

 

▲곽재우 의병장 생가와 두 그루의 노거수(老巨樹)

곽재우 의병장은 삼성그룹의 창업주인 이병철, 독립운동가 안희제와 더불어 의령이 내세우는 3대 인물이다. 곽재우 의병장은 조선 명종 7년(1552) 의령현 세간리에서 태어났다. 경북 현풍 출신의 부친이 결혼과 함께 부인의 친정인 이곳으로 옮겨와 살면서 곽재우는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곽재우는 실천을 중시한 조선 시대 대표 선비인 조식의 제자이면서 외손사위였다.

선조 25년(1592) 4월 13일(양력 5월 23일) 일본군이 부산을 공격했다. 임진왜란의 시작이다. 곽재우는 “나라를 지키는 일을 관군에게만 맡길 수 없다”며 전쟁 발발 9일만인 4월 22일 이곳 세간마을에서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10여명으로 출발했으나 첫 전투인 기강전투(5월 4일)와 정암진전투(5월 24일~25일) 승리 후 군세가 급격하게 늘어나 1000여 명에 달했다.

곽재우 의병장은 백마를 타고 붉은 옷을 입고 선봉에서 전장을 누벼 ‘홍의(紅衣) 장군’으로 불렸다. 정유재란 때는 밀양 영산 창녕 현풍 등 네 고을의 군사를 이끌고 화왕산성을 지켜 적의 접근을 막기도 했다. 이후 29회에 걸쳐 관직이 제수되었으나 대부분 사직하거나 부임하지 않고 있다가 1617년 숨졌다.

곽재우 의병장 생가

 

느티나무·은행나무, 곽재우 장군의 모습을 생생하게 지켜본 산증인

곽재우 생가는 원래 자리에서 2분 거리에 있는 500년 수령의 느티나무(천연기념물 제493호) 뒤에 있었으나 터를 매입하지 못해 현재 생가로 2005년 이전 복원했다. 그러니 당연히 과거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생가는 조선 중기 사대부 사저를 참고해 복원했다고 하나 웬만한 관아보다 더 크게 지어 실제로 고택이 이랬을까 의심스러워 오히려 감흥이 떨어진다.

느티나무는 ‘북을 매단 나무’란 뜻의 현고수(懸鼓樹)로 불린다. 곽재우가 의병을 모으거나 훈련시킬 때 쓴 북을 매어 두었다고 한 데서 유래한다. 높이 20m·둘레 8.4m인 느티나무는 수백년 세월의 모진 풍상을 말해주듯, 둥치가 우람하면서도 수피가 벗겨지고 큰 혹들이 불거져 있다.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보호 말뚝에 의지하고 있다.

곽재우 생가 앞에도 수령이 600년이 된 노거수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302호) 한 그루가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다. 높이는 24.5m, 가슴 높이 둘레는 10.3m다. 은행나무는 우람하고 가을단풍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우리가 갔을 때도 샛노란 은행나무잎이 장관이었다. 곽재우의 생몰(1552~1617)과 비교하면 느티나무와 은행나무는 곽재우보다 더 오래 살았으니 곽재우 장군의 모습을 생생하게 지켜본 산증인인 셈이다. 의령엔 이 두 노거수 말고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고목이 두 그루 더 있다. 450년 된 백곡리 감나무와 300년 된 성황리 소나무다.

생가 주변은 넓은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그중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붉은 옷을 입고 백마를 탄 ‘홍의장군 곽재우’의 조형물이다. 그 옆에는 말 조형물을 설치해 누구나 탈 수 있게 만들었는데 직접 체험할 수 있게한 건 잘한 일이다.

천연기념물로 보호받고 있는 은행나무(왼쪽)와 느티나무(오른쪽 사진 출처 문화재청)

 

▲정암진 전투

곽재우의 전투 중 가장 눈부신 전과는 남강의 정암진 전투였다. 정암진(정암나루)은 남강을 경계로 마주하고 있는 의령과 함안을 오가던 나루터였다. 낙동강을 타고 거슬러 올라오다 창녕 남지에서 서쪽으로 난 남강을 타고 거슬러오면 정암진, 진주성으로 이어진다. 전투는 5월 24일(양력 7월 4일)과 25일 양일간 벌어졌다.

당시 전투 상황을 살펴보자. 일본의 주력군은 4월 15일 동래성을 점령한 뒤 속전속결로 북진에 나서 5월 2일(양력 6월 11일) 한양을 점령했다. 또 다른 부대는 부산에 집결해 있다가 전라도 지역으로 향했다. 그러러면 영호남 내륙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자 지리적 요충지인 남강 유역의 정암진을 지나야 한다.

일본군이 정암진에 도착한 것은 5월 24일(양력 7월 4일)이었다. 인근에는 갈대와 수풀로 덮여 있는 습지와 모래톱이 넓게 분포해 있고 하천의 양안에도 높은 둔덕과 절벽이 있었다. 일본군은 강을 건너기 전, 정찰대를 보내 말이나 무거운 장비를 안전하게 이동시킬 수 있는 길을 푯말로 미리 표시해 두었다. 곽재우의 의병은 밤에 일본군 정찰대가 표시해 두었던 푯말의 위치를 옮겨서 일본군을 공격하기 좋은 지점으로 유인했다. 그리고 5월 25일(양력 7월 5일) 새벽에 남강을 건너온 일본군을 기습했다. 푯말을 따라 이동하다가 강변의 습지에 발이 묶인 일본군은 화살을 쏘아대는 의병의 공격에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곽재우로서는 의병을 일으킨 후 두 번째 승리이자 첫 대승이었다.

 

▲정암루와 정암철교

정암진 부근에 의령 9경 중 제5경인 정암루(鼎岩樓)가 있다. 정암루에 서면 유유히 흐르는 남강과 강 건너편 너른 들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의령군과 함안군 사이 남강을 가로지르는 주황색의 정암철교도 내려다보인다.

정암루

 

정암철교는 의령군 의령읍 정암리와 함안군 군북면 월촌리를 잇는 다리로, 길이 259.6m, 높이 9.2m, 폭 6m이다. 1935년 철골트러스 형식으로 준공되었다가 6·25때 일부가 파괴되자 1958년 철교가 아닌 일반 다리로 재건했다. 다리는 1973년 남해고속도로가 완공되기 전까지는 부산·경남에서 전라도로 가는 주요 길목이었다. 1980년대 말 부근에 정암교가 새로 건설된 후에는 교량으로서의 임무는 정암교에 넘기고, 1t 이하 차량의 통행만 허용하다가 2007년 차량통행을 완전 금지시키고 보행자와 자전거만 통행하고 있다. 2014년 10월 국가등록문화재 제639호로 지정되었다. 철골 트러스에 주황색이어서 나름 멋이 있다.

정암철교

 

▲솥바위와 부자

정암루에서 남강 왼쪽을 바라보면 강 위에 한 바위가 홀로 솟아있다. 가마솥을 닮았다고 해서 이름이 솥바위다. 한자로는 솥 ‘정(鼎)’에 바위 ‘암(巖)’을 써서 정암이다. 솥바위가 유명해진 것은 생김새 때문이 아니라 부근에서 부자가 나온다는 과거의 속설 때문이다. 속설에 따르면 조선말 어느 도인이 ‘솥바위 반경 20리(약 8㎞) 이내에 부가 끊기지 않는다’고 얘기했다. 그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20세기에 재벌그룹 창업주 여럿이 솥바위 반경 20리 내에서 태어난 것이다. 창업주란 의령 정곡면에서 태어난 삼성의 이병철, 진주 지수면에서 태어난 금성(LG·GS 전신)의 구인회·허만정, 함안 군북면에서 태어난 효성의 조홍제다.

솥바위

 

또하나 흥미로운 것은 삼성(三星), 금성(金星), 효성(曉星) 등 기업 이름에 죄다 별(星)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지역 사람들은 강물 속에서 솥바위를 받쳐 주는 3개 다리를 연상한다. 그러고보니 이병철의 호인 호암(湖巖)도 물속의 바위라는 뜻이다. 오늘날에는 의령 용덕면 출생인 삼영그룹 이종환 회장까지 포함시켜 ‘솥바위 5대 부자’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종환 회장의 생가를 찾아갔으나 생가 느낌은 전혀 없이 그냥 커다란 현대식 한옥일 뿐이다. 생가라기보다 생가터가 맞다. 대문은 닫혀있고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틈조차 없다.

그런데 의령에서는 함안의 효성그룹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함안과 의령이 하나의 지역구인데 함안의 인구가 많아 주로 함안쪽 사람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다보니 저절로 경쟁심리가 발동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곳 지역구 출신 국회의원을 살펴보면 함안 출신 국회의원이 많고 의령은 적다.

 

▲이병철 생가

솥바위에서 부자 이야기를 들었으니 대한민국 최고 부자였던 이병철(1910~1987)의 생가를 아니 가 볼 수 없다. 생가는 솥바위에서 남강을 거슬러 8㎞쯤 떨어진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 있다. 이병철은 조부가 1851년 전통 한옥 양식으로 손수 지은 이 집(578평)에서 1910년 태어났다. 마침 이병철 전 회장의 아들 이건희 회장이 타계한지 얼마 안되어 생가를 찾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생가는 골목을 지나 산자락 끝에 있다. 다른 창업주의 생가와 달리 관람객들을 받아들이고 있으나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입구를 막아놓고 있다.

문을 개방했을 때, 생가를 찾는 관광객들이 먼저 찾는 곳은 안채 왼쪽의 암벽이다. 암벽 면의 갈라진 바위에선 만(卍)자, 전(田)자, 거북이 모양 등을 찾아볼 수 있는데, 부자를 만든 상서로운 상이라고 해 관광객들은 숨은그림찾기를 하듯 바위를 살핀다. 생가 바깥채에서 눈길을 끄는 것이 기둥마다 붙여진 6개의 주련(기둥이나 벽에 세로로 써 붙이는 문구)이다. 주련마다 내로라하는 옛 문인들의 글귀가 적혀 있다. 그중 두 개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다.

이병철 생가(출처 의령군청)

 

이병철이 28세 때이던 1938년 3월 대구에서 과일과 건어물을 취급하는 삼성상회를 설립한 것이 오늘날 삼성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기림이 말에 따르면 삼성그룹에 대한 마을 주민의 반응은 썩 호의적이지 않다. 삼성이 의령에 투자하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인데 사실 의령에 공장이 들어서기에는 입지 조건이 마땅치 않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대신 삼성그룹의 토대를 마련한 대구에는 의령 사람들이 많이 취업했다고 한다. 현재 생가 앞에는 분가 직후 살았던 집이 있는데, 외관상으로는 생가보다 더 으리으리해 보인다.

이병철이라는 단군 이래 최고 부자가 태어난 것에 착안해 의령에는 부잣길이 있다. 정곡면 공영주차장~이병철 생가~탑바위~호미교~예동마을~성황리 소나무~주차장을 걷는 6.3㎞, 12.8㎞ 두 코스가 있다. 각각 2시간 30분과 5시간이 걸린다.

 

▲탑바위

부잣길은 정곡면 죽전리 호미산 절벽에서 남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탑바위로 연결된다. 탑바위는 1946년 창건한 불양암과 함께 의령 9경 중 제6경이다. 큰 바위가 아랫부분을 받치고 그 위로 높이 8m 가량의 작은 바위가 탑처럼 쌓여 있는 듯한 형상이다. 원래는 쌍탑이었는데 지금은 하나만 남아있다. 아래로는 남강이 굽이쳐 흐르고 있고 강 건너에 넓은 들판이 활짝 펼쳐져있다.

탑바위(왼쪽)와 탑바위에서 내려다 본 남강

 

▲충익사

충익사는 의령 9경 중 제1경이다. 곽재우와 그의 지휘를 받았던 17명 의병장, 그리고 수많은 무명 의병들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다. 충익은 곽재우 장군의 시호다. 의령읍 중동리에 자리잡은 충익사는 의병탑·사당·충의각·기념관·의병박물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충익사 바로 옆에는 높이가 27m나 되는 의병탑이 우뚝 솟아 있다. 가운데 둥근 18개의 흰색 고리는 곽재우와 그와 함께 의병을 이끈 17명의 의병장을 뜻한다.

충의각은 곽재우와 17 의병장에게 사후에 내려진 관직명 등을 봉안하고 있는 곳이다. 1910년 우리나라 전통양식의 목조건물로 지었는데 어느 한 곳에도 쇠못을 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정원에는 모과나무 한 그루가 있다. 높이 12m, 가슴높이의 줄기 둘레가 3m에 이른다. 수령이 500년으로 추산되어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모과나무로 알려져 있다. 가례면 수성마을의 하천변에 있던 것을 1978년 이곳 충익사로 옮겨 심은 것이다. 당시 사당 건립 때 참석한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식수도 있다.

충익사 전경(출처 의령군)

 

▲안희제 생가와 안호상 고택

부림면 입산리 입산마을에는 탐진 안씨 집성촌이 있다. 이곳에서 안희제 등 애국지사들이 태어난 것을 기념해 의령군이 몇몇 생가를 조성했다. 안희제(1885∼1943)는 곽재우, 이병철과 더불어 의령의 3대 인물이라고 하는데 이름이 낯설다. 하지만 내가 무식한 것일 뿐 그는 엄연한 독립운동가다.

안희제는 일제강점기이던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설립해 그곳에서 번 돈을 독립자금으로 보내고 만주까지 건너가 활동했다. 교육·언론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투옥과 고문을 거듭 당한 끝에 병을 얻어 1943년 출소 후 3시간 만에 생을 마감했다.

안희제 생가

 

의령에는 이런 독립운동의 기운이 뻗어있는지 기림의 외할아버지도 독립운동가였다. 모친도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마을에 경로회관을 지어 기부한 의령 신반의 정신적 유지다. 기림은 어려서부터 “자세를 바르게 하라”고 어머니에게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집 밖으로 나가는 걸 싫어했다. 만나는 어른들마다 모두 인사를 해야 해서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날 기림이 인성에 좋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한다.

안희제 생가 옆에는 1911년 지어진 안호상 고택도 있다. 6·25전쟁 때 사랑채와 대문채가 화재로 사라져 현재는 안채만 원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1902년 의령에서 태어난 안호상은 식민사관에 젖은 사학계를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매섭게 질타했던 민족사학자이자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을 받드는 대종교를 이끈 종교지도자였다. 안호상은 단군의 역사와 존재를 의심하거나 부정하는 사람을 ‘역사의 도적’으로, 단군 역사를 신화나 전설로 얼버무리려는 식민사관에 젖어 있는 사가(史家)에게는 ‘무식꾼’이라고 질타했다.

안호상은 해방 후 대한민국 초대 문교부장관을 지냈다. 한때는 참의원으로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고 종교계와 교육계 등 여러 단체를 두루 거쳤다. 1995년에는 93세의 노구를 이끌고 정부 허가없이 북한에 들어가 밀입국 파동이 일어났다. 97세에 눈을 감아 그의 생애는 일제강점기, 해방, 분단, 전쟁, 산업화시대를 거치는 파란많은 한국 현대사 100년과 거의 맞물려 있다.

안호상 고택

 

▲봉황대와 일붕사

궁류면 평촌리에는 기암절벽 ‘봉황대(鳳凰臺)’가 있다. ‘신선이 봉황을 타고 내려와 놀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의령 9경 중 제3경이다. 우람하게 치솟은 석벽을 담쟁이넝쿨이 휘감아 신비로운 느낌마저 준다. 봉황대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암벽 사이로 자연 동굴이 하나 있고 이 동굴을 지나면 좁은 석문이 앞을 가로막는다. 석문을 빠져나가면 또 다른 동굴이 있는데 약수터다. 봉황대 중턱에는 약간의 평지를 깎아 만든 봉황루가 있다.

 

봉황대 바로 옆에는 봉황산 암벽을 파고 들어가 만든, 세계 최대 석굴법당인 일붕사가 자리잡고 있다. 1984년 누전으로 법당이 소실되자 1986년 화재로 소실될 염려가 없는 자연그대로의 거대한 바위를 파내 동굴법당을 만들었다. 제1동굴법당인 대웅전은 깊이가 50m에 면적이 380평이나 된다. 세계 최대의 동굴법당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제2동굴법당인 무량수전도 90평이다.

일붕사 제1동굴법당

 

▲수도사

수도사(제7경)는 의령 9경 중 유일한 사찰이다. 신덕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행정상으로는 용덕면 이목리다. 신라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고찰이라고 해서 가봤는데 고찰의 느낌은 찾아볼 수 없다. 전각과 요사채도 몇 개 동에 불과하다. 다만 신덕산 중턱에 있어서 오름길이 호젓하고 뒤로는 의령 특유의 편안한 산이 지키고 있어 안온하다.

수도사에는 대웅전은 없고 극락전이 있다. 극락전 앞에는 앙증맞은 4층 석탑이 자리잡고 있고 동쪽 산기슭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부도밭이 있다. 수년 전, 다 쓰러져가는 칠성각을 개축하고 손상된 칠성탱을 수리하던 중에 1901년 비밀리 봉인된 부처님 진신사리 7과가 나왔다고 하는데 사실 부처님 진신사리는 믿거나 말거나이다.

수도사(출처 의령문화원)

 

▲자굴산과 한우산

당초 계획에는 있었으나 일정상 소화하지 못한 것이 있으니 한우산과 자굴산 산행이다. 서로 능선을 맞대고 있는 한우산과 자굴산은 기기묘묘한 암봉이나 험준한 계곡은 없지만 제법 웅장하다. 자굴산은 의령의 진산답게 높이가 897m나 된다. 정상에 오르면 지리산 천왕봉이 눈에 들어온다. 등로는 가례면 갑을리에서 출발하는 1.2km 코스, 새가례에서 출발하는 7.4km 코스 등 다양하다.

자굴산(출처 의령군)

 

한우산(830m)의 한자는 ‘찰 한(寒)’에 ‘비 우(雨)’자다. 우리말로 쓰면 ‘찰비산’이다. 골이 깊어 한여름 소나기도 겨울비처럼 차갑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산에는 정상 턱밑까지 차고 올라가 능선을 감아 도는 드라이브 코스가 있다. 임도처럼 좁은 길이 아니라 차량 교행이 가능할 정도로 탄탄하게 놓아 의령을 찾을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이 한우산 드라이브다. 한우산으로 향하는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 벽계관광지로 향하다 보면 1998년 제작된 영화 ‘아름다운 시절’ 촬영지도 만날 수 있다. 자굴산과 한우산은 다음에 의령에 또 들른다면 방문지 1순위다.

 

■주요 먹거리

 

각종 기사와 블로그를 보면 의령의 대표적인 먹거리를 소개할 때 소고기국밥과 망개떡을 꼽는다. 일본식 국수 소바를 꼽기도 하지만 일본식이라서가 아니라 우리의 전통 음식이 아니어서 생략한다. 우리가 이번 여행에서 경험한 것은 추어탕, 숯불돼지고기, 망개떡이다.

기림이 안내한 추어탕집은 신반리의 합천식당(055-574-2921)이다. 여주인은 기림이가 들르면 기림이 모친께 기림이가 왔다고 바로 알려줄 정도로 기림이 집과 공간적으로 심리적으로 가깝다. 그것을 알고 있는 기림이가 그날만큼은 주인한테 자신의 고향방문을 모친께 알리지 말아달라고 당부한다. 당초 우리 계획은 기림의 모친을 뵙는 것인데 기림이 그런 자리를 마련하지 않은 것은 말은 안했지만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우리도 묻지 않았다. 나중에 물어보니 당시 서울에서 코로나가 기승을 부려 혹시라도 모친께서 코로나에 걸릴까봐 그랬단다.

부림면 신반리의 합천식당과 추어탕

 

추어탕이 나오는데 서울에서 먹던 것과 확연히 다르다. 일단 국물이 말갛다. 기림이 설명에 따르면 의령에서는 미꾸라지를 갈고 나서 그것을 전부 탕에 넣는 것이 아니라 뼈같은 알갱이는 모두 버리고 배춧잎과 대파, 고사리, 숙주 위주로 넣기 때문에 국물이 말갛다고 한다. 서울식과 남원식에 익숙한 나로서는 낯설었지만 한 숫갈을 입에 넣는 순간 새로운 맛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전날 과음한 탓도 있지만 국물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추어탕의 신세계였다. 함께 나오는 반찬도 정갈하다. 가격도 7000원이니 착하다. 기림이 말로는 이 집만 그런게 아니라 의령의 추어탕집이 모두 이와 비슷하므로 이곳이 특별히 맛집은 아니라고 한다.

식당 한 가운데에 ‘해납백천(海納百川)’이 써있다. ‘백개의 천이 바다로 들어간다’라는 뜻으로, 해석하자면 다른 사람을 탓하지 아니하고 너그러이 다 받아준다는 뜻이란다. 아무 생각없이 봤는데 글씨를 쓴 이가 제헌 의원이자 진보 정치인으로 유명한 윤길중씨다. 여주인은 윤길중씨가 누군지 모르는 눈치다.

그 다음 기림이가 우리를 데려간 곳은 숯불돼지고기를 전문으로 하는 봉수면의 재건식육식당(055-572-3131)이다. 나는 평소 숯불돼지고기를 좋아하는데 이 집은 특히 만족스럽다. 숯불향이 고기에 배어있고 기름을 쭉 빼서 담백하다. 강추다.

의령은 망개떡으로도 유명하다. 멥쌀로 빚은 떡에 팥소를 넣어 만든 떡인데, 망개나무 잎으로 떡을 싸서 망개떡이라고 부른다. 떡살은 부드럽고 팥소는 달콤한데 망개 잎 특유의 향이 살짝 배어 있어 독특한 맛을 낸다. 망개잎은 청미래덩굴로 불리며 백합과에 속하는 덩굴성 관목이다. 꽃이 진 뒤에 가을철이 되면 빨간 열매가 암나무에 모여 붙는데, 이 열매를 망개라 한다. 간혹 서울 시내에서 사먹는 망개떡과는 확실히 차이가 있다.

이번에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의령 소고기국밥은 큼직하게 썬 쇠고기와 선지를 넣고 푹 끓여 낸 진한맛이 특징이다. 일부러 소고기국밥을 먹기 위해 인근 도시에서 오는 관광객도 꽤 있다고 하니 다음에 의령에 들르게 되면 반드시 맛보아할 1순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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