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일제하, 가슴과 생활로 조선을 사랑한 아사카와 다쿠미·노리타카 형제

↑  아사카와 다쿠미

 

by 김지지

 

다쿠미, 17년간 조선에서 살다 조선의 흙이 돼

일본의 민예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가 머리와 지성으로 조선을 사랑했다면 아사카와 다쿠미(1891~1931)는 가슴과 생활로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이다. 다쿠미는 1931년 40살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17년간 조선에서 조선인처럼 살다 조선 땅에 묻혀 조선의 흙이 되었다. 그는 우리 자신이 전통미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알지 못할 때 우리보다 먼저 몸과 마음으로 조선의 미를 상찬했다.

다쿠미가 조선 땅을 처음 밟은 것은 23살이던 1914년 5월이었다. 당시 서울에는 1년 전 소학교 교사로 부임한 형 아사카와 노리타카(1884~1964)가 있었다. 형제는 야마나시현 키타코마군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감리교회에 다니고 조선으로 건너와서도 서울 회현동 경성감리교회에 다녔다. 형 노리타카는 1906년 현립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심상소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조각을 배우다가 조선의 공예품에 이끌려 서울의 심상소학교 교사를 자청해 1913년 5월 남대문심상소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조선 땅에서 그가 먼저 달려간 곳은 고려청자와 조선백자가 있는 창경궁의 이왕직 박물관이었다.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그는 틈틈이 백자를 사 모으며 조선 도자기를 연구했다. 방학 때는 도쿄로 건너가 조각을 배웠다. 1914년 9월 야나기 무네요시의 도쿄 집을 찾아가 조선백자 ‘청화백자추초문각호’를 선물한 것도 야나기가 보관하고 있던 로댕의 조각품을 보기 위해서였다. 지금 일본 민예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백자 항아리는 야나기가 조선을 방문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노리타카는 1919년 4월 교사를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가 조각에 몰두했다.

동생 다쿠미는 일본에서 1909년 현립농림학교를 졸업하고 국유림을 관리하는 관청에 근무하다가 1914년 5월, 형이 있는 조선으로 건너왔다. 다쿠미는 1914년 7월 조선총독부 산림과 산하 임업시험소(현 국립산림과학원)의 고용원으로 취직, 조선산 수목과 외국산 수종의 양묘 시험 재배에 종사했다. 이후 조선에서 눈을 감는 마지막 날까지 17년 동안 조선의 산림녹화 사업에 종사하면서 조선 낙엽송의 양묘(1916년)를 성공시키고 잘 자라지 않는 종자를 노천에 매장하는 방법으로 싹을 틔우는 ‘노천매장법’을 확립하는 성과를 거뒀다. 당시 조선 잣나무는 2년간 길러야 양묘에 성공할 수 있었지만 다쿠미가 고안한 양묘법 덕분에 1년으로 단축되었고 지금도 이 방법이 사용되고 있다. ‘싸리나무의 종류’, ‘민둥산 이용에 대해’ 등 여러 편의 글과 논문도 관련 회보에 발표했다.

아사카와 다쿠미(오른쪽)와 형 노리타카

 

가슴과 생활로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

다쿠미는 “조선 도자기의 신”이란 평을 들었던 형 노리타카의 영향을 받아 조선의 도자와 공예에도 관심이 많았다. 1916년 8월 조선을 처음 방문한 야나기 무네요시와 함께 조선의 골동품 가게를 뒤지며 안목을 키웠다. 조선의 전통 가마터도 직접 방문해 ‘조선 가마터 유적 조사 경과보고서’를 작성했다. 1920년 12월에는 조선민족미술관을 건립하자고 야나기와 뜻을 모았다. 야나기는 장소 확보와 자금 조달을 맡고 다쿠미는 전시품의 수집·관리 등의 실무를 맡았다.

야나기는 자신이 동인으로 참여하고 있는 일본의 문학예술잡지 ‘시라카바(白樺)’지 1921년 1월호에 ‘조선민족미술관의 건립에 대해’란 호소문을 발표해 미술관 건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야나기의 일본 친구들은 물론 도쿄에서 조선인 유학생 운동을 주도하던 백남훈, 김준연, 백관수 등이 기부금을 보내왔다. 야나기의 아내이면서 유명 성악가인 가네코는 1921년 5월 조선에서 개최한 음악회 수입을 기부했다. 다쿠미 역시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도 사재를 털어 미술관을 지원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도자기, 고미술, 민예품 등을 전시하는 아시아 최초의 공예미술관인 ‘조선민족미술관’이 1924년 4월 9일 경복궁 집경당 안에서 개관했다.

다쿠미는 생전에 ‘조선의 소반’(1929.3), 사후에 ‘조선도자명고’(1931.9) 등 2권의 저서를 냈다. ‘조선의 소반’에서는 한국 문화가 중국의 아류라는 일본인들 주장에 맞서 조선 사람은 실내에서 의자를 사용하지 않고 바닥에 앉아서 생활을 하는 까닭에 상(床)에 관해서는 중국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기술해 조선 문화의 독자성을 변론했다. 다쿠미가 세상을 떠난지 5개월 뒤에 출간된 ‘조선도자명고’는 조선 전체에 산재해 있는 가마터를 꿸 정도로 전국을 뒤지고 다닌 뒤 얻은 성과였다. 도자기를 만드는 도구와 원료, 가마터 조사 등을 세밀하게 수록해 지금까지도 우리 공예와 도자를 연구하는 사람에게는 보물 같은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다쿠미는 조선말을 하고 바지저고리 차림에 망건을 쓰고 외출하는 등 진정으로 조선인과 하나가 되려고 했다. 집은 온돌방이었고 방안에는 조선 장롱을 두고 살았다. 조선 음식을 좋아해서 비빔밥도 만들 줄 알고 ‘조선의 김치’라는 논문도 썼다. 술도 막걸리만 마셨다. 마음도 따뜻해 남자 걸인을 만나면 면사무소로 데리고 가 무언가 일을 찾아주었고 여자 걸인을 만나면 주머니에 있는 돈을 모두 꺼내 주었다. 넉넉지 않는 형편에 몇몇 학생에게는 장학금도 주었다.

아사카와 다쿠미

 

 

“죽어도 조선에 있을 것이니 조선식으로 장례 지내 달라”

다쿠미는 1931년 2월부터 한 달간 조선 각지를 돌아다니며 묘목 기르는 법을 가르쳤다. 무리했는지 서울로 돌아와 3월 27일 급성 폐렴으로 자리에 눕더니 결국 1931년 4월 2일 오후 6시 40세 나이로 순직했다. 숨을 거두기 전 “나는 죽어도 조선에 있을 것이니 조선식으로 장례를 지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유언에 따라 흰색 바지저고리 차림의 조선 옷을 입은 채 이문리 묘지에 안장되었다. 야나기는 일본에서 소식을 듣고 달려와 통곡했다. 추도문에는 “그는 진심으로 조선을 사랑하고 조선인을 사랑했다. 지금까지 그만큼 도덕적인 성실함을 지닌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썼다. 경성제대의 한 교수는 추도문을 경성일보에 5회 연재하는 것으로 애도했다. 아내와 딸은 다쿠미가 죽은 뒤에도 조선에 살다가 광복 후 일본으로 돌아갔다.

다쿠미의 이문동 공동묘지 안장. 맨 오른쪽이 민예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다.

 

다쿠미가 죽은 지 11년이 지난 1942년 7월 이문리 묘지 근처에 새로 도로가 나게 되어 다쿠미의 묘는 교외 망우리 공동묘지로 옮겨졌다. 해방 후에는 묘를 돌보는 이가 없어 덤불로 가려지고 묘표도 넘어져 뒹굴었다. 그러자 한국임업시험장 옛 동료들이 안타깝게 생각해 1964년 6월 묘를 복원하고 수복제를 지냈다. 1984년 8월에는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 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라고 새긴 추모비가 세워졌다.

다쿠미의 망우리 묘지

 

한편 조각을 배우기 위해 1919년 일본으로 건너간 노리타카는 일본의 미술전에서 입선하는 등 나름대로 조각에서 일정 지위를 확보했으나 조각계의 파벌 싸움이 싫어 1922년 4월 조선으로 돌아와 조선의 도자사를 본격적으로 연구했다. ‘시라카바’지 1922년 9월호에 발표한 ‘조선 도자기의 가치 및 변천에 관해’ 제목의 논문은 그 최초의 성과였다. 이후에도 조선 다완(茶碗)의 산지를 확인하기 위해 전국의 가마터를 조사하고 세종실록, 경국대전, 동국여지승람 등의 고문헌을 뒤져 조선 도자기의 산지들을 찾아냈다. 그렇게 찾아낸 도요지가 전국에 걸쳐 678곳이나 되었다.

그때마다 도편(陶片)의 채집지, 추정 연대, 형상 등을 꼼꼼히 기록하고 조사 시기와 유적의 수 등도 빠짐없이 정리해 조선 도자사에 중요한 자료로 남겼다. 1934년 7월에는 조선 도자기전을 도쿄에서 열어 그간의 조선 도자기 연구를 집대성한 결과물을 선보였다. 현대 한국 도예계의 거장인 지순탁이 도예에 뜻을 두는 계기를 만들어준 사람도 노리타카였다. 도자사를 연구하면서도 조각과 회화에 열심이어서 조선미술전에서 여러 편의 조각과 회화로 입선 혹은 특선을 차지했다. 도자기와 관련된 연구 논문도 수차례 발표하고 ‘항아리’, ‘석굴암에 머물다’ 등의 시를 발표했으며 일본의 단카와 하이쿠도 여러 편을 남겼다.

1945년 8월 일본의 패망 후에도 일본으로 바로 귀국하지 않고 미 군정청의 특별 허가를 얻어 조선 도요지의 조사를 계속했다. 그러다가 개인 소장의 공예품 3,000여 점과 도편 30상자를 민속박물관에 기증하고 1946년 11월 33년에 걸친 조선 생활을 청산한 뒤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때의 공예품들은 그 후 국립중앙박물관에 흡수되어 지금도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1964년 1월 일본에서 80세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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